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금세 점심시간이 되었다. 녹엽이 엽연채를 찾아와 식사하러 오라고 말을 전했다. 궁명헌을 나서던 엽연채는 문 앞에서 주운환과 마주쳤고 이에 부부는 함께 일상원으로 향했다.
일상원 문안으로 들어가자 녹엽이 발을 걷어 올렸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니 비 이낭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백야, 걱정 마셔요. 스승님께서 종과 도련님을 칭찬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평소 실력만 발휘한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 말에 탑상에 앉아 있던 진씨는 ‘픽’ 하고 냉소를 지었다.
‘거인擧人이 무슨 길거리에서 파는 배추인 줄 아느냐?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으면 여기저기 다 거인이었겠지.’
“둘째야, 시험장에 들어가면 괜한 생각은 절대 하지 말거라.”
주 백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당부했다.
“다만 중추절을 타지에서 보내야 하니 적적하겠구나.”
그리 말하고 있는데 발이 걷히며 엽연채와 주운환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부부가 상석을 향해 예를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오, 셋째 내외가 왔구나.”
주 백야는 주운환을 보더니 그제야 주운환도 올해 시험을 보러 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중추절을 형제가 함께 보내니 그렇게 쓸쓸하지는 않겠구나.”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셋째 공자가 겨우 말동무나 해 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속으로 이리 타박한 엽연채가 냉담한 눈빛으로 방 안을 쓱 훑어보니 와야 할 사람들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셋째 오라버니, 새 옷으로 갈아입으셨네요.”
주묘화가 제일 먼저 주운환의 옷차림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래. 시험을 보러 가니 당연히 새 옷을 입어야지.”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실 모두들 말만 안 했지,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운환이 평소 입는 옷은 딱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갈 때 보면 그는 늘 예의 그 두 벌 중 하나를 입고 있었다.
한편 주종과는 주운환 부부가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표정을 확 굳혔다. 그도 오늘 새 옷을 입고 있었는데, 금포는 선명한 남색 바탕에 물병 문양이 들어간 항주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둥근 옷깃이 달려 있었다. 거기다 허리에는 옥대를 차고 머리에는 은관을 올려 더욱 부귀하고 영민해 보였다.
그런데 주운환은 단출한 연청색 도포를 입고 있음에도, 자신은 그의 수려한 외양에 한참 못 미쳐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주종과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더군다나 엽연채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자 질투심이 더욱 타올라 입에 게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둘째야, 셋째야. 열심히 하거라. 이제 가문을 빛내는 건 너희들에게 달렸다.”
주비양이 두 동생을 쳐다보며 덕담을 건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눈빛에 웬일로 따스한 기운이 살짝 어리었다.
“큰형님, 걱정 마세요. 제가 형님 몫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주종과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진씨는 입을 삐죽거리며 남몰래 분노와 원망을 토해 냈다. 그녀의 아들도 어렸을 때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학문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전장에 나가 싸우는 법과 군대를 통솔하는 법을 배우느라 학문을 익힐 적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젠 과거 시험을 치르고 싶어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버린 후였다.
진씨는 속으로 주종과가 반드시 낙방해야 한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주운환에게는 저주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낙방은 이미 정해진 결과였다. 그가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딴생각을 하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번에 과거 시험을 보겠다는 것도 아내의 등살에 못 이겨 그런 시늉이나 하는 것일 터였다.
“밥상을 차리거라!”
진씨가 말하자 밖에 있던 여종들이 얼른 찬합을 들고 와 음식을 상 위에 차려 놓았다.
사람들은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백야는 주종과 형제에게 다시금 당부의 말을 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 * *
주운환이 방으로 돌아오자 여양과 여한은 각자 상자 하나를 들고 동쪽 수화문으로 향했다. 이번 여정에는 집안의 마차 두 대를 모두 가져갔다. 주운환과 주종과가 탈 마차는 커다란 호화 마차였다. 두 사람의 짐은 모두 조그만 마차에 실렸다.
마차에 오르기 전, 주운환이 엽연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여양을 데리고 갈 겁니다. 여한이 집에 남아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여한을 찾으면 됩니다.”
“네.”
엽연채는 순간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종과는 이미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밖에서 주운환 부부가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질투심에 허연 거품을 뿜어낼 지경이었다.
“셋째야, 어서 마차에 오르거라. 지금 안 가면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하지 못한다.”
그리 말하며 참지 못하고 엽연채를 재차 쳐다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주종과는 심사가 더욱 뒤틀렸다.
주운환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본 뒤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바로 말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틀 뒤, 엽연채는 서신을 써서 추길을 통해 정안후부로 서신을 전달했고 다음 날 엽영교에게서 답장이 왔다.
혜연과 추길은 엽연채에게 다가와 서신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가씨, 영교 아가씨께서 뭐라고 하셔요?”
“할머니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하고 계신대. 그런데 표숙이 매일 그 공연장에 가서 저번에 본 화단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기세를 돋우어 줄 뿐이지, 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네.”
그러자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대체 어찌 된 일인 거죠? 이 일만 없었으면 아무 걱정 없었을 텐데요. 솔직히 묘 공자께서는 아주 탁월한 신랑감이시잖아요. 외모도 훌륭하고 재능도 출중해 모두들 흠모하는 대단한 재자才子이시니까요. 사실 저희가 그날 너무 충동적이긴 했어요. 사소한 일로 사람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죠.”
그러나 엽연채는 맞장구를 치는 대신 눈살을 구겼다.
“그래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가씨, 걱정 마세요. 주인마님은 영교 아가씨의 친어머니세요. 주인마님보다 더 영교 아가씨에게 마음을 쓰고 걱정하는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절대로 영교 아가씨가 손해를 보게 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그래.’ 하고 대꾸했다. 그녀는 친정 일을 생각하니 또다시 온씨가 걱정되었으나 당분간은 방문을 참아야 했다.
* * *
시간은 천천히 흘러 드디어 엽연채가 고대하던 팔월이 찾아왔다. 날씨가 화창한 팔월 초이튿날, 엽연채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월병과 떡을 산 뒤 추길과 혜연을 데리고 정안후부로 갔다.
중추절에 시집간 딸이 친정에 월병을 선물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내 떳떳하게 어머니와 고모를 보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엽연채는 마차를 타고 정안후부로 향했고, 이각쯤 지나자 마차는 정안후부 측문으로 들어가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안녕당으로 걸어가던 엽연채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안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는데, 이 방정맞은 웃음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손씨였다.
“큰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여종이 엽연채를 위해 발을 걷어 주었다.
엽연채가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묘씨와 엽학문은 상석에, 온씨, 손씨 그리고 나씨는 권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상석에 놓인 권의에는 배가 부른 젊은 부인이 앉아 있는데 다름 아닌 엽이채였다. 엽이채는 임신 5개월이 다 되어 가 갸름했던 조그만 얼굴이 동그스름하게 변해 있었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꽤나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엽연채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이를 가졌을 때 엽이채는 어찌나 득의양양한지 온 얼굴에 혈색이 돌고 윤기가 좔좔 흘렀다. 현생의 그녀와 전생의 그녀를 비교해 보니, 지금도 웃고 있긴 했지만 만면에 흐르던 광채는 사라졌고 어딘지 모르게 어두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장만만의 일이 그녀에게 적잖이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손씨는 엽연채를 보더니 놀랍고도 기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며 알은체했다.
“연채도 왔구나! 이것 참, 우연이네. 이채와 같은 날에 연채도 친정을 방문하다니. 어서 이쪽으로 와 앉거라.”
엽연채는 손씨의 낯짝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가 자신 앞에서 자랑하고 뽐내기 위해서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엽연채는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 묘씨와 엽학문에게 예를 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래. 그만 일어나거라!”
묘씨가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어서 자리에 앉으렴.”
그러나 엽학문은 인상을 잔뜩 쓴 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연채야, 어서 이쪽으로 와 앉아.”
엽영교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수돈에서 일어나 엽연채를 끌고 온씨 곁으로 걸어갔다. 그런 뒤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녀도 엽연채 곁에 앉았다.
엽학문은 엽연채가 추씨 가문 사람들과 합세하여 엽승덕을 감옥에 처넣은 일로 그녀에게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허서가 곧 본래의 부모 밑으로 입적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즉, 손자가 벼슬길에 오를 것이니 명예를 위해서라도 집안에서 소란을 더는 피울 수 없었다.
“연채야, 뭘 갖고 온 거니?”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월병하고 과자 종류예요. 소가 종류별로 다 있어요.”
엽연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혜연이 이미 간식거리를 들고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혜연은 묘씨가 앉은 탑상 곁의 커다란 원탁에 중추절 선물을 올려두었다. 월병이 든 봉투 여섯 개와 그 외 다양한 과자류였는데, 모두 천미루千味樓에서 산 것이었다. 천미루는 도성에서 유명한 과자점으로, 맛은 훌륭했으나 다만 가격이 너무 비싼 게 흠이었다.
원탁 반대쪽에 간식거리가 담긴 몇 개의 봉투가 이미 올려져 있었다. 혜연이 포장지를 보니 일품재一品齋에서 사 온 것으로, 일품재에서 파는 간식거리는 천미루만 못했다.
엽이채와 손씨는 엽연채가 가져온 선물을 보더니 낯빛이 좀 어두워졌다. 엽이채가 챙긴 선물이 엽연채의 것보다 별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채야, 너희 집안은 가난한데 이 좋은 걸 뭘 이렇게나 많이 사 왔니.”
손씨가 ‘픽’ 비웃자 엽연채는 그녀를 노려보며 받아쳤다.
“그러게요. 근데 전 집안이 가난한데도 좋은 간식거리를 사 왔는데, 이채는 부유한데도 좋은 걸 안 사 왔네요?”
손씨와 엽이채는 말문이 막혔고 체면을 구긴 엽승신은 손씨를 획 쏘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