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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84화 (184/858)

제184화

그 시각 일상원.

방금 막 저녁 식사를 마친 주묘서는 수돈에 앉아 진씨 곁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주묘서의 손에는 흐릿한 봉황 문양의 금박이 붙은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하좌에 앉아 있던 백 이낭이 그녀가 쥔 초대장을 흘끗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큰아가씨, 정말 혼자 가실 생각이세요?”

“왜요, 혼자 가면 안 돼요?”

주묘서가 콧방귀를 뀌자 백 이낭은 말문이 막혔다. 어찌 됐든 엽연채 덕분에 이런 기회가 생긴 것이고, 주묘서는 그녀를 따라 두 번 방문했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당사자인 엽연채를 떼어 놓고 가겠다고 하니, 이건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앞으로 나 혼자 다닐 거예요.”

주묘서는 또다시 ‘흥’ 소리를 내며 백 이낭을 쏘아봤다.

“백 이낭이 몰라서 그렇지 새언니가 얼마나 너무한데요. 기회는 자기가 다 가져가 버려요. 태자부에 가서 함께 꽃을 닦고 있는데 밖에서 꽃을 말릴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가게끔 했다고요. 그런데 그날 양왕 전하께서도 오셨단 말이에요.

지난번 태자비 마마께서 차를 끓이라고 하셨을 때도 분명 친정집 일로 엄청 피곤했을 텐데 나한테 양보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태자… 비 마마께 가까이 다가갈 기회도 전부 새언니가 가져가 버렸다고요! 쳇!”

그 말에 백 이낭은 입을 씰룩거렸다. 본래 엽연채가 얻어 낸 기회 아닌가. 따라가게 해 준 것만으로 이미 주묘서의 체면은 세워 준 셈이었다. 엽연채가 무슨 이유로 좋은 기회를 남에게 다 넘긴다는 말인가?

“새언니는 그만큼 간사한 사람이라고요. 내일도 같이 가면 분명 또 고생만 실컷 하고 별 의미도 없는 일을 나한테 떠넘길 거예요.”

진씨 역시 주묘서 편을 들고 나섰다.

“엽씨는 이미 혼인한 여인이지 않더냐. 그런데 가기는 뭘 간다는 말이냐? 가려면 혼인 전인 우리 묘서가 가야 맞지. 귀인의 눈에 들면 좋은 혼처도 구할 수 있고 말이다.”

백 이낭은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자신이 혼처를 구해야 하니 상대방은 무조건 다 양보해야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주묘서가 정말로 귀인을 물게 되면 주묘화의 혼처도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그럼 진씨 가문에서 주묘화를 원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제 온씨는 이쪽의 부탁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으나 그녀의 표정은 주묘화는 진 공자에게 어울리는 짝이 전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주묘서가 엽연채의 기회를 빼앗는 것을 보자 백 이낭은 속이 좀 후련해졌다.

한편, 함께 앉아 있던 강심설은 속으로 혀를 차더니 냉담한 눈빛으로 주묘서를 쓱 쳐다보며 이렇게 평했다.

‘정말이지 낯짝이 소가죽보다 더 두껍구나.’

“참, 지금이 몇 시진이지?”

주묘서가 갑자기 시간을 묻자 밖에 있던 녹지가 답했다.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일각입니다.”

주묘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로 맞춘 장신구가 완성되었을 거예요. 가서 찾아와야겠어요.”

진씨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에게 핀잔을 줬다.

“서두를 게 뭐 있느냐? 춘산이를 보내면 되지.”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더 좋아요.”

주묘서는 ‘흠’ 소리를 내더니 돌아서서 진씨에게 이리 말했다.

“어머니, 기다려 보세요. 제가 태자비 마마의 총애를 받게 되면 좋은 남편에게 시집가고 오라버니에게도 큰 벼슬을 내리게 할 거니까요.”

말을 마친 주묘서는 기뻐하며 깡충깡충 뛰어나갔다.

“쟤도 참.”

진씨는 말과는 달리 마음이 기쁘고도 따뜻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첫째에게 마땅한 일을 찾아줘야 하는데.”

강심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조롱이 은근히 어린 웃음을 내비치며 빈정댔다.

“찾아 주셔도 소용없을 거예요. 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요.”

진씨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언짢아 어두워진 표정으로 질책했다.

“자기 남편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전에 찾아 줬던 일을 하지 않은 건 제대로 된 일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 넌 아내가 되어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비아냥대는 게냐.”

주씨 가문이 몰락한 뒤, 가문에서는 주비양을 위해 일자리를 구해 줬었다. 그동안 쌓아 왔던 인맥을 활용해 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에 넣어 줬지만, 그는 며칠 만에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후에 그를 궁문宮門을 지키는 금위군禁衛軍으로도 꽂아 줬지만 또 며칠 하더니 그만두고서는 지금까지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전에 찾아 줬던 일은 사실 나도 부끄러웠다. 그러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이제 묘서에게 능력이 생겼으니 첫째에게 큰 벼슬을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넌 네가 무능하다고 다른 사람이 유능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게냐? 가난한 집안 출신답게 참 옹졸하구나.”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빈정거리자 강심설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주학해는 진씨가 자신의 어머니를 나무라는 줄 눈치채더니 강심설에게 달려가 그녀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학해야, 오늘 일찍 일어나더니 벌써 졸린 거니?”

강심설은 아이를 안아 올리더니 입을 오므리고 진씨에게 말했다.

“어머님, 학해를 데리고 가서 재워야겠습니다.”

강심설은 주학해를 안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속으로 분개했다.

‘높은 벼슬아치는 무슨. 그리고 그렇게 되면 밖에서 여우 같은 여인이나 꼬시겠지. 나보고 그리되게 내버려 두라는 말이야?’

그녀는 본래 출신이 미천해 전에 주비양과 정혼했다는 그 군주에 비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 탓에 늘 시어머니에게 비교를 당하며 미움을 받았으니, 그녀는 주비양도 지금 상황에서 나아지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자신이 더욱 그에게 어울리는 짝이 될 테니 말이다.

* * *

태자부에 가야 하니 진씨는 주묘서에게 장신구 한 벌을 새롭게 맞추라고 했다. 그래서 주묘서가 고른 장신구 상점은 역사와 전통이 깊은 봉황루鳳凰樓였다. 역시 도성 북쪽에 자리한지라 주씨 가문 저택에서 일각만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 없이 집에서 나온 주묘서는 춘산을 데리고 봉황루로 향해 장신구를 확인하고 차 보더니 만족스러워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동쪽 측문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누, 누구세요? 왜 저희 앞을 가로막는 겁니까?”

춘산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주묘서 앞을 막아섰다. 주묘서가 고개를 들어 보니 스물셋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서생들이 입는 옅은 회색 도포를 입은 그는 수려한 외모라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영민해 보였다. 그 사내가 입을 열었다.

“묘서 소저.”

“그쪽은…….”

주묘서가 미간을 찡그리자 사내는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묘서 소저, 벌써 절 잊으신 겁니까? 유월 말에 정안후부 노부인의 생신 축하연에서 저희 만났었잖아요. 그때 저와 한편이 되어 탄기弹棋(흑백으로 갈라 상대의 바둑알을 쳐서 떨어뜨리는 놀이)에서 이기기도 하셨고요.”

어리둥절해하던 주묘서는 그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확실히 정안후부에서 이 사람과 탄기를 했었다. 그러나 사내의 생김새가 평범해 금세 잊어버렸다.

주묘서는 그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그러자 그 사내는 정중하게 공수하더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전 진지항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저희 어머니께서 사람을 보내… 혼담 이야기를 꺼내셨죠.”

그저께 온씨가 혼담 이야기를 전하러 정국백부에 들렸고, 이에 엽연채는 온씨에게 자기 처소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별장에 가야 하는 일정인지라 온씨는 그날 오후에 급히 진씨 가문으로 가 진씨의 말을 전했다. 그때 진지항은 뒤쪽 장지문 뒤에 서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똑똑히 들었다.

“오늘 주씨 가문에 다녀왔는데 부인께서 좀 두고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을 두고 생각을 좀 해 보겠다고 하셨어요.”

온씨는 마지막 말을 꺼내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쨌든 자기 여식의 시댁 식구인데 그쪽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니 그녀로서는 면목이 없을 따름이었다.

진 부인은 온씨의 이야기를 듣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한마디로 그쪽에서 자신의 아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딱 잘라 거절하지는 않았으니, 자기 여식은 귀하디귀한 여인이고 자신의 아들은 그 소저를 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내처럼 만들어 버린 셈이었다.

그래도 진 부인은 웃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부인께 수고를 끼쳐 드렸군요.”

온씨가 떠난 후, 진 부인이 장지문에 대고 말했다.

“보거라. 이 어미가 네 혼사에 도움을 안 주는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다.”

그러나 진지항은 자신을 단념시키기 위해 어머니와 온씨가 짜고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직접 이곳에 온 것이었다. 온씨가 정말로 정국백부를 방문해 혼담을 꺼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 말이다.

주묘서도 물론 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사모하는 이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한껏 우쭐거렸다. 그러나 그저 말끔하게 생긴 외모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진지항의 얼굴을 보더니 외모든 집안이든 태자나 양왕과 비교해 보면 그들의 발끝에 묻은 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은 태자부를 드나드는 사람이었다.

주묘서는 거만함이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 하더니 어깨 위로 늘어진 가랑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대꾸했다.

“맞아요. 그저께 새언니의 모친께서 저희 집으로 오셔서 혼담 이야기를 꺼내셨어요.”

진지항은 순간 멍해졌으나 심드렁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소저… 중매를 서 주신 부인께서 주 부인께서는 생각이 없다고 하셨다던데 정말 그런 겁니까?”

주묘서는 그가 이렇게 빨리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진 않았다. 어찌 됐든 간에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내가 하나도 없으면 자신이 볼품없어 보이지 않겠는가.

“생각이 없으신 건 아닌데 그래도 신중하게 따져 보셔야겠죠.”

진지항은 그녀가 자신을 어장 속 물고기로 삼으려 한다는 걸 깨닫고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태자비 마마의 초대장을 또 받아서 내일 태자부에 가서 마마께… 차를 끓여 드릴 거예요. 그곳에 자주 드나들거든요…….”

주묘서는 방금 한 말을 어떻게 수습할지, 또 어떻게 이어서 말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뜬금없이 과시하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진지항은 구역질이 나올 듯이 속이 메스꺼워 눈을 가렸다. 그는 다시금 공수하며 이렇게 대꾸했다.

“귀하신 묘서 소저께서는 바쁘신 듯하니 진씨 나부랭이가 소저의 길을 막고 있으면 안 되겠네요.”

그러고는 홱 뒤돌아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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