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온씨의 반박을 들으며 엽연채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자신은 저번 같은 괄시를 다시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노력해서 위로 올라가려는 것 아닌가. 다만 태자와 태자비가 하려는 짓이 너무 역겨워서 당분간은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씨의 말에 동의했다.
“마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그곳에 몇 번 가셨지만, 태자비 마마께서 어떤 성정을 가진 분인지도 아직 제대로 파악이 안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야께서 알게 되시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실 테고, 그럼 아가씨께서 곤욕을 치르시겠죠. 게다가 정말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더라도 그 힘과 인맥을 후야께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혜연이가 듬직하구나. 추길아, 너는 너무 경솔하다. 혜연이를 보고 많이 배우거라.”
그러자 추길은 억울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이틀 뒤에 별장에 가시는데 짐은 제대로 챙기셨어요?”
엽연채가 화제를 바꾸자 채 마마가 대신 답했다.
“어제저녁에 준비를 마쳤습니다. 주인마님께 말씀드렸더니 가서 마음껏 놀다가 오라고 하셨어요. 저흰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라 내일 바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어머니, 오늘 밤은 이곳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어머니랑 함께 자 본 지도 꽤 오래됐잖아요.”
엽연채가 온씨의 팔뚝을 친근하게 감싸 안자 온씨는 웃으며 농담조로 딸을 핀잔했다.
“다 큰 애가 들러붙기는. 한데 내일 별장에 가야 하니 먼저 진 부인께 말을 전해야 한다.”
“어? 그럼 여기서 못 주무시는 거예요?”
엽연채가 실망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묻자 온씨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자고 갈 거란다! 마침 진씨 가문 저택도 도성 북쪽에 있거든. 마차를 타면 이곳에서 일각밖에 걸리지 않으니 금방 돌아오마. 저녁에 여기서 함께 자자꾸나.”
엽연채는 기뻐하며 엽미채에게도 자고 가라고 권유했다.
“미채야, 너도 여기서 자고 가렴. 이따가 채 마마를 보내 내일 타고 갈 마차를 준비하게 하고 내일 아침에 어머니와 너를 데리러 오게 하면 되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마님.”
엽연채가 밖을 내다보니 백 이낭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서 와요, 백 이낭.”
백 이낭은 온씨와 엽미채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사돈 부인께서 셋째 마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데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요.”
“아녜요. 백 이낭, 앉아요.”
엽연채가 권하자 백 이낭은 하좌에 놓인 수돈에 앉았다. 혜연이 차를 내오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사돈 부인께서 저희 큰아가씨의 혼담을 꺼내셨죠. 사실 저희 묘화 아가씨도 혼담 이야기를 꺼내야 할 나이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그쪽으로는 수완이 없어서 사돈 부인께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요.”
온씨의 표정이 저절로 굳어졌다. 막 딸에게 더 이상 주묘서의 혼담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젠 또 주묘화란 말인가?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좋게 거절했다.
“백 이낭, 지금 나와 농을 치는 겐가. 난 중매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네. 정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관매官媒를 찾아가는 게 좋을 걸세. 그리고 오늘 이 혼담도 우연히 들어온 거라네.”
이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진씨의 무리한 요구가 없었다면 그녀는 중매를 서지 않았을 것이다.
백 이낭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사돈 부인께서도 오늘 혼담 이야기를 꺼내면서 눈치채셨겠지만 저희 마님께서는 이 혼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큰아가씨 쪽은 원치 않더라도 저희 묘화 아가씨는 원합니다.”
온씨의 표정이 재차 굳어졌다. 백 이낭이 지금 진씨 가문이 마음에 들어 여기 왔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진씨 가문은 원래도 주씨 가문이 눈에 차지 않았다. 진 공자가 주묘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면, 그가 모친에게 혼담을 넣어 달라고 조르며 귀찮게 굴지 않았다면 진 부인은 절대로 이 혼사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으로, 적장녀인 주묘서도 자기 아들에게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서녀를 고려하겠는가?
그리고 설령 서녀도 괜찮다면 엽미채를 시집보내는 게 낫지, 뭣 하러 주묘화 좋은 일을 시키겠는가. 집안과 외모, 엽미채가 두 가지 다 주묘화보다 나았다.
온씨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가서 한번 여쭤보겠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실 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백 이낭은 그 말을 듣고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일말의 기대는 남겨 두었다. 그녀는 온씨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민망해하며 돌아갔다.
점심밥을 먹은 뒤 엽연채는 진씨에게 추길을 보내 온씨와 엽미채가 이곳에서 하룻밤 묵을 거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진씨는 신경 쓰기 귀찮아 그리하라고 답할 뿐이었다.
온씨는 오후에 진씨 가문에 방문한 뒤 돌아와서 엽연채 자매와 함께 구럭을 뜨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씨는 기분이 아주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집보다 이곳을 더 안락하게 느끼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을 지었다. 진씨가 엽연채를 어여삐 여기지 않더라도 적어도 엽학문처럼 입만 열었다 하면 엽연채를 쫓아내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의 친손녀인데 어쩜 그리도 모질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밤이 깊자 엽연채는 엽미채를 서쪽 곁채로 보내 자게 했고, 온씨와는 한방에서 자기로 했다.
온씨가 목욕을 마치자 혜연이 침구를 가져와 잠자리를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혜연이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록 온씨는 점점 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침대 위에 베개와 이불이 하나밖에 없는 걸까? 사위와 딸이 애정이 깊어 부부가 한 이불을 덮어 그런 걸까?
불안해하며 화장대를 쳐다보니 그 위에는 전부 엽연채의 장신구뿐이었다. 옆의 탁자에도 사내의 장신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한 온씨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그제야 이곳에는 사내가 생활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바깥 날씨가 정말 쌀쌀하네요.”
이때 엽연채가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방금 막 씻고 나온 터라 그녀의 몸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연채야. 내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네 방에 어째서 사위의 물건은 하나도 없는 게냐?”
온씨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묻자 엽연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엽연채는 그저 허허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있어요. 어머니가 못 보신 것뿐이에요. 늦었으니 어서 주무세요!”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고선 하품을 하며 침상 위로 올라갔다.
“요 계집애가! 대충 속여 넘길 생각하지 말거라!”
온씨가 호통을 치며 재차 추궁했다. 전에 주씨 가문 하인에게서 딸아이 부부가 각방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엽연채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궁색한 핑계를 댔다.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한 침대에서 못 자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침실에 어떻게 사위의 물건이 하나도 없는 게냐.”
그러나 온씨는 쉬이 넘어가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으… 그게… 평소에 쓰는 물건은 옆 뜰로 옮겨 놨어요. 그리고 그 사람 향시를 보러 고향으로 갔잖아요. 요 두 달 동안 시험 준비에 매진하느라 침식을 잊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생활도 그쪽에서 했고요.”
엽연채는 입을 뽀로통하게 내밀더니 온씨의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어머니, 우리 어서 자요!”
온씨는 침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딸의 모습을 살폈다. 해당화 문양이 수놓인, 하얀빛을 띤 옅은 노란색 속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한 팔에 쏙 들어올 정도로 허리가 가늘고 잘록했다.
온씨는 아이를 가진 엽이채의 볼록한 배가 또다시 떠올라 마음이 한층 심란해졌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침상에 앉으며 엽연채에게 아까와는 다른 질문을 했다.
“혼인한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째서 소식이 없는 게냐?”
침상 안쪽으로 누운 엽연채는 이불을 꽉 붙잡고 말했다.
“급할 게 뭐 있어요……. 대부분 그렇게 빠르지는 않잖아요.”
엽연채는 이리 말하면서 후회가 밀려왔다. 앞으로는 또 어떤 구실을 대야 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온씨는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딸과 주운환이 잠자리를 적게 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딸의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조만간 딸더러 의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으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녀는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와 온씨가 단장을 마치고 서쪽 측문으로 나가니 골목에 화려한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한 대에는 짐을 싣고 다른 한 대에는 사람이 탔다.
모녀가 마차에 오른 후,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 참, 깜빡하고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구나. 이번에 이 어미와 함께 별장에 가는 사람 중에 네 큰이모 가족도 있단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어머니에게 묻는 걸 깜빡했던 것뿐이에요.”
온씨 자매는 십 년이나 보지 못했으니 고작 며칠 함께한 게 충분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온씨가 별장에 가게 되었고 마침 그곳이 엽연채의 별장이니 온사월을 불러 함께 가려는 것이었다.
“장명가는 성문과 바로 연결되어 있잖아요. 곧장 큰이모 댁으로 가면 어차피 가는 길이니 별장에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지지 않을 거예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차는 골목을 빠져나와 곧장 장명가 쪽으로 달렸고 몇 각刻 정도 후에 추씨 가문 동쪽 측문에 도착했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온사월은 서둘러 마차에 오르고 있고 형제들은 그 옆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온씨는 마차 창문에 달린 발을 걷어 올린 다음 온사월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큰언니, 우리가 딱 맞춰 왔네.”
“이모, 오셨어요.”
추씨 가문 형제들이 얼른 미소 띤 얼굴로 온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온씨는 잘생긴 외모에 행동도 시원시원하고 철까지 든 조카들을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엽균이 떠올랐다. 그러자 마음이 좀 쓸쓸해졌다.
추경이 내다보니 마차의 창문 너머로 엽연채의 얼굴 반쪽이 보였다. 형제들이 온씨에게 인사를 건네자 엽연채는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본 추경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두둥실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사우와 함께 타고 가마.”
온사월은 웃는 낯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엽연채네 마차로 다가왔다. 그녀는 추길과 혜연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마차 위로 올랐다. 추경과 추랑은 말을 타고 추환과 추곡은 마부 옆에 앉았다. 그들은 그렇게 행장을 싣고 출발했다. 커다란 마차 네 대가 흔들거리며 도성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