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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85화 (185/858)

제185화

주묘서는 그의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더러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도리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가 버리다니!

주묘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콧방귀를 세게 뀌더니 돌아서서 측문으로 들어갔다.

진지항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자 그의 시동이 뒤를 쫓아오며 말했다.

“도련님, 주 대소저는…….”

“그날 축하연에서 보았을 때는 호감이 가는 아리따운 사람이었는데 실제로는 이렇구나. 그땐 내가 눈이 멀었나 보다.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진지항은 그리 대꾸하며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주묘서는 동쪽 측문으로 들어서며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저 진 공자라는 사람 대체 뭐니? 감히 나한테 불쾌한 표정을 보여?”

그러자 춘산이 얼른 좋게 달랬다.

“앞으로 아가씨께서 태자비 마마와 함께 돌아다니시다 보면, 아가씨께서 원하는 분께 얼마든지 시집가실 수 있을 거예요.”

주묘서는 그제야 마음이 풀렸다. 자신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진지항이었다. 그는 나이도 많고 외모도 평범했고 고작 낭중의 아들에 불과했다. 주묘서는 그가 자신의 신발 시중을 들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라고 욕했다.

그녀는 또 매력을 철철 쏟아내는 양왕과 늠름한 풍채를 뽐내는 태자를 떠올리고는 진지항은 그들 발치의 먼지만도 못하다며 그를 멸시했다. 이러면서 주묘서가 자기 처소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 * *

그 시각 궁명헌.

엽연채는 나한상에 기대어 화본을 보고 있었다. 추길은 암담한 얼굴로 엽연채의 발치에 죽치고 앉아 있었고, 혜연은 차를 들고 와 옆에 있는 찻상에 올려두었다.

“아가씨, 오늘 큰아가씨께서 장신구를 가지러 봉황루에 간 걸 보니 내일 태자부에 가는 게 분명해요.”

추길이 난간 위로 몸을 숙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고했다.

혜연은 꼼짝도 않는 엽연채를 보더니 그녀가 정말로 태자부에 갈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려 추길에게 일렀다.

“아가씨께서 가기 싫으시면 안 가시는 거야.”

“어떻게 안 가…….”

추길은 대번에 눈시울을 붉혔다.

“태자부에 자주 가면 나중에 부군에게 좋은 관직을 얻어 주실 수도 있을 거야. 우리 아가씨는 곧 이혼하실 테니 더더욱 그곳에 가야지. 나중에 태자비 마마께 좋은 남편감을 구해 달라고 부탁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엽연채는 서책을 그대로 든 채 냉랭한 목소리로 그녀를 면박했다.

“그렇게 가고 싶거든 큰아가씨와 함께 갔다 오너라!”

추길은 깜짝 놀라더니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가씨,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그곳에 가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아가씨를 보니 제가 다 억울해서 이러는 겁니다. 정말이지 기분이 너무 나쁘다고요!”

‘어떻게 큰아가씨가 이렇게 아가씨를 괄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바로 토사구팽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됐다. 화낼 거 없어.”

엽연채가 서책을 내려놓으며 다소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따뜻한 물은 준비되었니?”

“준비되었습니다.”

혜연이 대답하자 엽연채는 하품을 하더니 씻으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 *

이튿날 아침, 주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단정하게 꾸미고 일상원으로 가서 진씨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

진씨가 위아래로 훑어보니 딸은 흰색 상의에 붉은색 하의로 이루어진 대금식 유군을 입고, 머리는 원보계元寶髻로 틀어 올려 백옥 구슬 장신구를 두르고 있었다. 쪽머리에는 하얀 국화로 장식된 순금 보요步瑤를 꽂았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더없이 아리따운 자태였다.

진씨는 그녀의 화용월태를 보며 아주 흡족해했고 ‘우리 딸이 이제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자신의 여식이 빛을 발할 때가 됐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그녀였다.

주묘서는 진씨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

“어머니, 저 가 볼게요.”

“그래, 다녀오거라!”

진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배웅했다.

“녹지와 춘산이를 데려가렴.”

주묘서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돌아서서 문밖을 나섰다. 동쪽 측문에 도착한 그녀는 여종들을 데리고 마차에 올랐고 마차는 태자부를 향해 나아갔다.

몇 각刻 후, 태자부로 들어선 마차는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춘산과 녹지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등받이가 없는 조그만 의자를 땅 위에 내려놓자 주묘서가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주 대소저, 오셨습니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금슬이 그곳에 서서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묘서는 빙그레 웃는 그녀를 보더니 얼른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래, 금슬아.”

금슬이 마차 쪽을 쳐다보고는 엽연채가 내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 주 부인께서는 늦으시는 겁니까?”

그 말에 주묘서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정말 미안한데 우리 새언니가 어젯밤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오늘 오지 못하셨어. 그래서 이번에는 나 혼자 왔단다.”

그 말을 들은 금슬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큰일 났다는 얼굴로 주묘서를 쓱 쳐다봤다. 금슬은 주묘서의 능청스러운 표정을 읽어 내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금슬아, 왜 그러니? 태자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어서 가자!”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익숙한 듯 수화문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 태연자약한 언행에 금슬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태자비가 초대하려던 손님은 엽연채였다. 지금 자신은 돌아가 주인에게 엽연채가 오지 않았다고 알려야 하게 생겼는데, 정작 주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심지어 요 며칠 동안 태자가 모처럼 태자비에게 잘해 주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정화원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비록 태자비가 고대하던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가 태자비의 처소에서 자고 갔다. 이로써 태자비에게 암시를 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 방문한 사람이 엽연채가 아니라 주묘서일 줄이야! 금슬은 열불이 끓어올라 미칠 지경이었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일단 태자비에게 데려가 어찌할지 결정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주묘서 일행은 정화원으로 향했다. 주묘서가 설레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니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태자와 태자비의 모습이 보였다.

주묘서가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미인과 가까워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태자는 밖을 두리번거리더니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날카로운 눈썹을 치켜올렸다. 태자비도 엽연채가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 부인은? 어째서 기다렸다가 함께 오지 않은 것이지?”

주묘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마, 저희 새언니가 어젯밤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오늘 오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새언니가 저에게 마마와 전하를 잘 뫼시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태자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태자비는 그의 기분이 언짢아졌음을 즉시 눈치챘다. 이에 본래도 엄숙한 그녀의 표정이 더욱 엄숙해졌다.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아프다는 겐가?”

주묘서는 태자비의 매서운 목소리에 움찔 놀랐고 태자비가 까닭 없이 병이 난 엽연채에게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꿎은 자신이 태자비의 화풀이 대상이 되자 엽연채에게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주묘서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 말에 태자는 코웃음을 쳤다. 미인들끼리 자신을 차지하려고 질투하고 다투는 건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이 엽연채여야 했다. 주묘서가 아니라 엽연채가 다른 여인을 따돌렸다면 그는 시기하는 여인이 예쁘고 귀여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 반대가 분명했다. 태자는 주묘서의 이런 행동이 추접하고 파렴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집에서 홀로 슬퍼하며 울고 있을 엽연채의 가녀린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는 마음이 아파 왔다.

태자는 지저분한 수를 쓴 주묘서를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엽연채를 위해 주묘서를 난처하게 하고자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난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가 봐야겠소.”

태자는 찻잔을 탁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전하…….”

주묘서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아무리 둔한 사람이더라도 태자가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의 수려한 얼굴은 분노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가 쌩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자신의 옆을 지나치자 주묘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주 소저!”

태자비는 태자가 자리를 뜨자 화가 치밀어 올라 즉시 주묘서에게 따지고 들었다.

“주 부인은 왜 오지 못했는가?”

주묘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궁색한 말을 늘어놨다.

“아파서… 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왔으니 새언니가 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그게 같단 말이야!”

태자비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주묘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를 비웃었다.

“내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소저가 아니라 주 부인이었네!”

그 말에 주묘서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지난번에 주 부인이 하도 간곡히 부탁하기에 내가 소저를 데려와도 좋다고 했네. 오늘은 주 부인이 오지 않았으니 소저도 올 필요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 소저는 오지 않아도 되네!”

태자비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를 내쫓았다.

“주 소저를 배웅해 드려라.”

“마마…….”

주묘서는 머릿속에서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멍하니 서 있는데, 금슬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주 대소저, 소인과 함께 나가시죠!”

“전…….”

주묘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어서 안 가시고 뭐 하세요!”

금슬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제 발로 가지 않으려는 모양이니 끌고 나가거라!”

태자비는 폭발하기 직전이라 주묘서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 넷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주묘서의 팔과 등을 짓누르며 그녀를 끌고 나갔다.

“꺅!”

주묘서는 깜짝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마마, 제 발로 나가겠습니다! 그러니 끌고 나가라는 명은 거두어 주십시오……. 제발 그 명은 거두어 주십시오……!”

나가라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체면이 깎였는데, 이렇게 끌려 나가게 되면 앞으로 얼굴을 어찌 들겠는가. 그러나 태자비의 일언은 중천금이었다. 이미 뱉은 말을 어찌 도로 거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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