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추길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연극쟁이 주제에 되게 비싸게 구네.”
“어쩌면 정말로 손님을 만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러면서 옥패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엽영교를 쳐다봤다. 엽영교는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부름꾼이 간식거리가 담긴 접시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녹두병綠豆餠이고, 다른 하나는 설련고雪蓮糕였다.
“두 분, 맛있게 드세요.”
“이봐요, 우린 정말 약란 소저를 만나고 싶다니까.”
엽영교가 고집을 꺾지 않자 심부름꾼이 난색을 표했다.
“아가씨, 이건 저희 공연장의 규칙이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엽연채가 ‘피식’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규칙은 무슨. 그저 우리가 대단한 가문의 사람처럼 안 보이니까 그런 거겠지. 승은공承恩公의 자손이나 황제 폐하의 친인척이 왔어도 이리 대했을까?”
그 말에 심부름꾼의 표정이 굳었다.
“아가씨…….”
“나도 사정은 알아. 못 만나게 하는 건 이곳 간판 배우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우린 사내도 아니고 그저 약란 소저가 노래를 워낙 잘 부르니 한번 만나 보고 싶은 거네.”
심부름꾼은 엽연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이 트집을 잡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보통 여인들은 배우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어 전통극을 좋아하더라도 배우들은 업신여기곤 했다.
엽영교는 또다시 탁자 위로 은 두 덩이를 올려놓았다. 합쳐 보니 무려 은화 오십 냥이었다.
은화를 쳐다보는 심부름꾼의 두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통상 이 정도 돈이면 약란 소저를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두 분, 먼저 2층 귀빈실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공연이 끝나면 약란 소저가 두 분을 뵈러 올 겁니다.”
엽영교는 콧방귀를 뀌더니 그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두 여인은 한 귀빈실 안으로 들어가 탑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연극이 끝났고 묘기화도 자리를 떴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그 뒤로 일각을 더 기다리자 밖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란이 두 분을 뵈옵니다.”
“들어와요.”
엽연채가 대답했다. 된서리에도 시들지 않는 매화가 그려진 병풍 뒤에서 귀엽고 아담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대략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계란형 얼굴에 가늘고 고운 버들눈썹, 요염해 보이는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게 하는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약란이 두 아가씨를 뵈옵니다.”
약란이 몸을 낮추며 예를 올렸다.
약란을 한차례 훑어본 엽영교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가 생각보다도 더 아리따웠기 때문이다. 저러니 사내들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약란의 차림새를 살펴보니 머리에는 녹옥석로 장식된 보요를 꽂고, 목에는 영락瓔珞을 걸었으며, 손톱도 곱게 칠했다.
“그쪽 차림을 보니 묘 공자가 꽤나 후하게 하사하나 봐요?”
엽연채가 배시시 웃으며 운을 뗐다. 노골적인 언사에 엽영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리 말하면 누가 인정하겠는가.
약란도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엽연채와 엽영교를 쓱 훑어보더니 이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저를 찾았음을 눈치채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묘 공자님은 저희 단골손님이십니다. 그리고 제 공연을 좋아해 주시는 손님들에게 하사품을 좀 받았을 뿐입니다.”
엽영교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묘 공자께서 네 거처를 어디에 마련해 주었느냐?”
“아가씨, 지나친 생각이십니다. 전 줄곧 이곳 식구들과 함께 공연장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밖에서 지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약란은 이리 말하며 커다란 눈으로 엽영교를 힐끗 쳐다봤다. 엽영교는 속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이야기하는데 누가 바로 순순히 시인하겠는가.
엽연채는 약란의 평온한 눈빛을 보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쪽 목소리가 이 극에 참 잘 어울리더군요.”
“이 극을 쓴 작가가 저를 찾아와 공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워낙 잘 쓰인 극본이라 보통 때 같으면 덕명반으로 갔을 건데, 극작가가 제 목소리가 더 어울린다며 극본을 저희 회방루에 팔았습니다.”
“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더 물어보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없어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엽영교는 약란이 떠난 방향을 쳐다보더니 씩씩거렸다.
“저 여인인 것 같지? 우리가 이렇게 물어본 바람에 괜히 저 여인이 경계심을 품고 미리 대비하는 거 아냐.”
그러나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생각을 내비쳤다.
“전 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우선 사람을 구해 저 여인이 어떤 처지인지부터 제대로 알아본 다음 다시 이야기해요.”
엽영교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를 마신 후 엽연채와 엽영교, 여종들은 회방루에서 나왔다. 엽영교는 마음이 울적해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 곁에서 엽연채는 필사적으로 전생의 기억을 짜냈다.
전생에서 자신과 엽영교는 서로에게 경쟁심을 느껴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묘기화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자신이 장씨 가문으로 시집간 뒤 자신을 보러 와 준 친정 식구는 엽영교가 유일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걱정되는지 자신의 혼사에 대해서는 가뭄에 콩 나듯 언급할 뿐이었다.
그 후 묘기화는 실족사했고, 이 불운한 사고 때문에 엽학문은 엽영교의 외출을 금지했다.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이에 자신은 추길을 밖으로 보내 당시 상황을 알아보게 했고 추길은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그 묘씨 가문 부인께서 영교 아가씨가 묘 공자님께 요릿집에서 만나 식사를 하자고 약속해 놓고 그 약속을 깨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고 하신대요. 묘 부인은 이게 다 영교 아가씨 때문이라며 원망하신다고요. 혼례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괜히 약속을 잡아 만나려 했다고 말이죠. 그 며칠을 못 참아서 이렇게 됐다나 뭐라나! 그래서 기어코 영교 아가씨께 망문과부로 수절하라고 압박했대요.
제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요릿집에 가서 은화 열 냥을 주며 물어봤는데 별로 알아낸 건 없어요. 그곳 심부름꾼이 알려 준 거라곤 묘 공자 일행이 귀빈실에 있었다는 사실이랑 또 묘 공자와 술을 마신 사람이 두 명이라는 것뿐이에요.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은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였다고 해요.”
당시 엽연채는 몸이 안 좋아 머리가 어질어질한 바람에 추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추길이 그가 누구와 술을 마셨다고 이야기해 줬는데,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추길이 그 자리에 어떤 아가씨가 있었다고 언급했던 것뿐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누구였을까? 방금 봤던 약란 소저일까?’
“일단 집으로 가자.”
엽영교가 축 처진 모습으로 말했다.
엽연채와 엽영교는 함께 마차를 타고 정안후부로 돌아와 수화문에서 내렸다. 엽연채는 묘씨와 온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단 안녕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서차간으로 가 보니 묘씨가 침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묘씨는 그들을 보더니 고개를 들며 물었다.
“어떻게 됐느냐?”
“어머니, 뭐가 어떻게 됐냐는 말씀이세요?”
엽영교는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당연히 네 사촌 오라비 일을 말하는 게지.”
묘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연채가 오자마자 네가 끌고 밖으로 나갔으니, 이 일 말고 또 무슨 일이겠느냐?”
“그게…….”
엽영교는 묘씨가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해 고개를 푹 숙였다.
“할머니께서도 고모의 혼사를 걱정하고 계신 거죠?”
그때 엽연채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에 묘씨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제 자신은 엽영교가 묘기화의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딸이 또 제멋대로 굴며 묘기화를 도와 혼기를 늦추려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에 자리에 누우니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라고는 엽영교 하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의심이 사실이라면? 외동딸의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엽영교는 기쁜 얼굴로 수돈에 앉았다. 그녀는 묘씨에게 바짝 달라붙어서는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역시 절 제일 사랑하는 분은 어머니세요.”
“넌 어떻게 하루 온종일 말썽만 피우는 게냐.”
묘씨가 그녀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엽영교는 굴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제가 언제 말썽을 피웠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말썽이 절 찾아오는 거죠.”
“됐고, 이 일은 나한테 맡겨라.”
묘씨의 말에 엽연채는 미소를 지었고 엽영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엽연채가 묘씨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 그만 가 보거라!”
안녕당을 나온 엽연채는 호숫가 옆 취석翠石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사뿐사뿐 걸어 금세 영귀원에 도착했다. 낭하에 올라서는데 엽미채와 이야기를 나누는 온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네 큰오라버니를 보았느냐?”
엽연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발을 걷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귀비탑에 앉아 있는 온씨는 엽연채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야, 점심 먹고 나서 너희 집으로 간 줄 알았다.”
“고모와 밖에서 거리 구경을 했어요. 조금 있다가 다시 돌아올 건데 외출할 때 마차 두 대를 가져가기가 번거롭더라고요. 겸사겸사 할머니와 어머니께도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 이렇게 왔죠.”
엽연채는 걸어와 탑상 한쪽에 앉으며 물었다.
“방금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어요?”
온씨는 입을 살짝 오므렸다. 지난번 엽균이 온씨 가문으로 찾아와 엽승덕 고발을 취하하라고 자신을 설득한 후로 온씨는 한 번도 엽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났고 오늘 엽미채에게 그에 대해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엽미채는 쭈뼛쭈뼛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큰오라버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매를 얻어맞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
엽미채는 고심 끝에 웅얼거리며 말을 지어냈다.
“오라버니가 함께 수학하는 벗과 또 어디 놀러 갔나 봐요.”
그리 말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형님. 돌아오셨군요.”
엽연채의 낯빛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손씨가 계화 문양이 들어간 손수건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