제190화
엽연채가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요.”
“마마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새언니를 부르지 않으시니… 새언니가 서찰을 보내 여쭤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주묘서의 말에 엽연채는 ‘픽’ 하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서찰을 보냈죠. 그런데 감감무소식입니다. 답장이 오지 않아요.”
사실 그녀는 서찰을 보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진씨와 주묘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들은 엽연채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 일은 엽연채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엽연채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엽연채는 외출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몰래 태자부에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주묘서는 한층 의기소침해졌고 진씨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마님.”
이때, 녹엽이 걸어 들어왔다.
“둘째 도련님과 셋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진씨는 녹엽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다지 관심 없다는 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돌아왔으면 돌아온 거지, 뭘 그리 소란스럽게 구는 게냐.”
그 말에 녹엽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머님, 부군께서 돌아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기뻐하며 진씨에게 예를 행하고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 진씨는 태자부 일로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인데 엽연채가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를 보이자 가슴이 어찌나 답답한지 숨통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 * *
한편, 주운환은 동쪽 수화문에 세워진 마차에서 내려 여한과 함께 자신의 짐을 옮기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 언뜻 보니 자홍색 치마를 입은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얇은 흰색 상의와 가볍고 얇은 자홍색 천 치마로 이루어진 대금식 유군을 입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흩날렸고 조그맣고 흐릿한 해당화 문양은 햇살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운환은 책 한 보따리를 든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맑고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한 달 정도 못 본 사이 더 고와진 듯했다.
엽연채는 주운환의 앞으로 조르르 달려가 뒷짐을 진 채 그를 쳐다보며 웃어 보였다.
“셋째 공자, 돌아오셨군요.”
주운환은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감이 한순간에 싹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추길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뛰어오신 거란 말이지?’
엽연채가 보니 주운환은 낙낙한 크기의 새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어 턱이 평소보다 조금 뾰족해 보였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고운 눈에서는 어딘지 쓸쓸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입술은 바짝 말라 건조해 보였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엽연채는 마음이 아팠다.
‘힘들게 찌워 놓은 살이 이렇게 쏙 빠져 버리다니!’
이에 하루빨리 영양보충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둘째 도련님, 조심하세요.”
이때 하인이 주종과를 부축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간 데다 아흐레 내내 과거 시험을 치르느라 주종과는 적잖이 무리를 한 상태였다. 그는 마차 안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리다가 꾸물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주종과도 얼굴이 반쪽이 되었고 낯빛이 창백했다.
주종과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엽연채와 주운환이 부부 금실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게 돼 낯빛이 순식간에 더욱 나빠졌다.
“아이고, 우리 종과 도련님이 오셨구나!”
누군가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 이낭이 상기된 모습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저 멀리 주 백야도 정신없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둘째야.”
비 이낭이 주종과를 덥석 잡다가 부딪히자 그는 비틀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비 이낭, 부딪혔잖아요.”
주종과는 그리 말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종과 도련님!”
비 이낭은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해하다가 얼른 뒤를 쫓으며 물었다.
“시험은 어찌 되었습니까? 붙었습니까? 응?”
시험이 끝나면 사흘 후에 합격자 명단을 공표하니 다들 성적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법이었다.
주종과는 낯빛이 더욱 가매졌다. 그는 몸이 피곤한데도 바람을 일으키며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나 주 백야를 지나치는 순간, 그가 주종과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종과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주종과는 침울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쏜살같이 그 자리를 떠나갔다.
“설마… 떨어진 건가?”
주 백야는 안색이 변하더니 이내 풀이 확 죽었다. 그는 이번 향시에 참가하는 아들에게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의 집안에서도 거인擧人이 나오고 학자가 나와 가문의 위상을 한껏 높여 주기를 바랐다.
“네?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비 이낭의 머릿속에서는 ‘쾅’ 하고 굉음이 터졌다.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그녀는 주종과가 떠난 방향으로 냅다 달려 그의 뒤를 쫓았다.
“종과 도련님! 기다려 보세요! 시험에 붙은 겁니까? 붙은 게지요?”
주 백야는 힘이 쭉 빠져 버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또 다른 아들이 물건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둘째 아들만 신경 쓰고 셋째 아들은 등한시했다는 생각에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운환에게 걸어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셋째야, 고생이 많았다.”
“괜찮습니다.”
주운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 백야는 이미 낙심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보기로 했다.
“셋째야, 둘째의 낯빛이 저리 어두운 걸 보니… 정말로 떨어진 게냐?”
“예.”
주운환은 마차에 실린 짐을 아래로 옮겼다. 그러다 엽연채가 자신의 책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그녀의 손을 가볍게 치며 책을 뺏었다.
“그냥 두시지요. 그러다가 발등이라도 찧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책을 다시 가져오지는 않았다.
주 백야는 주종과가 정말로 낙방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울상을 짓더니 묻는 김에 주운환의 결과도 물었다.
“그럼 너는 붙었느냐?”
“예.”
주운환은 책이 든 상자를 들어 올려 품에 안으며 대답했다.
“그래.”
주 백야는 풀이 죽은 얼굴로 대꾸하다가 이내 깜짝 놀라 고개를 홱 쳐들고 다시 물었다.
“방금 뭐라 했느냐? 붙…었다고?”
“예.”
주운환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을 반복했다.
“정말 붙었다는 말이냐?”
주 백야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이냐? 거인이 되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보다 못한 여한이 언짢은 기색을 비치며 끼어들었다.
“예, 셋째 도련님께서 합격하셨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셋째 네가 붙었다는 말이냐?”
주 백야는 너무도 감격스러워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우리 가문에서 정말로 거인이 나오다니! 게다가 그 거인이 셋째라니. 정말이지 믿기지가 않는구나.”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게 기쁠 일인가? 자신만 창피하다고 느끼는 건가? 조상 대대로 위풍당당한 대장군을 배출했던 어엿한 장수 가문의 후예들이 지금은 위험에 처하자 모래 속으로 머리를 감추는 타조가 따로 없게 됐는데 말이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게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저 과거 시험이나 보고 있지 않은가.
“셋째야, 정말 시험에 붙은 게냐? 향시에 붙은 것이냐?”
주 백야는 눈앞의 현실이 꿈같기만 해 또 되물었다. 주운환은 그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책이 든 상자를 품에 안고 빠르게 걸어갔다.
“셋째야! 셋째야! 왜 도망가는 게냐?”
주 백야는 요즘 젊은이들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이 황급히 자리를 뜨는 건 그도 이해가 갔다. 창피해서 그럴 테니 말이다. 그런데 시험에 떡하니 붙어 놓고서도 어째서 급히 자리를 뜨는 걸까?
주 백야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주운환 또한 창피해서 이러는 것임을 말이다. 주운환이 도망치자 그가 뒤를 쫓으며 물었다.
“셋째야, 셋째야. 정말로 향시에 붙은 것이냐? 이 아버지에게 제대로 말을 해 보거라!”
뒤에서 쫓아가던 여한이 언짢은 투로 대신 대답했다.
“예! 붙었습니다! 향시에 붙었다고요, 백야! 그러니 더는 묻지 마세요.”
주 백야는 그제야 좀 실감이 났다.
“정말 붙은 게로구나! 와! 정말로 붙었어! 우리 주씨 가문에도 드디어 학자가 나왔구나. 곧 우리 가문의 위상이 한껏 높아지겠구나. 내년에 진사로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좋은 기회가 있을 테니 열심히 학문을 닦으면 되지.”
주운환은 난죽거로 들어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셋째야, 뭐 하는 것이냐? 문을 열어 보거라! 문을 열어 보래도!”
주 백야는 문을 힘껏 두드렸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정원에 다다르자 순간 멍해졌다. 너무 빨리 뛰어오는 바람에 엽연채가 제대로 쫓아오고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부친처럼 문밖에 서 있는 건 아닐까?
주운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 앞에 도착하니 밖에서 주 백야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들이 과거 시험에 붙었구나. 허허허허!”
“백야, 부탁이니 좀 진정하세요.”
여한의 우는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도 먼 길을 다녀오느라 고생했는데 지금 주운환과 주 백야의 신경전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자신의 침상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여한아, 네가 대신 알려 주려무나. 셋째가 몇 등으로 합격했느냐?”
“괜찮은 성적이었습니다. 37등으로 붙었으니까요.”
“37등?”
주 백야는 여한의 대답을 듣고 더더욱 기뻐서 표정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가문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 과거 시험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37등이면 아주 훌륭한 성적이었다.
‘내 아들이 상위권에 들다니!’
멀리서 듣고 있던 엽연채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녀는 주 백야에게 시달리는 주운환의 모습을 뒤로하고 궁명헌으로 돌아갔다.
혜연은 정원에서 바닥에 물을 뿌려 가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띤 엽연채를 보고는 물었다.
“아가씨, 어찌 이리 기분이 좋아지신 거예요?”
‘아가씨는 마님에게 불려가지 않았는가? 무슨 일로 불렀는지야 뻔하니, 아가씨가 화를 내시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이렇게 기뻐하실 리는 없는데.’
이때, 추길이 헐레벌떡 걸어오며 소식을 알렸다.
“방금 전 마님 처소에 갔는데 녹엽이가 셋째 도련님과 둘째 도련님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어!”
혜연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래서 이렇게 기뻐하시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