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엽학문은 엽연채가 엽이채를 짓밟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엽이채가 아무리 못났어도 어쨌든 장씨 가문의 적손 며느리였다. 그녀의 남편인 장박원은 과거 시험을 치르러 갔으니 앞으로 얼마나 높은 곳에 오를지 모를 일이었다. 또 그는 앞으로 벼슬길에서 자신의 손자인 허서와 동기가 되어 서로 돕고 보살피게 될 것이었다.
엽학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이 비싸든 싸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효심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그리고 난 일품재에서 파는 간식거리를 가장 좋아한다.”
엽학문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 주자 엽이채가 얼른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일품재 간식을 가장 좋아하셔서 일부러 이곳 간식을 사 온 겁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더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애초 오늘 자신이 이곳에 온 건 저들이 아니라 온씨와 엽영교를 보기 위해서였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감지한 묘씨가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올해는 날씨가 예년보다 더 빨리 추워지는구나. 중추절이 되면 꽤 추울지도 모르겠어.”
“좀 더 추워지겠죠. 하지만 그도 그대로 좋을 거예요. 중추절 뒤면 향시가 있지 않습니까? 집안에 거인擧人이 나오면 연회를 베풀 텐데, 그때 추운 날씨에 궁합이 맞는 따뜻한 음식을 먹으면 되죠.”
손씨는 장박원이 과거 시험을 치르러 고향으로 돌아간 일과 또다시 연관 지어 말하더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묘씨와 나씨는 그저 ‘허허’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방금 전 엽연채가 오기 전에 손씨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박원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간다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는데 지금 또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같은 일을 수없이 우려먹으며 우쭐대는 손씨를 속으로 비웃었다. 정말이지 이야기를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엽학문은 흥이 제대로 올랐는지 그녀의 말을 계속 받아 줬다.
“그 말이 일리가 있구나.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연회를 성대하게 열어야지. 상에 장원계壯元鷄와 등과주登科酒도 차려 놓아야겠다.”
엽학문은 이야기를 할수록 뛸 듯이 기뻤다. 올해 환갑인 그는 자신에게도 이런 것들을 준비할 날이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래전 엽균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 장원홍壯元紅(사내아이가 태어날 때 이후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묻어 두는 고급 소흥주紹興酒)을 묻어 놨던 일이 기억났다. 그러나 후에 엽균이 학문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죽 잊고 지냈다.
허서가 진사로 급제하게 되면 그 술을 꺼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엽학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헤벌쭉 웃는 엽학문을 보며 엽연채도 미소를 지었다.
‘마음껏 기뻐하고 뿌듯해하세요! 지금은 웃음이 절로 나겠지만 조만간 눈물 쏟을 날이 올 겁니다! 왜냐면 그자는 당신의 손자가 아니니까요.’
엽연채는 씨앗을 까먹으며 즐거워했다.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놓은 상태였지만 당장은 손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들이 가장 영광스러워하고 의기양양해하는 순간에 무너뜨려 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속이 다 후련해졌다.
“어머니, 계향 정자 쪽에 계화꽃이 활짝 피었으니 꽃을 좀 따 가지고 올게요. 조금 있다가 주방으로 가져가 요리를 만들어야겠어요.”
이때 엽영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묘씨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래, 가 보거라.”
묘씨가 그러라고 하자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여럿에게 권했다.
“연채야, 미채야. 큰새언니, 셋째 새언니. 우리 함께 가요.”
그러잖아도 온씨와 나씨 등은 시끄럽게 나불대는 손씨에게 진절머리가 나던 참이었다. 그들은 얼른 웃는 낯으로 응하고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엽이채는 휑해진 방 안을 둘러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출가하기 전에 엽영교는 어디를 가든 자신과 엽연채, 엽미채를 함께 불렀다. 그렇게 고모와 세 자매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고모는 자신을 따돌리고 있었다.
엽이채는 장씨 가문과의 혼사를 치른 후 자신이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은 장씨 가문의 귀한 적손 며느리가 되었으니 친정집에 오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랑을 받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장만만의 일이 터지면서 체면이 크게 깎여 버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장씨 가문의 적손 며느리였고 자신에겐 잘난 남편이 있으니, 어쨌든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간 엽연채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데도 엽영교가 자신을 따돌리다니!
기분이 언짢아진 엽이채는 손을 꽉 움켜쥐며 언젠간 저들을 모두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할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묘씨는 엽이채를 따돌리는 엽영교 때문에 속으로 마음을 졸였다. 정말이지 철딱서니 없이 행동하는 딸이었다.
* * *
한편, 안녕당을 나온 엽영교 일행은 재잘거리며 계향 정자로 향했다. 잠시 후, 일찌감치 밖으로 뛰어나갔던 옥패가 꽃바구니 몇 개를 들고 와 나누어 주자 한 사람당 하나씩 꽃바구니를 손에 들었다.
이때 엽연채가 엽영교를 뒤로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물었다.
“숙부님 조사는 어떻게 돼 가요?”
“그냥 그렇지 뭐.”
엽영교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냥 매일 연극을 보러 가고 약란 소저한테 격려 차원에서 돈을 준 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다야. 가끔 적성대에 가서 사람들과 금을 연주하고. 조사하면 할수록… 내가 정말로 오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릴 때 옥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아가씨께서 너무 흥분하신 거라니까요. 연극을 보다가 말다툼을 좀 하신 것뿐인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셔서 이리 소란을 피우신 거예요. 주인마님께 고자질하고 그 화단을 찾아가 따지기까지 하셨잖아요!”
엽영교는 부끄러움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조그만 얼굴을 가리며 변명했다.
“이게 다 큰오라버니가…….”
확실히 엽승덕 일로 한동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으니 그녀가 지레 겁먹고 묘기화를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어느덧 계향 정자 근처에 도착했다. 정자의 이름이 ‘계향’인 것은, 근처에 계수나무가 한가득 심어져 있어 은은한 계수나무 향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꽃밭을 비집고 들어가 계화꽃을 따기 시작했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딴 꽃이 바구니를 반쯤 채웠을 즈음, 멀리서 여종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여종이 엽영교 앞으로 뛰어와 고했다.
“아가씨, 외숙부님 식구들이 오셨습니다.”
그 말에 엽영교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오신 거지?”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월병을 보내신 게 아닐까요?”
엽미채가 쭈뼛거리며 이리 말하자 온씨는 웃음을 지었다.
“요 맹추야. 월병은 시집간 딸이 친정으로 보내는 거란다. 반대로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영교 아가씨, 얼른 가 봐요.”
나씨가 입을 떼며 곁을 지키던 여종에게 자기 꽃바구니를 건넸다.
일행은 호숫가를 따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안녕당으로 들어가니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손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좀 불안했던 엽영교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여종이 발을 걷어 올리자 그들은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나씨가 제일 먼저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외숙모님! 공자들도 오셨군요.”
엽연채가 방 안을 쓱 훑어보니 권의에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묘씨의 큰새언니인 팽씨는 사십 대 부인으로, 키가 작고 얼굴이 약간 둥그스름하며 인상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오늘 옅은 조롱박 문양이 들어간 갈색 배자 차림이었다.
하좌에는 팽씨의 두 아들인 장남 묘기전과 차남 묘기화가 앉아 있었고, 큰며느리 황씨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황씨는 스물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으로 전지纏枝 문양이 들어간, 가슴에서 옷깃이 교차하는 대자색代赭色(황갈색과 적황색에 가까운 어두운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가 늘씬했으며 영리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황씨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눈꼬리가 위로 올라간 눈으로 그들을 흘끗 쳐다봤다. 황씨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사람은 제일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엽연채였고, 이어서 시선은 엽영교에게 향하였다.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머, 영교 아가씨가 오셨네요.”
“외숙모, 새언니, 큰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
엽영교는 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묘기화에게로 향했는데 그의 냉담한 얼굴을 보고는 마음이 쓰라렸다.
“영교야, 어서 앉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다.”
팽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앉기를 권했다. 하지만 의자가 어디 그리 많겠는가? 온씨와 나씨만 자리에 앉았고 엽연채, 엽영교, 엽미채는 그녀들 뒤에 서 있어야 했다.
“외숙모님과 아드님들께서 저희 어머님께 월병을 얻어 가시려고 이리 방문하신 건 아닐 텐데 말이죠.”
손씨가 웃음 띤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러자 황씨가 바로 방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며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왔으니 돌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엽영교를 쳐다보고 다시 묘씨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달 말에 저희 둘째 공자와 영교 소저의 혼례식이 있습니다. 사실 관례에 따르자면 이 시기에 저희가 이곳으로 찾아와서도 안 되고, 또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도 안 되지요. 그러나 저희 가문에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생겨 이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손씨와 엽승신은 황씨의 말을 듣고 그들이 좋은 일로 찾아온 게 아님을 확신했다. 손씨는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얼른 한마디 거들었다. 이에 묘씨는 성질이 나 옆구리에서 통증이 다 느껴졌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손씨를 쏘아봤다.
“고모님과 영교 소저에게 여쭤봐야 할 일입니다.”
황씨가 ‘픽’ 하고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둘째 공자와 영교 소저는 정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나 저희 집안에서는 영교 소저를 진짜 며느리처럼 대했습니다. 그런데 고모님과 영교 소저가 사람을 시켜 저희 둘째 공자 뒤를 캘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희 둘째 공자가 밖에서 허튼짓을 하고 다닌다면서 말이죠.”
그 말에 엽학문의 낯빛이 확 어두워지더니 그는 반사적으로 묘씨와 엽영교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