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81화 (181/858)

제181화

“아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오늘 이리 찾아뵌 건 기쁜 소식이 있어서입니다. 지난번 둘째 소저 성년식 때 안사돈께서 큰소저 혼처를 알아봐 달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좋은 혼처가 생겼습니다.”

진씨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 그 일 때문에 오셨던 거군요. 어느 가문인가요?”

“어제 오후에 진씨 가문 부인께서 저를 찾아오시더니 주 대소저가 마음에 드신다고 하셨어요.”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유월에 큰소저를 보셨더라고요. 저희 시어머님 생신 축하연 때 보셨던 거지요.”

“유월에 보셨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이제서야 이야기를 꺼내신 거래요?”

진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

“그때 진 대공자가 축하연에 참석했다가 주 대소저와 인사를 나눈 모양입니다. 진 부인께서도…….”

온씨는 사정을 설명했다. 실은 진 공자가 주묘서를 마음에 들어 해 진 부인에게 중매인을 통해 구혼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직접적으로 꺼내면 안 되기 때문에 온씨는 이렇게 돌려 말했다.

“진 부인께서도 대소저가 마음이 깨끗하고 고상해 보인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구혼하려고 했는데 팔월 향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선 진 공자가 과거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뒤에 혼사를 논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요즘 진 공자가 혼사가 신경이 쓰여 시험 준비에 매진하지 못한다고 해요. 정혼을 못 했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거죠. 그래서 진 부인께서 저를 찾아와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두 가문 사이에 다리를 놓아 달라고 말이죠.”

진씨는 속으로 우쭐했다. 주묘서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건 자기 딸이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진씨 가문은 어떤 가문입니까?”

“진씨 가문과 저희 정안후부는 친분이 좀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작위를 세습해 왔거든요. 비록 지금은 작위가 없지만 진 노야께서는 과거 시험 출신이시고 현재 정4품 호부낭중戶部郎中직에 계십니다. 진 공자도 학문에 재능이 있고요.”

진씨 가문의 주인은 사십 대 초반으로 나이가 젊은 축에 들었고, 또 실무를 맡는 호부낭중이라 향후 진급도 가능했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녀의 어머니다웠다. 적당히 아무나 소개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백 이낭도 꽤 괜찮은 혼사라고 생각했다. 주묘서는 물론이고 혼인 전의 엽연채의 배필로도 나쁘지 않은, 정안후부와 엇비슷한 수준의 가문이었다. 그러니 몰락한 가문의 여식인 주묘서에게는 시집갈 수만 있다면 정말로 과분한 혼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에 엽연채가 시집오기 전이었다면 이런 집안에서 구혼을 해 오면 진씨는 자다가도 웃으면서 깼을 것이다.

그런데 엽연채를 받아들인 후 그녀는 자기네 가문이 그렇게 별 볼 일 없지는 않은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귀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적녀를 며느리로 삼으면서 주묘서 혼사에 대한 눈높이가 더욱 높아지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딸이 점점 더 예뻐지고 있으니 이제 진씨 가문 같은 건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 딸은 태자부에도 드나들었다. 황실이나 귀족의 자제에게 시집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어떻게 작위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낼 수 있겠는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딸은 이제 예전과는 달라졌다. 한 발씩 위로 올라가고 있으니 앞으로 더 높은 가지 위로 날아오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온씨는 지금 격 떨어지는 상대를 소개하려 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씨는 싸늘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흘겨봤다.

‘전에 혼처를 구해 달라고 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하필 이런 때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엽연채 이 망할 년이 모친을 부추긴 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서자의 아내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 역시 두고 보지 못해 묘서의 혼삿길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삼류 나부랭이를 들이밀며 딸의 신분상승 기회를 차단하려는 꿍꿍이가 분명했다.

진씨는 속으로 냉소를 금치 못했으나, 단박에 거절하지는 않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아, 그랬군요. 그 진 공자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진 공자는 주 대소저보다는 나이가 좀 많습니다. 올해 스물셋입니다. 열일곱 살에 정혼했었는데 당시 정혼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삼년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정혼녀가 탈상하고 나니 이번에는 진 공자의 조부께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죠. 진 공자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라 조부님의 삼년상을 치른다고 했고, 그 아가씨 쪽에서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하여 혼사를 물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씨의 설명을 들으며 백 이낭은 계속해서 머리를 끄덕였다. 사내 나이 스물셋이면 그리 많지도 않고, 딱 좋을 때였다.

한편, 온씨는 진씨를 살펴보며 의아해했다. 보통 마음이 있으면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진씨는 고개를 숙인 채 손자와 놀아줄 뿐으로, 건넛산 돌 쳐다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온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엽연채도 진씨의 표정을 보고선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조소하더니 고개를 숙인 채 차만 마셨다.

“진씨 가문은 공훈이 있는 귀족이었고 선비 가문이기도 합니다. 진 공자는 인품과 용모도 출중하고요. 안사돈 생각은 어떠신지요?”

온씨가 의중을 묻자 진씨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좀 두고 보죠.”

그 말에 온씨의 입꼬리가 당겨졌다. 상대의 생각이 뻔히 읽혔다. 진씨는 진씨 가문이 눈에 차지 않는 것이었다.

진씨 가문은 집안과 인품 모두 훌륭했다. 이건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만약 엽연채가 미혼이었을 때 이 혼담이 들어왔다면 자신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만나 보겠다고 답했을 것이다.

온씨는 진씨가 이 혼처에 관심이 없어 보이자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정리했다.

“안사돈께서 마음이 없으신 것 같으니 돌아가서 진 부인께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손자를 어르던 진씨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적당히 둘러댔다.

“마음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생각은 좀 해 봐야죠.”

온씨는 여전히 남의 일처럼 맹숭맹숭하게 반응하는 그 태도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진씨 가문 부인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생각 좀 해 보고 싶으면 천천히 생각해 보든가. 기다리고 말고는 저쪽이 결정할 일이니까. 어쨌든 나는 말을 전한 거다.’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눈 후,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이만 가 보겠다고 인사를 건넸다. 엽연채는 문밖으로 나오자 그녀를 끌고 자기 처소로 향했다.

진씨는 콧방귀를 뀌더니 입구 쪽을 쳐다보며 분노를 토해 냈다.

“전에는 감감무소식이더니 이제 묘서가 높이 날아오르려 하자 일부러 찾아오는 거 봐라. 무슨 속셈인 거지?”

백 이낭은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강심설도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주묘서 같은 애로 뭘 어쩌고 싶은 걸까?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기회라는 건 언제 어떻게 생길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주묘서가 태자부에 드나들 수 있게 됐으니 어쩌면 정말로 권신 집안에 시집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내 강심설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이 밉살스러운 시누이가 좋은 곳에 시집가는 꼴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어머님, 진씨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서 어째서 생각해 본다고 하신 겁니까?”

강심설의 물음에 진씨는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쪽에서 구혼해 왔으니 기대를 품고 기다리게 하다가 때가 되면 거절하면 된다. 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가면 온씨와 진씨 가문이 어떤 얼굴을 할지 내 지켜볼 것이다.”

엽연채와 온씨, 엽미채는 일상원을 나왔고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뒤를 한번 돌아봤다. 진씨는 제 복을 발로 차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진 공자는 내년에 장원 급제자가 되는 영예를 안는다.

엽연채 일행이 궁명헌에 들어서자 온씨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 시어머니는 대체 왜 저러는 거니?”

“어머니께서 보신 그대로죠, 뭐.”

엽연채는 ‘픽’ 하고 비웃었다.

서차간에 도착하자 엽연채는 온씨를 나한상에 앉혔고, 엽미채에게는 하좌에 놓인 수돈에 앉으라고 권했다.

“자기 딸이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 어떤 사내도 자기 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봐요.”

엽연채가 비아냥거렸다.

“나도 이젠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온씨도 가소롭단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쪽에서 어머니께 혼처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제가 어머니께 수락하지 말라고 했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뭐 어쨌든 난 약속은 지킨 거다. 다만 다음부터는 네 시어머니에게 중매를 서 주지는 못하겠구나.”

“마님께서 혼담을 꺼내셔도 저쪽에서 원치 않으실 거예요!”

혜연이 차를 들고 걸어오며 이리 거들었다.

“저쪽은 이상이 너무 높구나. 저러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헛수고만 할 수도 있겠어.”

온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마디 더 했다.

“마님께서 아직 모르시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아가씨께서 신양 공주 마마의 별장에서 몸조리하고 돌아오신 후 인사차 공주부에 들리셨어요. 그때 같이 계시던 태자비 마마께서 아가씨를 예쁘게 보셨는지 몇 번이나 태자부로 아가씨를 불러 말린 꽃을 만들게 하셨지요.

주인마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는 화를 벌컥 내시더니 아가씨께서 태자부에 방문하실 때마다 묘서 아가씨를 데려가라고 강요하셨어요. 그런데 묘서 아가씨는 두 번 따라가더니 자기가 무슨 귀빈이라도 된 줄 아시더라고요.”

추길이 냉소를 지으며 알렸다.

“뭐라? 태자비 마마라고 했느냐?”

온씨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차 물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는 말이냐?”

추길은 그녀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온씨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엽연채의 손을 잡으며 염려했다.

“태자비 마마만 뵈었느냐? 그런 곳은 가급적 가지 않는 편이 좋다.”

엽연채는 온씨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더니 마음에 감동이 일었다. 과연, 어머니는 딸의 안위만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고난을 겪지 않고 얻는 부귀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자신은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마님, 아가씨께서 마마의 총애를 받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는 게냐!”

추길의 말에 온씨는 이렇게 타박하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천자의 사람들은 가급적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리고 이 일은 절대로 아버님께 알려서는 안 된다.”

추길은 대번에 억울해했다.

“하지만… 어제 마님께서도 보셨잖아요. 후야께서 얼마나 편애하시는지 말이에요. 후야께서 아가씨가 태자비 마마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시면 다신 그렇게 괄시하시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그런 괄시를 받는 편이 낫다. 이 일을 아버님께서 알게 되시면 연채에게 뭘 하라고 시키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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