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시녀들은 주묘서를 꽉 누른 채 질질 끌고 갔다. 주묘서는 부끄럽고 분해 견딜 수가 없었고 이 자리에서 콱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녹지와 춘산은 주묘서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자리에서 당장 사라지고픈 둘은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흑흑… 아가씨…….”
주묘서는 수화문까지 끌려와 시녀들에게 내팽개쳐졌다. 금슬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그녀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주 대소저는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아시나 본데, 대체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희 태자부의 상전이라도 된 줄 아십니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시게요?
저희 태자비 마마께서 아끼시는 분은 주 부인입니다. 주 소저는 이곳에 겨우 두 번 오셨다고 본인을 중요한 손님으로 생각하시나 봐요? 소저는 원래 주 부인 덕에 이곳에 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주 부인을 떼 놓고 혼자 오시다니요? 이건 너무 몰염치한 짓 아닙니까?”
그 말에 주묘서의 귀엽고 아리따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입장이 매우 곤란해진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앞으로 태자부에 한 걸음도 들일 생각 하지 마세요. 태자부는 추접하고 구린내 나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금슬은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주묘서는 자신의 면전에 대고 퍼부어진 모욕적인 언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끊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때, 옆에 서 있던 시녀가 호통을 치며 그녀를 을렀다.
“아직도 거기 있는 겁니까! 우리가 마차에도 밀어 넣어야 해요?”
주묘서는 체면을 따질 겨를도 없이 황급히 마차에 올랐고 녹지와 춘산도 얼른 따라 올라탔다. 마부가 말채찍을 휘갈기자 마차는 쏜살같이 태자부 밖으로 나갔다.
주묘서는 돌아가는 내내 얼굴을 가린 채 눈물만 흘렸다. 이각쯤 지나자 마차는 정국백부 정문에 멈춰 섰다. 주묘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처소로 내달렸고 춘산은 울부짖다시피 소리를 높여 그녀를 연거푸 부르며 얼른 뒤를 쫓았다. 녹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일상원으로 달려갔다.
* * *
그 시각 일상원.
진씨는 나무로 만든 호랑이 조각상을 들고 손자와 놀아 주고 있었고, 강심설은 나무 방망이로 진씨의 다리를 두드려 주고 있었다. 강심설은 오후에 태자부에서 돌아온 주묘서가 또 우쭐거리며 잘난 척할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누군가의 작은 외침이 들렸다.
“녹지 언니.”
그 소리에 진씨와 강심설은 어리둥절해했다.
“방금 누구라고 했느냐? 녹지? 녹엽을 잘못 부른 거지?”
진씨가 의아해하며 묻는데 녹지가 발을 걷어 올리며 급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진씨와 강심설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다가 진씨가 먼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 돌아온 것이냐? 넌 묘서와 함께 태자부에 가지 않았느냐? 아, 가지 않았던 게냐?”
그리 말하는 진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는 말인가? 녹지는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데, 눈빛 역시 무척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갔었습니다……. 그런데…….”
녹지는 겨우겨우 그다음 말을 꺼냈다.
“아가씨께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돌아왔다는 게 무슨 말이냐?”
진씨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빠뜨린 물건이라도 있어 다시 돌아온 것이냐?”
“그게 아니라…….”
녹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가 태자부에 갔더니 태자비 마마께서 본인이 초대한 사람은 셋째 마님이지 큰아가씨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가씨는 셋째 마님 덕에 온 주제에 자신을 중요한 손님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혼내셨어요. 또 앞으로 태자부에 한 발짝도 들이지 말라고 하시며 큰아가씨를 쫓아내셨습니다!”
진씨는 녹지의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심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고소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큰일 났습니다!”
이때, 여종 하나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큰아가씨께서 목을 매려고 하십니다!”
“뭐라고 했느냐?”
깜짝 놀란 진씨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바람에 그녀의 발치에 있던 주학해는 그녀의 발에 걸려 하마터면 땅에 고꾸라질 뻔했으나 다행히도 강심설이 비틀거리는 그를 재빨리 안아 들었다.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서둘러 진씨를 쫓아갔다.
진씨가 헐레벌떡 주묘서의 처소로 뛰어가 보니 안에서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지 말거라! 죽게 내버려 둬! 살고 싶지 않다! 난 더 이상 얼굴을 들고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어……!”
“언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러지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
진씨가 비집고 들어와 보니 주묘서가 손에 흰색 천을 들고 절규하고 있었다. 춘산과 또 다른 여종이 주묘서를 붙잡아 말리고 있었고, 바로 옆 뜰에서 지내는 주묘화도 그 소리를 듣고 벌써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고 있었다.
진씨는 죽느니 사느니 하는 딸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또 화가 나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어머니… 전 살고 싶지 않아요……. 흑흑… 살면서 이런 모욕을 당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주묘서는 눈물을 쏟으며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때, 엽연채, 백 이낭, 비 이낭 그리고 주비양이 소란을 듣고 주묘서의 처소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뜰 밖에는 남의 일에 관심 많은 하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엽연채는 이 일에 끼고 싶지 않았지만, 주묘서가 이런 큰 소동을 벌였는데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면 그야말로 집안의 대역죄인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피할 수 없으니 구경이나 하자는 심산으로 걸어온 엽연채는 까먹고 있던 해바라기씨를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엽연채를 비롯한 식구들이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보니 주묘서는 손에 하얀 천을 든 채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큰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멀쩡히 잘 계시던 분이 갑자기 왜 목을 매겠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비 이낭은 그녀의 불행을 즐기는 표정이었다.
‘요 빌어먹을 계집애가 설마 사내에게 능욕을 당한 건가?’
주묘서는 비 이낭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태자비에게 미움을 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밖으로 끌려 나가 내쳐지기까지 했으니, 절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진씨도 그 질문에 아무 말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리석은 주묘서에게 한층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 좋은 일이라고 소란을 피운다는 말인가!
백 이낭은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오늘은 분명 주묘서가 태자부에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밖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고 거기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비 이낭은 주묘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찢어진 옷, 손과 무릎에 난 긁힌 상처를 보더니 더욱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는 주묘서를 비웃었으나 겉으로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휴……. 대체 어떤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우리 큰아가씨에게 이런 모욕을 줬다는 말입니까……. 절개가 곧은 우리 큰아가씨께서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시려는 거죠… 흑흑…….”
진씨는 그 말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딸의 정조를 더럽히려고 하다니! 진씨는 참지 못하고 비 이낭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이 천박한 것이 어디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게냐?”
비 이낭은 뺨을 맞고 비틀거리더니 원망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아니면… 왜 큰아가씨께서 목을 매 목숨을 끊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밖에 있던 하인들이 일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주묘서가 밖에서 외간 사내에게 능욕을 당해 자진하려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진씨는 또다시 눈앞이 새까매졌다. 이렇게 가다가는 살아도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로 되어 버리며, 그럼 산으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주묘서도 화가 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그녀는 이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외간 사내가 뭘 어쨌다는 게냐……! 난 외간 사내에게 능욕을 당한 적이 없다. 날 능욕한 사람은 작은 새언니야! 흑흑… 이렇게는 살 수 없어! 죽어 버릴 거야!”
“묘서야,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제수씨가 어떻게 너를 능욕했다는 소리냐?”
이 말을 꺼낸 이는 뜻밖에도 주비양이었다. 냉담한 얼굴에 무표정한 그가 이런 말을 꺼내니 더욱 냉정해 보였다.
강심설은 속이 뒤집어지고 마음이 아려 왔다.
‘늘 인정 없고 냉혹한 사람 아니었는가? 그런데 엽연채를 보호하겠다고 입을 열다니, 정말이지 요망한 여우가 따로 없구나!’
엽연채의 눈빛에서 순간 비웃는 기색이 비치더니 그녀는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 아침부터 지금까지 집 밖을 나간 적이 없고 큰아가씨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큰아가씨를 능욕해 목을 매달게 했다는 말입니까?”
이성을 잃은 주묘서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었다.
“새언니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새언니가 태자비 마마 앞에서 제 흉을 봤으니까 제가 쫓겨난 거 아니겠어요?”
그러자 엽연채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큰아가씨, 방금 하신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태자비 마마에게 쫓겨났다니요? 태자부에는 또 언제 갔다는 거예요? 어째서 전 모르고 있었지요?”
그 말에 주묘서와 진씨의 낯빛이 확 변했다.
“아… 오늘 제가 멀리서 큰아가씨께서 동쪽 측문에서 마차에 오르는 걸 보았는데 태자부에 가셨던 것이군요. 그런데 쫓겨나셨다는 건가요?”
추길이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에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깜짝 놀란 얼굴로 진씨를 쳐다봤다.
“어머님?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 태자비 마마께서 초대장을 보내실 때마다 어머님 쪽으로 먼저 전달되었고, 그럼 큰아가씨께서 저를 찾아와 언제 가는지 알려 주셨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어머님과 큰아가씨께서 저 몰래 초대장을 감췄다가 오늘 큰아가씨 혼자 태자부에 가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