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엽균은 호탕하게 한 잔 또 한 잔 술을 들이켜다 다 마신 뒤 이렇게 탄식했다.
“전 형님과 추랑이 큰이모와 연채처럼 막무가내인 줄 알았습니다.”
추경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추랑이 탁자를 치며 이리 대꾸했다.
“여인들이 뭘 알겠어. 매일 성가시게 학문을 익혀라, 이것저것 배워라 떠들어 대기나 하지, 어디 우리 마음을 이해나 하겠니.”
“내 말이 그 말이야!”
엽균이 탁자를 내리치며 동조했다.
추경은 미소를 지으며 두 동생을 부드럽게 꾸짖었다.
“추랑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어머니와 이모님이 잔소리를 많이 하시더라도 어쨌든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균이 너는 효성이 지극해 이모부님을 대신해 곤장도 맞지 않았느냐? 그러니 불효를 해서는 안 된다.”
엽균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죠. 불효를 해서는 안 되죠.”
“그분들이 잔소리를 하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우리는 아들이니 아무리 귀찮고 짜증 나더라도 참아야지.”
추경이 덧붙이자 엽균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랑은 상 위에 놓인 월병과 간식거리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균아, 내가 이것들을 좋아해서 그런데 뜯어서 몇 개 먹어도 괜찮니?”
그 말에 엽균은 굳은 표정을 하다가, 누구에게 줄 것인지 숨기고 싶지 않아 이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추랑아, 형님. 솔직히 말할게요. 이 과자들은 송화 골목의 정랑에게 보낼 것들이에요. 형님과 추랑이 이곳에 앉아 저와 술을 마시겠다고 하는 걸 보니 분명 저를 이해하시는 거겠죠.”
그 말에 추랑은 입꼬리를 올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추경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랬구나.”
엽균은 두 사람이 자신에게 동조하는 기색이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감옥에 계시고 허서도 향시를 치르러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전에는 아버지께서 월병을 준비하셨는데, 지금은 감옥에 갇혀 계시니… 그래서 제가 월병을 사 가지고 가는 거예요. 안 그러면 정랑 혼자 외롭게 중추절을 보내게 될 테니까요.”
그러자 추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균이 너는 효성이 참 지극하구나. 다만 이모님도 별장에 가서 지내시니 외로우실 텐데, 그건 모르는구나. 어찌 됐든 이모님은 네 어머니가 아니더냐? 그러니 네가 가서 함께 있어 드려야지.”
추경은 온사월도 그곳에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엽균은 온씨를 떠올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그저 혼자 조용히 계시려는 거 아닙니까? 집안에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할머니도 계시고 숙모들도 계시고요. 그런데 굳이 별장에 가서 지내시는 걸 보니 혼자 한적한 곳에 가서 가련한 척하시려는 거겠죠.”
추랑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술 주전자를 엽균의 머리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너는 어째서 이모님이 한적한 곳을 찾아가신 이유는 생각 안 해 보는 거야? 이모님은 더 이상 집에서 머무를 수 없어 그리하신 건데.”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희 할아버님께서 이모님이 이모부님을 고발해 감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다고 미워하고 계시잖아. 이모님을 원망하고 계시니 지난번에 연채가 친정을 방문해 월병을 선물했을 때조차 답례품을 다르게 주며 차별하셨지. 그러니 이모님께서 어찌 집안에서 편안히 지내실 수 있어? 별장으로 피신할 수밖에.”
“어머니께서 자초하신 일이야.”
추랑과 엽균의 대화를 듣던 추경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균아, 그 말에는 어폐가 있구나. 네 아버지가 잘못한 일이고 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사과해야 하는 일임이 지난번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느냐. 두 분 다 네 아버지고 어머니인데 너는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맞습니다. 모두 제 아버지고 어머니이세요. 전 두 분 다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다들 함께 화목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 서로 참고 양보하고 포용해 주면 좋지 않아요? 뭐 대단한 일이라고 곤장을 맞고 감옥살이를 하게 만드냐는 말이에요!”
화가 난 엽균은 술을 꿀꺽꿀꺽 들이켜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알겠네요. 어머니의 사정을 봐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였군요.”
“사정을 봐달라고 부탁하러 왔다고?”
추랑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모님은 네 친어머니이셔. 이모님이 그런 수모를 겪고 있는데도 넌 이모님을 위해 나서지 않고 되레 남을 돕잖아?”
“난 혈연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옳은 사람 편에 서는 것뿐이야!”
엽균이 반박했다.
“제 친어머니인데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이렇게 다른 사람을 업신여겨도 된다는 말이에요? 어머니는 혼수를 많이 갖고 계시고 아버지는 어머니 부군이시니 몇 개 가져다가 사용한 것뿐이에요.
어머니는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부족하지 않은데 꼭 문제를 신분 간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하나요? 어머니와 정랑 모두 아버지를 모시는 사람이잖아요. 그저 정랑의 신분과 출신이 좀 미천한 것뿐인데 매번 수모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야 해요?”
“이게 무슨!”
추랑은 밥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난 아무리 봐도 네 아버지와 외실이 네 어머니를 업신여기고 있는 걸로 보이던데? 지난번 관아 법당에서 너도 똑똑히 보지 않았니? 두 사람은 서로 죽고 못 살고, 네 아버지 마음속에는 네 어머니 자리는 조금도 없었어. 네 어머니가 얼마나 가련한 신세인지는 어째서 못 보는 거냐?”
그러자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가련하다고 한들 정랑만큼 가련하지는 않아! 정랑에겐 아버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아버지의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많은 걸 가지고 계시잖아! 그런데 이것마저 정랑에게 베풀어 주지 못하겠다는 거야?”
추랑은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온씨를 대신하여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겠다는 엽균의 생각을 칭찬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때, 엽균이 이어서 말했다.
“형님과 추랑은 내가 지금부터 할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난 해야겠어요. 정랑은 그저 평범한 촌부에 불과해요.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어 밑바닥에서 발버둥 쳐 왔죠.
반면 형님과 추랑은 부유한 집안의 공자이자 고귀한 출신이라 가난하고 평범한 백성들을 업신여겨 왔죠. 그들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하찮게 생각하며 그들을 짓밟으며 즐거워했죠.
하지만 난 다릅니다. 난 당신들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내 눈에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평등한 사람이니 우린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돼요. 됐어요. 말해 봤자 형님과 추랑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말을 왁 쏟아낸 엽균은 술을 마저 털어 넣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추랑은 엽균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쟨… 대체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추경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온씨 가문에 있을 때 엽균은 엽승덕과 은정랑을 구하기 위해 온씨더러 손해를 보라고, 억울함을 견디라고 해 대니 추경은 그를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에도 관아의 법당에서 본 엽균은 마음속에 온통 엽승덕과 은정랑뿐이었다.
추경은 그 생각을 하니 더욱더 화가 나 이 불효자 자식을 그냥 확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나 어찌 됐든 간에 그는 이모 온씨의 친아들이었다.
추경은 온씨와 엽연채가 가엽고 가여웠다. 그래서 엽연채와 온씨를 돕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늘 추랑과 함께 밖으로 나와 엽균과 우연히 마주친 척했다. 그의 마음을 천천히 되돌려 보려는 심산이었다. 같은 사내끼리 대화가 더 잘 통하는 일들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이야.
“둘째 형님, 전 도저히 균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추랑의 말에 추경은 냉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균이는 이미 자신만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확고해. 자기 앞에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려고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갈 데까지 가 보아야 한다. 뼈저린 교훈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테니까.”
추랑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안타까워했다.
“저러니 균이가 뭘 하든 연채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군요. 안 되겠어요. 마음속에서나마 잠시라도 우리 가여운 연채를 보듬어 줘야겠어요.”
이에 추경은 웃으며 그의 머리를 툭 쳤다.
“형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 녀석에게 따끔한 교훈을 줄 수 있을까요?”
“놔두자. 저렇게 행동하다 보면 저절로 교훈을 얻게 될 날이 올 거다.”
추랑이 묻자 추경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고 추랑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때, 식당 점원이 음식을 내왔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한 뒤 그곳을 떠났다.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빠르게 흘렀다. 중추절이 얼마 남지 않자 온씨와 온사월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별장을 떠났다.
중추절 당일. 정안후부에서는 전년과 마찬가지로 안녕당에 밥상을 차렸다. 저녁에는 안녕당에 딸린 정원에 월병과 간식거리, 과일과 술을 차려 놓고 향을 피우며 달에 절을 올렸다.
엽균도 집으로 돌아왔고 온 가족이 함께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온씨는 접시를 들어 등자橙子(오렌지)를 하나씩 자른 다음 껍질을 벗겨 엽균 앞에 내밀었다.
“균아, 등자 먹으렴.”
엽균은 엽학문과 묘씨, 엽승신 부부와 엽승강 부부 등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째, 셋째 숙부네의 두 어린 딸도 웃고 떠들며 놀고 있어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러자 엽균은 또다시 송화 골목의 정랑, 감옥에 갇힌 아버지, 과거 시험을 치르러 고향으로 돌아간 허서가 떠올랐다. 그들이 얼마나 쓸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엽균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부 온씨와 엽연채가 이리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온씨는 지금 태평스레 자신에게 과일이나 까 주고 있었다. 낯빛이 어두워진 엽균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안 먹을래요. 아버지가 감옥에서 무엇을 드시고 계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들이 되어 달콤한 과육을 즐기겠습니까.”
엽균이 홱 떠나 버리자 온씨는 낯빛이 창백해졌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아들이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이때, 손씨가 그 모습을 보더니 고소해하는 투로 참견했다.
“다 스스로 자초한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엽영교가 손씨를 노려보며 질책했다.
“즐거운 중추절이니 둘째 새언니는 말씀을 삼가세요!”
“영교 아가씨께서 큰새언니를 아주 아끼시네요. 동병상련을 느끼시나 보죠. 하지만 여인이라면 도량이 좀 더 넓어야 하지 않겠어요.”
손씨는 소리 내어 웃으며 묘기화 일까지 언급했다. 이는 묘기화의 말은 다 핑곗거리일 뿐이고, 사실 그도 엽승덕과 마찬가지로 밖에 따로 좋은 집을 마련해 미인을 숨겨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