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밖에 있던 하인들은 진씨를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경멸하는 눈빛을 보였다. 분명 엽연채가 가져온 기회인데 도리어 그녀를 따돌리고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진씨는 부끄럽고 무안한 나머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연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눈가를 문지르더니 억울한 듯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떴다.
주비양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주묘서를 쓱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아이고, 알고 보니 그런 일이군요?”
비 이낭은 금방이라도 돼지가 꽥꽥거리듯 폭소를 터뜨릴 것만 같았다. 한집안 사람들끼리 싸움이나 하다니.
“원래 태자부에 먼저 드나드셨던 분은 셋째 마님이니, 태자비 마마께서는 이번에도 분명 셋째 마님을 초대하셨던 거겠죠!”
주묘서가 그곳에서 쫓겨난 이유는 이것밖에 없었다. 비 이낭은 자신이 마치 공명정대한 부윤이라도 된 양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큰아가씨께서 먼저 초대장을 숨기고 셋째 마님을 토사구팽했으니, 큰아가씨께서 잘못하신 겁니다. 아가씨께서 셋째 마님을 대신해 태자부에 가셨다지만 태자비 마마께서는 자신이 원한 사람이 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아가씨를 쫓아내신 거죠.
그랬는데 큰아가씨는 집에 돌아오셔서 울고불고 소란을 피우며 목을 매겠다고 하시고, 심지어 셋째 부인이 아가씨를 괴롭히셨다고 탓하시다니. 쯧쯧, 이건 너무 몰염치한 거 아닙니까!”
바깥 하인들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으나 주인마님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감히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그 입 닥치거라! 썩 꺼지지 못할까!”
진씨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비 이낭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계수나무 꽃 문양이 들어간 손수건을 흔들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씨가 고개를 홱 돌리자 남의 일에 덥적거리길 좋아하는 하인들이 밖에 몰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여기에 모여 뭐 하는 것이냐?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은 게냐?”
하인들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돈 한 푼 안 내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즐겼으니 손해 본 것은 없다 싶었다.
방 안에는 진씨와 강심설, 백 이낭, 주묘화 그리고 녹지와 춘산 두 여종만 남아 있었다. 주묘서는 여전히 바닥에 앉은 채였으나 이젠 훌쩍거리만 할 뿐, 감히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넌 대체 머리가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진씨는 마음 같아서는 딸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은 쥐구멍이라도 찾으려고 안달일 텐데, 너는 무슨 낯짝으로 도리어 소란을 피워 대냔 말이다!”
일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먼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사람은 당연히 주묘서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주묘서가 소동을 피우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이 일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엽연채에게 보복하고 싶었다면 자신에게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병이 났다면서 효를 다하라고 엽연채를 사당으로 보내 무릎을 꿇고 경문을 필사하게 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고 자신은 시어머니이니 얼마든지 엽연채를 괴롭힐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난리가 벌어졌고 엽연채는 억울한 입장이 되어 버렸으니 체면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주묘서는 입술을 꽉 물고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변명했다.
“설령… 제가 소란을 피우지 않았더라도 새언니가 태자부에 가면 다 알게 됐을 거예요…….”
“알면 아는 거지. 네가 소란만 피우지 않았다면 걔가 알게 된다 한들 너에게 뭘 할 수 있었겠느냐?”
진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이에 주묘서는 더욱더 억울한 마음이 들어 다시 훌쩍거리기만 했다.
진씨는 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딸이 정말로 목을 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강심설은 조롱 가득한 눈빛을 보이더니 진씨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백 이낭도 주묘화를 끌고 돌아서서 나갔다. 춘산만이 구석에 남아서 주묘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주묘서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억울한 마음뿐이었다. 소란을 일으켰던 건 모두가 자신의 억울한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며, 자신을 도와 엽연채에게 벌을 내려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주묘서가 그러고 있는 사이 엽연채는 궁명헌 대문을 들어섰다. 그 곁을 따르던 추길은 속이 후련해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쯧쯧 혀를 차더니 웃으며 이리 말했다.
“큰아가씨가 자기 잇속을 챙기더니 이렇게 뻔뻔하게 소란까지 피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다행히도 큰아가씨가 소란을 피웠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골치 아파졌을 거야.”
혜연의 대꾸에 추길이 기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난 이제부터 큰아가씨가 우리 아가씨의 자리를 차지하겠구나, 아가씨를 대신해 태자부에 드나들어 아가씨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겠구나 생각했거든. 그런데 태자비 마마께서 우리 아가씨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
엽연채는 헛웃음만 지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태자비가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니 말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 나한상에 앉았다.
주묘서 일로 체면이 깎인 진씨는 한동안 몸이 아픈 척하며 방에서만 머물렀다. 문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엽연채를 불러 그녀를 괴롭힐 수도 없었다. 이런 때에 그랬다가는 사람들이 그녀가 창피한 일을 저질러 놓고 애먼 피해자만 괴롭힌다는 소리를 할 게 분명했다.
* * *
태자부의 정화원에는 요리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태자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음식을 한 입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탑상 위에 기대어 있었는데 얇디얇은 비단으로 만든 둥글부채를 손에 쥔 채였다.
태자비는 밥상 위에 차려진 요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와 태자가 함께 먹었을 요리였다.
“마마, 다시 초대장을 보내 내일 주 부인을 부르는 건 어떨까요?”
금슬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이 팔월 며칠이냐?”
태자비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팔월 초이렛날이옵니다.”
금슬이 대답하자 태자비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곧 중추절이구나. 어마마마를 도와 중추절 연회를 준비해야 하고 팔월 열이렛날은 백여언이 태자부로 들어오는 날이니 당분간 좀 쉬었다 해야겠구나!”
그러자 석씨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 요망한 계집이 태자부에 들어오고 나서도 좀 시간을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태자비는 픽 냉소를 지었다.
비록 그 용모가 엽연채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백여언 또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거기에 신혼이기까지 하니, 그녀가 태자부로 들어오면 태자는 자연히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그녀의 손을 놓고 다른 미인에게 눈길을 주려 하겠는가?
엽연채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 하더라도 어쨌든 손댈 수 없는 그림 속 여인인 데 반해, 백여언은 입 안에 들어온 맛있는 요리였다. 이 싱싱한 요리를 뱉어 내고 싶은 마음이 어찌 들겠는가.
그러니 태자의 엽연채에 대한 흥미는 자연히 예전만 못할 것이었다. 백여언을 버리고 그녀와 잠자리를 하려고 하지는 더더욱 않을 터였다.
태자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년을 기다려 왔으니 몇 달쯤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석씨가 눈치껏 달랬으나, 태자비는 자신의 계획을 망친 주묘서를 생각하니 이가 갈릴 정도로 노여움이 북받쳤다.
* * *
오늘은 팔월 초열흘날이니 닷새 후면 중추절이었다.
엽균은 곤장을 서른 대나 맞았지만 곤장이 그렇게 무겁지 않았고, 그 또한 체격이 건장했으니, 한 달이 지나자 몸이 거의 회복되었다.
그동안 하루 종일 작은 뜰에 머무르며 자리보전한 터라 좀이 쑤셨던 엽균은 오늘 아침 추풍을 데리고 외출했다. 그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객락재였다. 그는 그곳에서 월병 두 봉지와 한매수정고를 샀다.
그러고 나니 때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마침 자주 가는 요릿집을 지나치던 그는 술과 요리를 보더니 군침이 돌아 식사와 반주를 하려고 그곳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입구에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추경과 추랑이었다.
엽균은 두 사람을 보자 표정을 확 굳히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그들을 못 본 척하고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마셨다. 그런데 추경이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균이가 아니더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여기서 너와 마주치게 되다니. 점심을 먹고 있는 게냐?”
엽균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추씨 가문 사내들은 모두 말이 안 통하면 바로 손을 올리는 거칠고 경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또 심보가 고약하고 매몰찬 사람들이라 밖에서 만나면 아마 저를 쫓아와 두들겨 팰 거라고 생각했다.
추경이 지금처럼 먼저 다가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갖춰 인사하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엽균도 차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을 수는 없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예.”
“균아, 상처는 이제 괜찮은 게냐?”
추경이 염려를 내비치며 따뜻한 얼굴로 물었다. 엽균은 내심 의심이 더욱 짙어졌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모부님께서는 감옥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시느냐? 넌 이모부님을 찾아가 뵈었느냐?”
추경이 탄식하며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엽균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관심을 갖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전 형님이 우리가 전부 죽기를 바라시는 줄 알았거든요.”
추경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반박했다.
“그게 무슨 허튼소리냐? 내가 왜 네가 죽기를 바라겠느냐? 부모님께 효도하는 건 만고불변의 이치가 아니더냐?”
“맞습니다!”
엽균은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드디어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어머니의 친정인 온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형님, 사양 말고 앉으세요! 오늘 제가 사겠습니다.”
추경과 추랑은 이에 응하며 자리에 앉았다. 추랑이 술을 따르며 해죽해죽 웃는 낯으로 권했다.
“균아, 쭉 들이켜!”
추랑은 엽균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였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