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저도 갈래요.”
“안 됩니다. 소저는 집에 계세요.”
주운환의 거절에 엽연채는 조그만 입을 뽀로통하게 내밀고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주운환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추경은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보자 심기가 불편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야, 그럼 우린 이만 돌아가 보마.”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네, 나중에 짬이 나면 저희 가문으로 오라버니들을 초대할게요.”
경인이 말채찍을 휘두르자 마차는 문안으로 들어섰고 주운환과 여한은 밖으로 나갔다.
추경과 추랑이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추랑이 형의 침울한 표정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형님, 왜 그러세요?”
추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보니까… 연채와 그 사람이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더라.”
“제 생각에는 그저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아요. 설마, 포기하시려고요?”
추랑의 말에 추경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엽연채는 이혼할 것이었다. 즉 자신에게 기회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이미 그녀가 따로 살길을 도모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나니 그 사람의 찌푸린 표정, 웃는 표정 하나하나에 다 신경이 쓰였다. 다른 사내에게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고, 다른 사내에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니 기분이 착 가라앉아 버렸다.
“그럼 됐어요.”
추랑은 헤헤 웃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연채와 만나기가 정말 힘드네요. 남녀가 유별한 탓에 그 아이를 밖으로 불러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없으니 말이에요. 이모께서 저희 집에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저희에게 여동생이 있었어도 좋았을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사촌 여동생을 데려올 걸 그랬네요.”
* * *
궁명헌으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혜연이 옷을 하나하나 나한상 위에 펼쳐 놓으니 총 다섯 벌이었다.
“다른 부분은 다 제대로 만들어졌는데 옷깃과 소매 부분이 아직 마무리가 안 됐어요. 상점 주인이 급히 만들어야 하는 옷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랑 추길이가 밤을 새우면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함께 하면 되지. 셋이서 하면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될 거야.”
엽연채가 이렇게 말을 받으며 만류했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옷소매와 옷깃 부분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다섯 벌 중 두 벌은 엽연채의 손을 거쳤다. 그런데 엽연채가 보니 옷이 너무 수수한 성싶었다. 그녀는 소매 부분을 반쯤 손질하다가 조그만 해당화 문양 하나를 가장자리에 수놓았다. 그녀는 완성한 문양을 쳐다보며 흡족해했으나 이내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수놓은 부분을 소매 끝부분으로 접어 재차 바느질했다. 그리하니 더 이상 문양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짓는 일반적인 방식에 따라 다섯 벌을 모두 손보고 나니 시간은 이미 자시子時(밤 11시~오전 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추길과 혜연은 하품을 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 저녁은 혜연이 당직이라 그녀는 주렴을 사이에 두고 바깥쪽에 있는 침상에서 잠이 들었고, 추길은 밖에 있는 곁채에서 잠을 잤다.
한밤중 풋잠이 들었던 혜연이 누군가의 기척에 눈을 떠 보니 침실 안에 등불이 켜 있었다. 혜연이 가만 살펴보니 침상 쪽 이동식 등불이 팔각형 덮개를 통과해 옅은 노란 불빛으로 얼비치고 있었다. 침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엽연채는 몸을 반쯤 휘장 밖으로 내밀더니 옷 몇 벌을 챙겼다. 그러곤 고개를 숙인 채 집중해서 수를 놓기 시작했다.
혜연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어안이 벙벙했고 이내 마음이 아려 왔다. 오늘 그녀는 엽연채가 옷소매 가장자리에 꽃을 수놓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막상 수를 다 놓으니까 그 부분을 둘둘 접어 다시 바늘로 꿰매는 게 아닌가. 그러면 자수 장식을 한 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해당화 문양이 안으로 말려들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엽연채는 지금 그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수를 놓는 데 몰두해 피곤한 줄도 모르는 모습이었다. 노르무레한 불빛 아래 새까만 머리칼이 아래로 드리워져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고 청초하고 아리따운 얼굴에서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마지막 한 벌까지 완성되자 그녀는 이로 실을 끊은 뒤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두 눈에서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번뜩였고 초롱초롱한 두 눈동자에서는 빛이 흘러넘쳤다.
혜연은 주운환과 진짜 부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엽연채가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차마 저지할 수가 없었다. 요즘 속 시끄러운 일이 너무 많았다. 수를 놓는 일이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으니 도무지 매몰차게 막을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옷을 한 벌씩 가지런히 접어 둔 뒤 등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혜연을 불렀다.
“혜연아, 머리 좀 빗겨 주렴.”
“네.”
혜연이 침상을 정리하며 대꾸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인 추길은 인기척을 듣곤 바로 물이 든 대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엽연채는 그 물로 세수를 한 다음 옷장에서 옷 한 벌을 꺼내 들었다. 해당화를 수놓은 검은색 적삼과 금실로 촘촘히 짠 자귀나무 꽃 문양이 들어간 수홍색 긴 치마였다.
엽연채는 혜연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수운계隨雲髻로 틀어올리고, 골라 놓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 옷 한 무더기를 품에 안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이고, 아가씨. 머리 장식을 안 꽂으셨어요!”
추길이 나비 모양 금잠을 들고 그녀의 뒤를 쫓아 나왔다.
“뭐가 급해서 이리 뛰어가세요?”
추길은 엽연채를 잡아끌어 멈춰 세운 다음, 머리에 금잠을 꽂아 주었다.
“됐어. 이거 꼭 안 꽂아도 돼.”
엽연채는 잠을 꽂으니 머리가 좀 아프다고 느껴져 그 금잠을 움켜잡고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머리에 아무것도 안 꽂으면 남 보기에 어떻겠어요?”
그러나 추길도 불퉁한 소리를 내며 물러서지 않았다.
“좀 그렇긴 하지?”
엽연채는 어찌나 마음이 달았는지 장신구가 없으면 남에게 어찌 보일지는 생각도 못 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궁명헌을 나섰고 몇 걸음 안 가서 난죽거에 도착했다.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는데, 마침 물동이를 들고 나오던 여양이 엽연채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했다.
“셋째 마님,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세요?”
“아, 이건 저번에 셋째 공자 몸 치수를 재고 만든 옷인데 오늘 완성이 됐단다.”
여양은 기뻐하며 옷을 건네받았다.
“그러잖아도 오늘 도련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셔요. 지금 갈아입으시면 되겠네요.”
여양은 그리 말하며 얼른 안으로 들어갔고 한참이 지난 후 주운환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문 앞 계단에 선 주운환의 모습을 보더니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연청색의 수수한 항주 비단이 그의 훤칠하고 미끈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짙은 먹물처럼 새까만 장발이 무게감 있게 새 옷 위로 드리워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귀티가 흐르는 화려한 외모는 무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고운 눈초리에서는 득의양양함이 은근히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걸어오니 마치 단청수묵화 한 폭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고상한 멋이 한껏 드러나 그 아름다움을 한눈에 담기가 벅찰 지경이었다.
“정말 멋지셔요.”
추길은 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에 오래된 옷을 입고 있을 땐 그저 잘생겼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지금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휘영청 밝은 달이 풍기는 고아한 운치가 온몸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데 영 수수해 보이네요.”
“괜찮아.”
엽연채는 이리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수수하지 않았다. 조그만 꽃문양이 소매 안에 숨어 있으니까.
주운환은 털이 바짝 선 조그만 여우처럼 귀엽고 앙큼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걸어가며 여양에게 물었다.
“서책은 다 챙겼느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좀 더 보여 주면 안 되나?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엽연채는 아주 흡족한 기분으로 난죽거를 나왔다. 걸어가고 있는데 추길이 입을 열었다.
“점심에 일상원에 가서 식사하셔야 돼요. 백야께서 둘째 도련님과 셋째 도련님께 송별 연회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셨어요.”
두 사람이 궁명헌에 도착하니 혜연은 그제야 단장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곱고 아리따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엽연채의 얼굴이 혜연의 눈에 들어왔다.
“아 참, 영교 아가씨 쪽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추길이 갑자기 엽영교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고 혜연은 티 안 나게 추길을 쏘아봤다.
‘천인처럼 뛰어난 용모를 가진 미남자가 새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보고 아가씨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만발했는데!’
추길이 눈치도 없이 하고많은 말 중에 하필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 아가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우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영교 아가씨 곁에는 주인마님께서 계시잖아. 주인마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영교 아가씨인데 마님께서 일을 맡으셨으니 잘 처리하시겠지.”
혜연이 이리 말하자 엽연채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아.”
최악의 경우 그냥 묘기화가 발을 헛디뎌 죽게 놔두면 그만이다.
“아가씨, 당분간 그쪽으로는 발길을 좀 줄이는 게 좋겠어요.”
혜연이 이어서 말했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친정집에 갔잖아요. 일상원 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후야만 해도 불만을 갖고 계실 거예요.”
엽연채는 온씨와 엽영교가 걱정됐지만 혜연의 말대로 매일 친정을 방문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진 않았다.
엽연채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고양이를 품에 안고 정원에서 놀기 시작했다. 혜연이 옷을 말리며 그쪽을 쳐다보니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엽연채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금패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고양이는 ‘야옹’ 하며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더니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 패자를 낚아채려고 했다. 그러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패자를 높이 들어 올렸고, 고양이는 폴짝 뛰어올라 그 패자를 입에 문 다음 달아나 버렸다.
“저 도둑고양이가 물건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훔쳐요.”
추길은 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희도 전보다 쉽게 찾아내고 말 거예요. 저 녀석이 물건을 어디다 숨기는지 봐야겠어요.”
그녀는 냉큼 고양이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나보다 추길이가 더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으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혜연에게 말을 걸었다. 혜연은 마지막 남은 옷 한 벌을 마저 널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