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오늘 아침 일찍 이채를 보러 갔어요. 내일 박원이가 향시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송별 연회를 열어 줬죠. 시험에 붙어 도성으로 돌아오면 내년 춘시를 준비해야겠죠.”
온씨는 우쭐거리는 손씨를 보더니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나 이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떠올랐다. 남편은 외실의 역성을 들고 아들은 변변치 않으며 딸은 서자에게 시집가 버렸다. 게다가 이젠 그 외실을 미워했던 시아버지마저 그 외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장씨 가문은 장만만 일로 웃음거리가 되었고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만, 어쨌든 장찬이 대리시경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여전히 권신權臣 집안이었다. 그리고 엽이채의 복중에는 장씨 가문의 적통을 이을 자손이 자라고 있었다.
온씨는 손씨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어 그저 뜨뜻미지근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렇군.”
그러자 엽연채가 말했다.
“숙모, 하루 종일 분주히 돌아다녔으니 처소로 돌아가 푹 쉬세요.”
“연채야, 그게 무슨 뜻이니?”
손씨가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장만만 일로 기가 팍 꺾였지만 엽승덕 부부에게 일이 생기자 다시 기고만장해졌다.
“형님이 걱정돼서 와 본 건데, 왜 사람을 쫓아내고 그러느냐?”
온씨는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동서, 왜 그렇게 생각하나. 연채도 그저 자네가 피곤할까 봐 걱정한 것뿐이네.”
손씨는 온씨가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방금 전에 형님께서 균이에 대해 묻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데 미채야, 넌 왜 거짓을 말하는 게냐? 균이가 대단한 효자라 관아에서 아주버님을 대신해 곤장을 서른 대나 맞아 지금 몸조리 중이에요! 형님도 가서 봐 보셔요.”
온씨는 엽균이 엽승덕을 대신해 곤장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반면 손씨는 그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는 걸 보며 아주 의기양양해했다.
“그만 좀 못 해요?”
이때, 한기가 느껴지는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손씨가 고개를 돌려보니 엽연채가 아리따운 얼굴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굳힌 채, 상대를 꽁꽁 얼려버릴 것처럼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손씨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살벌한 눈빛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 그게…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란다. 남의 호의를 곡해하기나 하고. 듣기 싫으면 관두거라!”
손씨는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온씨는 얼빠진 모습으로 귀비탑에 앉아 있었다. 그녀 곁으로 가까이 간 엽연채의 안색이 매우 어두웠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안후부에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 모친이 집에 돌아오면 엽균의 일은 조만간 알려지고 말 것이었다.
엽연채가 온씨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온씨는 눈물을 꾹 참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지…….”
“마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채 마마가 대번에 부정했다.
“큰도련님께서 여덟아홉 살쯤 됐을 때 주인나리께서 큰도련님을 안뜰의 여인네들 손에서 교육할 수 없다며 바깥뜰로 데려가셨죠. 평소 도련님께서는 공부하러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시니 집에 계시는 시간이 적었지만, 그래도 저희가 탕과 먹을거리를 틈틈이 보내며 도련님께 관심을 쏟았지요. 가끔 안뜰로 도련님을 불러 함께 식사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인나리께서는 이조차도 반대하셨어요. 저희가 도련님을 오냐오냐한다며 버릇 나빠진다고 저희를 나무라셨고,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며 제한하셨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마님께서는 평소 도련님을 보면 학문에 매진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여하튼 도련님께서는 마님께서 부르기만 하면 도망을 치고 점점 저희를 멀리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채 마마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들이 누구의 손에서 컸든 간에 어쨌든 온씨에게 어머니로서의 책임이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마님, 추 공자님들이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염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온씨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이내 추경과 추랑이 안으로 들어와 온씨에게 예를 올렸다.
“이모님.”
“왔구나. 방금 어디를 갔었느냐?”
온씨가 묻자 추경이 이리 대꾸했다.
“셋째 노야께서 저희에게 술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시간이 늦어 이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 왔습니다.”
“오, 그러고 보니 곧 유시酉時(오후 5시~7시)로구나.”
온씨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다층 진열장 위에 놓인 모래시계를 보았다.
“그만 돌아가 보렴. 연채야, 너도 그만 가 보고!”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엽미채에게 부탁했다.
“미채야, 며칠 동안은 네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자렴.”
엽미채가 얼른 알겠다고 대꾸하자 엽연채와 추경, 추랑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화문에 도착하자 엽연채는 마차에 올랐고 추경과 추랑은 말에 올랐다. 일행은 문을 나서 큰길로 향했다.
높은 가을 하늘 아래 공기는 상쾌하며 선선했다. 날이 좋으니 마차 양쪽에 달린 발은 모두 걷혀 있었다. 추경이 엽연채를 쳐다보자 그녀는 어여쁜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드리우고 있었다. 추경은 수심의 원흉이 엽균임을 바로 알았다.
“연채야, 걱정 말거라. 방법이 있을 거다.”
엽연채는 ‘음’ 소리를 내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방법이란 방법은 다 써 봤어요. 수차례 회유를 했지만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더라고요.”
추경은 마음이 아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는 혼인을 하긴 했지만 나이가 아직 어려 내년 이월이 되어도 겨우 열여섯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아이가 집안의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추경은 엽균을 떠올리고는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엽연채와 추씨 가문 형제가 동대가 삼거리에 도착하자 엽연채가 말했다.
“어머, 벌써 여기까지 왔네요. 저희는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야 해요. 그럼 오라버니들, 다음에 또 봐요.”
“내가 데려다주마.”
추경이 이리 말하자 엽연채가 사양했다.
“괜찮아요. 전 도성 사람이잖아요. 오라버니들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돼 길을 잘 모르고요. 데려다주더라도 제가 데려다줘야죠.”
추경은 미소를 지으며 솔직히 말했다.
“그냥 너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서 그래.”
엽연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그럼 오라버니들,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할게요. 근데 제가 저 앞에 있는 천자각에 들려서 옷을 몇 벌 받아 가야 해요.”
엽연채와 추경 형제 일행이 이내 모퉁이를 돌았다. 엽연채는 혜연에게 마차에서 내려 옷을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혜연은 보따리를 품에 안고 돌아와 마차에 올랐다. 그들은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갔고 어둠이 깔릴 즈음 주씨 가문 저택이 위치한 장승가에 도착했다.
“이 길을 장승가라고 부르지?”
추경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듣기로 전에는 장승가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래요? 전 왜 그런 소리는 못 들어봤을까요?”
엽연채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너보다 아는 게 몇 개 더 있어.”
추경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장군가인 정국백부는 대대로 영웅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수도의 성문이라 불리는 응성에 군대를 주둔시켜 요처를 지켰지.
우리가 사는 정성은 응성에서 멀지 않아. 내가 어렸을 땐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어 늘 주씨 가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람들은 모두 주씨 가문을 존경하고 추앙해 주씨 가문 1대 조상부터 18대 조상까지 전부 속속들이 알고 싶어 했지.”
‘주씨 가문 조상 전원을 알고 싶어 했다?’
추길과 혜연은 그 말을 듣고 그만 ‘풉’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씨 가문은 태조 황제께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시도록 도운 개국공신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단다. 그래서 태조 황제께서 주씨 가문에 저택을 하사하셨지.
원래 이 길은 본래 ‘옥성가玉城街’로 불렸던 것 같구나. 그런데 태조 황제께서 길 이름에서 드높은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여 장승가라는 이름을 하사하신 거란다. 주씨 가문에 큰 기대를 거셨던 게지. 주씨 가문이 항상 승리하고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셨던 게야.”
추경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세상에 항상 승리하고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제 정성 사람들의 화젯거리는 풍씨 가문이 되었단다. 안타까울 따름이지.”
엽연채 역시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때, 경인이 말채찍을 내리치면서 마차가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두 분, 이제 그만 오셔도 돼요. 바로 이곳이에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나 추경은 말만 그리했을 뿐, 계속 말을 타고 그녀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야에 서쪽 측문이 들어오자 그쪽에서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앞장선 사람은 한 소년인데 화려한 얼굴에 멋스러운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주운환이었다.
그러나 추경은 주운환을 보며 외양은 아주 빼어나지만 너무 문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번듯한 장군가였던 주씨 가문의 후손인데 선조의 유풍遺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추경은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주운환도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마차 한 대와 말에 타고 있는 두 사내가 보였다.
“셋째 도련님.”
경인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엽연채도 주운환을 보고는 기분이 좋아져 웃는 얼굴을 반쯤 내밀고 그를 쳐다봤다.
“돌아왔군요.”
주운환은 엽연채에게 알은체한 후 추경과 추랑에게 예를 올렸다.
“두 분 사촌 형님들께서도 오셨군요.”
엽연채 일행은 주운환의 곁에서 멈춰 섰고 추경과 추랑은 얼른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답례했다.
추랑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주씨 가문 셋째 공자시군요.”
그 말에 주운환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저번에 만났을 땐 자신을 사촌 매제로 불렀었는데…….’
주운환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좀 언짢아 이렇게 대꾸했다.
“형님, 그냥 운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엽연채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미소 띤 얼굴로 주운환에게 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시는 거예요?”
“내일 향시를 치르러 고향에 가야 하니 함께 수학하는 벗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러 갑니다.”
주운환의 대답에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했다. 그에게 무슨 벗이 있다는 말인가? 분명 양왕에게 달려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것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