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89화 (189/858)

제189화

엽영교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녀가 곧 냉소를 흘렸다.

“둘째 새언니, 그렇게 도량이 넓으면 바깥 서재에 있는 사홍이를 둘째 오라버니에게 안겨 주지 그래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손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목청을 높였다.

“사홍이, 사녹이 이야기는 왜 꺼내요?”

“둘째 새언니,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어서 가서 사홍이를 데리고 들어오라니까요. 내가 보니 둘째 오라버니와 사홍이 사이의 감정이 큰오라버니와 은정랑처럼 보통 깊은 게 아니던데요!”

엽영교는 비단부채로 입술을 살짝 가리며 어여쁜 미소를 지었고, 손씨는 엽영교의 말을 다 듣더니 엽승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엽승신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상을 탁 내려쳤다.

“영교 너처럼 생사람을 잡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왜들 이리 시끄럽게 떠드는 게냐!”

엽학문이 호통을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리에 앉거라!”

엽학문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엽승신과 손씨는 주눅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손씨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꽉 물고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사홍과 사녹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엽학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것들이 즐거운 중추절에도 요란을 피우다니!’

* * *

그 시각 정국백부.

일상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달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뜰에는 팔선상 두 개가 놓여 있었고 방 안에 두던 기다란 탑상도 꺼내 놓은 상태였다. 팔선상 위로는 간식거리와 술은 물론, 향로도 한 개 놓여 있었다.

비 이낭은 향 세 대를 손에 쥔 채 달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달에 계신 상아 선녀님, 달님. 저희 종과 도련님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이에 주 백야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주종과를 언급했다.

“내일이 바로 향시가 열리는 날이구나. 둘째가 어쩌고 있을지 모르겠다.”

팔선상 곁에 앉아 있던 진씨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는 주묘서의 시선은 엽연채에게 향해 있었다. 엽연채는 주묘화와 함께 상 앞에 앉아 월병을 먹고 있었다.

엽연채가 월병 하나를 자르며 말했다.

“이건 팥소가 들어 있어요.”

주묘화도 월병을 자르며 속을 이야기해 줬다.

“여긴 화퇴火腿(절인 후 볕에 말리거나 불에 그슬린 햄)가 들어 있어요! 작은 새언니는 어떤 걸 좋아해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조금 붉어진 얼굴로 부끄러워했다.

“전 월병을 먹을 때 겉부분만 먹어요.”

그 말에 주묘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맛 한번 참 독특하네.’

엽연채는 월병 대신 포도를 입에 넣었다. 그때 뒤쪽에서 보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엽연채는 표정을 굳혔지만 그녀를 상대하기도 귀찮아 모른 척했다. 주묘서는 엽연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람들은 잠시 앉아 있다가 가을바람이 차서 금세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주묘서와 진씨는 함께 일상원으로 들어섰다. 주묘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원망 서린 목소리로 불만을 토했다.

“새언니가 방금 전에 저랑 한마디도 안 했어요. 저를 상대조차 안 해 줬다고요.”

진씨가 자신을 쏘아보는데도 주묘서는 손수건을 꽉 쥔 채 탑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아직도 저한테 화가 난 걸까요? 옹졸하기는!”

주묘서는 여러 날이 지나면서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목을 매고 죽겠다고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되었다. 아니, 애초에 초대장을 받은 사실을 숨기고 엽연채를 떼어 놓고 혼자 가는 게 아니었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엽연채를 따라 계속 태자부에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

주묘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진씨에게 치댔다.

“저도 제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언니를 태자부로 보내 태자비 마마께 사과를 드리게 해요. 제가 다시 태자부에 갈 수 있도록 어머니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진씨도 마음이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딸이 태자부에 드나들며 권세가와 왕래하는 모습을 지켜볼 요량이었지,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머니…….”

진씨가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주묘서가 또다시 치근댔다. 이에 진씨는 화가 치밀어 사납게 쏘아붙였다.

“네가 말하지 그러느냐! 넌 낯짝이 소가죽보다 더 두껍지 않으냐?”

주묘서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워도 이번에는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씨는 더더욱 그랬다. 먼저 엽연채를 불러오면 여기서 더 체면이 깎일 터였다. 깎일 체면이 남아 있기나 있단 말인가.

방금 전 달구경을 할 때 어째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걸까? 이제 따로 엽연채를 부르게 되면 자신이 굽실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막 아침 식사를 마친 엽연채와 혜연이 탑상에 기대어 서책을 보고 있는데 주묘화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새언니.”

주묘화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둘째 아가씨, 이렇게 이른 시각에 어쩐 일이에요!”

엽연채는 이렇게 대꾸하고는 서책을 내려놓으며 하품했다.

혜연이 재빨리 차를 내오며 권했다.

“둘째 아가씨, 차 드세요! 무료하셔서 이른 아침부터 놀러 오셨나 봐요.”

주묘화는 표정을 굳히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게… 그저께 어머니께서 병이 나셨어요. 어제 중추절에는 많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지만 어머니가 기침을 조금 하시는 걸 제가 들었거든요. 작은 새언니, 우리 어머니를 뵈러 가요.”

밖에서 물을 뿌려 가며 바닥 청소를 하고 있던 추길이 그 말을 듣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병이 났다고? 아가씨를 볼 면목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그러니 기침을 좀 한다고 하는 걸 테고!’

“그래요. 지금 가 보죠.”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 * *

일상원에 도착한 그들이 서차간으로 들어가자 탑상에 앉아 있는 진씨와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아 있는 백 이낭의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가 예를 올리며 안부를 물었다.

“어제저녁에 어머님이 기침을 하셨다던데 지금은 괜찮아지신 겁니까?”

그러자 진씨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다. 자리에 앉거라!”

엽연채와 주묘화가 자리에 앉자 녹엽이 차를 내왔다.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참, 어제가 중추절이었는데 셋째 마님께서는 태자비 마마께 월병을 선물하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엽연채의 눈빛에 비웃음이 어렸다.

“보냈어요.”

진씨가 백 이낭의 말을 이어 받았다.

“월병을 선물하면서 어째서 네 큰시누이는 데려가지 않은 것이냐? 지난번에 이 어린 것이 철없게 행동했으니 네가 데려가서 마마께 사죄를 드려야지.”

오늘 엽연채를 부른 건 바로 이 일을 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사람을 보내 불러오면 엽연채에게 사과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니 주묘화를 보내 불러온 것이었다.

진씨의 말에 엽연채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요. 제가 어찌 감히 경거망동해 불운을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진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화를 낼 수는 없어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다음번에 태자부에 갈 때는 네 큰시누이를 대신해 제대로 사죄를 드리거라.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데려가고.”

그러자 엽연채는 위로 내굽은 기다란 속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초대장은 모두 어머님 쪽으로 보내지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큰아가씨가 돌아온 후로 태자부에서 보낸 초대장을 받으셨습니까?”

진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엽연채는 냉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큰아가씨가 태자비 마마의 기분을 보통 상하게 해 드린 게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 저조차도 보려고 하지 않으시겠죠. 이번에 중추절 선물을 보냈지만 회신 한 통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진씨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낯빛도 더욱 어두워졌다.

“어머님 몸도 많이 좋아지셨다고 하니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씨에게 예를 올린 후 떠났다.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주묘화는 자리에 더 머무를 엄두가 나지 않아 엽연채를 따라 황급히 자리를 떴다.

“흑흑…….”

뒤편 장지문에서 걸어 나오는 주묘서는 눈시울이 붉었다. 지난번 자신이 태자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려 이젠 엽연채조차 초대장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울기는 뭘 우는 것이냐!”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큰아가씨, 상심하지 마셔요.”

그러나 위로와 달리 백 이낭은 속으로는 냉소를 짓고 있었다. 지난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언질을 줬는데도 그녀는 기어코 고집을 부렸다. 은인을 토사구팽했으니 결국 업보를 받은 셈 아닌가. 그러나 백 이낭은 겉으로는 좋게 말을 이었다.

“중추절 준비로 태자비 마마께서도 바쁘셨을 겁니다. 또 이제 태자 측비께서 태자부로 들어가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디 한가하게 사람을 초대해 말린 꽃을 만들고 차를 끓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바쁜 일이 끝날 때까지 저희는 그저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 말에 진씨와 주묘서는 두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 요즘 태자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터였다.

주묘서는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한 가닥 희망은 아직 남아 있지 않겠어?’

* * *

한편, 팔월 열엿새인 오늘은 각 성省에서 향시가 열리는 날이었다. 응시자들은 긴장 속에서 과거 시험장으로 들어갔고 앞으로 아흐레간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었다.

그 이튿날인 팔월 열이렛날, 태자부에서는 측비를 맞이했다. 정비를 맞이할 때 거행했던 대혼大婚 때에는 못 미쳤지만 그래도 떠들썩하고 경사스러운 분위기였다.

이후 진씨와 주묘서는 매일같이 기대를 품고 초대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구월 상순이 되도록 태자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주묘서는 희망을 버리고 방 안에서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고 진씨도 신경이 날로 날카로워졌다. 결국 진씨는 더는 참지 못하고 녹지를 시켜 엽연채를 불렀다.

엽연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표정으로 상석에 앉아 있는 진씨와 수돈 위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주묘서의 모습이 보였다.

진씨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묘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새언니, 지난번 일은… 내가 잘못했어요. 사과했으니…….”

그 말에 엽연채는 헛웃음을 쳤다.

‘네가 사과한 게 그리 대단한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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