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83화 (183/858)

제183화

도성 밖에서는 아름다운 봄 경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래펄에 날아와 앉은 기러기만 보일 뿐이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늘은 높고 바람은 잔잔하게 불었다.

추경이 말을 몰고 엽연채가 타고 있는 마차 곁으로 가 보니 그녀는 온사월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맑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추경도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엽연채의 별장은 도성에서 2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우가촌牛家村에 위치했다. 마차로 한 시진 정도 달리고 나서야 일행은 마침내 그녀의 별장에 도착했다.

엽연채의 별장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평범한 사진원四進院이었다. 마차가 수화문으로 들어가 멈춰 서자 엽연채 일행은 하나둘씩 마차와 말에서 내렸고, 여종들은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모. 이쪽으로 오세요.”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온씨 자매를 불렀다.

일행이 수화문 너머로 들어가자 잉어가 용문龍門을 뛰어오르는 문양이 새겨진 가림벽이 보였고 이 가림벽을 돌아가니 널찍한 뜰이 나왔다. 다섯 칸짜리 커다란 본채에 동서에 세 칸짜리 곁채가 하나씩 있었고, 도좌방倒座房(사합원에서 본채와 마주 보는 남향 방)과 후조방도 갖춰져 있었다.

동쪽 뜰에는 밑은 둥글고 위로 올라갈수록 뾰족해지는 형태의 지붕이 달린 정자 두 개가 지어져 있었는데, 이 정자들은 회랑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앞쪽에는 양어장이 있고 주변에는 화초가 가득했다. 별장 주변에는 싱싱한 대나무가 가득했고 백여 묘亩(너비 단위, 현대 기준으로 1묘는 약 600평)의 논밭도 있었다.

이 별장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전부 엽연채가 시집가기 전에 지내던 규방, 즉 해당거에서 지낼 때 부리던 사람들이었다. 주씨 가문으로 모두 데려갈 수 없어 일단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한 상태였다. 이곳에 오기 하루 전, 엽연채가 온씨와 온사월 등이 이곳에 와서 지낼 거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기에 여종들은 일찌감치 청소를 해 두었다.

어멈 한 명이 엽연채 일행을 보더니 얼른 나와 맞이하며 그들을 데리고 뜰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매년 얼마 정도의 수익이 나느냐?”

온사월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주변 환경이 꽤 좋아 작황이 괜찮을 땐 은화 오륙백 냥 정도가 나와요.”

온씨가 대답했다.

별장은 알을 낳는 암탉처럼 생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엽학문은 엽연채에게 혼수품으로 부동산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 별장을 주었다.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보내니 체면이 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을 주기는 아까워 조그맣고 수입도 별로 나지 않는 이 별장으로 골랐던 것이다.

“밖에는 전부 대나무예요. 저걸 파내고 다른 걸 심어서 팔아야 돈이 될 거예요. 그런데 돈이 되는 건 보통 가꾸기가 까다로워 그냥 이렇게 두고 있는 거죠.”

“대나무가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올해 죽순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요.”

온씨가 말을 덧붙이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그게 돈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그러니?”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순 같은 건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값어치가 나간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일행은 이야기를 나누며 본채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돈이 얼마 안 되어도 괜찮아요. 제가 대나무를 좋아하잖아요. 특히 이곳 죽순은 더 좋아하고요.”

“얘가 죽순을 그렇게 좋아해요.”

엽연채의 고집에 온씨는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죽순을 좋아해서 이리 별장 곳곳에 대나무를 심었다는 말인가?’

추경은 사촌 여동생의 행동이 기가 차면서도 웃겼다.

“참, 오라버니. 들어 보니 대나무로도 술을 담글 수 있다면서요!”

엽연채가 별안간 술 이야기를 꺼냈다.

“맞아. 죽통주竹筒酒, 죽양주竹釀酒, 죽엽주竹葉酒 등등 이것저것 만들 수 있단다. 다만 이런 술은 워낙에 흔해서 우리 가문에서는 만들지 않아.”

추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송무주도 개량해야 하니 말이다. 송무주는 우리 추씨 가문을 대표하는 술이니 다른 술은 판매할 겨를도 없구나.”

엽연채는 ‘아’ 소리를 내더니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추경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마침 이곳에 대나무가 많으니 좀 꺾어다가 술을 따라 마시면 풍경과 딱 어울리겠구나.”

추경은 그리 말하며 밖으로 나갔고, 엽연채는 그를 기다리며 온사월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추경과 추환이 대나무가 담긴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엽연채가 대나무 뚜껑을 살짝 열자 은은한 술 냄새와 대나무 향이 풍겨 왔다. 한 모금 맛보니 산뜻하고 달콤했다. 그윽하고 싱그러운 대나무의 향이 느껴지니 참으로 여운이 남는 별미였다.

* * *

엽연채는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집으로 돌아갔다. 어찌 됐든 한 사내에게 시집을 간 몸이었다. 요즘 밖을 자주 돌아다녔는데 별장에서 친정 식구들과 또 하루를 머물렀으니 아무래도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다.

온사월과 온씨, 추환, 추곡은 별장에 머물렀고 추경과 추랑이 엽연채를 배웅해 주었다.

정오가 다 되어 갈 즈음 엽연채는 정국백부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궁명헌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내던져 버리고 나한상에 몸을 던졌다. 한참 동안 마차에 앉아 있었기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어? 녹엽아,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이때 밖에서 추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엽연채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창문을 열어 보니 녹엽이 고개를 내빼고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떳떳하지 못한 짓을 꾸미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뜰로 들어온 녹엽은 그제야 쏜살같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엽연채가 그녀를 쳐다보며 농담투로 물었다.

“녹엽아, 무슨 일이니? 뒤에서 강도라도 쫓아오든?”

엽연채가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으니 장난을 치는 게 분명한데도 녹엽은 그저 쓴웃음만 지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고했다.

“셋째 마님, 알려 드릴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몰래 전해 드린 거라고 어디에 말씀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천천히 정자세로 앉았다. 추길과 혜연도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추길은 녹엽의 심각한 표정을 보더니 얼른 그녀에게 물었다.

“녹엽아, 무슨 일이야?”

“그게 말이지…….”

녹엽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태자부에서 초대장을 또 보냈는데, 셋째 마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엽연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그저께 사돈 마님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태자부에서 초대장을 보내왔고, 마님께서 그 초대장을 받으셨어요. 저도 처음에는 별생각 안 했어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큰아가씨께서 곧 초대장을 들고 셋째 마님을 찾아갈 거라고 생각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죠.

그런데 어제저녁에 제가 일상원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데 큰아가씨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들어 보니 이번에는 셋째 마님과 함께 가지 않고 혼자 가겠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녹엽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도 그분들이 태자부 방문을 이야기하신 건지는 잘 모르지만, 그 일 말고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셋째 마님께 일단 알려 드리는 겁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그냥 제가 쓸데없이 입을 놀렸다고 생각하면 되시지만, 사실이라면 셋째 마님께서 어서 가서 큰아가씨에게 물어보셔야 해요. 안 그러면 정말로 셋째 마님을 떼어 놓고 가실지도 모릅니다.”

엽연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녹엽아, 알려 줘서 고맙다.”

“별것 아닙니다.”

녹엽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당연히 셋째 마님께 알려 드려야죠. 다만… 제가 알려 드렸다는 건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

엽연채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녹엽을 안심시켰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녹엽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이고… 녹엽아…….”

추길이 침실에 가서 돈을 꺼내 왔으나 녹엽은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주지 말거라.”

엽연채는 몸을 돌리더니 옅은 미소와 함께 추길을 말렸다.

“지금 돈을 주게 되면 오히려 녹엽이를 모욕하는 거야. 저 아이는 호의를 보인 건데 우리가 어떻게 그걸 돈으로 살 수 있겠어?”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앞으로 녹엽이를 많이 도와주면 됩니다. 돈 같은 건 나중에 기회를 봐서 주면 될 거예요.”

추길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낯빛이 확 변하더니 분통을 터트렸다.

“태자부에서 보낸 초대장이 도착했는데도 큰아가씨께서는 몰래 숨겨 놓고 혼자 가시려고 한 거네요! 누구 덕에 생긴 기회인지는 생각도 안 하고 말이죠! 참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에요. 다행히도 녹엽이가 와서 알려 줬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로 큰아가씨 뜻대로 될 뻔했어요.

아가씨, 가시죠. 어서 가 보셔야 돼요. 오늘이 가는 날일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안 가면 못 갈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가는 날이면 이미 출발했을 거야. 그럼 지금 그쪽에 가 봤자 아무 소용이 없잖아. 게다가 방금 전에 녹엽이가 와서 알려 줬는데 우리가 지금 찾아가면 녹엽이가 의심을 받을지도 몰라.”

혜연이 추길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녹엽이가 이 이야기를 알려 주러 왔다는 건 아직 가지 않았다는 거야.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일상원으로 가자. 따질 필요도 없이 언제 태자부에 갈 건지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돼. 뻔뻔하게 초대장을 안 받았다고 잡아떼는지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안 받았다고 하면 우리도 사정 봐주지 말고 할 말 다 하고 이 관계를 끊어 버리면 그만이야.”

“그래, 맞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추길은 일단 우악스레 달려들고 보는 성격이라 혜연처럼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태자부와 관계된 일이니 그녀는 무의식중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나한상에 앉아 있던 엽연채는 하품을 하며 뜻밖의 말을 했다.

“큰아가씨가 뭘 하든 상관없다.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하렴. 난 졸음이 쏟아져서 잠도 쫓을 겸 책이나 좀 봐야겠다.”

“네?”

추길의 안색이 또다시 홱 변했다.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당장에 반박했다.

“아가씨, 무슨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세요? 어떻게 큰아가씨에게 전부 다 넘겨주시려는 거예요?”

그러나 엽연채는 ‘픽’ 냉소를 짓더니 이리 말할 뿐이었다.

“여하튼 내 말 듣거라.”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화본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추길이 불만스레 입술을 달싹이자 혜연이 그녀를 쏘아보며 핀잔했다.

“마님께서 하신 말씀 잊었어?”

추길은 그 말을 듣고 일순 멍해졌다. 온씨는 태자부 일에 열을 올리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들뜬 자신더러는 경솔하다고 나무랐다. 이에 추길은 아무 말도 더는 하지 못했지만,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