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73화 (173/858)

제173화

묘씨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너 또 무슨 소란을 피우는 게냐?”

“기화 오라버니도 큰오라버니처럼 밖에 따로 여인을 둔 것 같다니까요. 전 그런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큰새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영문을 모르는 묘씨는 황당해하며 옥패를 쳐다봤다. 그러자 옥패는 이를 꽉 물더니 모든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한창 귀 기울이던 묘씨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끊었다.

“그러니까 넌 연극 때문에 네 사촌 오라비와 말다툼을 했고, 그러다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 아니냐?”

엽영교가 즉시 반박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에요. 제 생각이 그렇다니까요.”

“네 입으로 지금 네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잖니. 그러니 정말로 터무니없는 의심이라는 거다.”

이때, 엽학문이 침실에서 나와 그들 쪽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영교, 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게냐?”

그는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이쪽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듣고 참견하러 온 참이었다.

“너도 참 공연히 사람을 의심하는구나. 이런 사소한 일로 소란을 피우다니. 앞으론 연채와 가급적 어울리지 말거라. 그 애한테 나쁜 물이 들지 않았느냐!”

엽학문의 꾸짖음에 엽영교는 화도 나고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설명하기도 전에 엽학문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음 달에 혼례식이 있으니 준비나 제대로 하거라. 파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엽학문은 묘씨 가문과의 혼사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과거 묘씨 가문은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지만 재능이 걸출한 묘기화 덕분에 가문도 함께 빛을 보게 되었다. 더욱이 묘기화는 도성 3대 재자才子 중에서도 최고라 불릴 만큼 명망도 높았다. 이런 훌륭한 사윗감을 놓치고 싶을 리가 있는가.

* * *

엽연채와 두 여종은 길가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귀가했을 때는 이미 술시戌時(저녁 7시~9시)가 다 되어 있었다. 엽연채는 신발과 양말을 내팽개치고 나한상 위로 올라갔다.

“셋째 도련님.”

밖에서 혜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엽연채가 얼른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밤이슬을 맞은 주운환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주운환은 양말을 벗은 그녀의 하얀 맨발을 보고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엽연채도 그제야 상황을 인지하고는 입을 삐죽거리며 발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공자, 무슨 일로 오셨어요?”

“모레, 둘째 형님과 향시를 보러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 옷장에서 옷을 좀 찾아가려고 왔습니다.”

“이렇게 빨리요?”

엽연채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고향이 예주豫州라 꽤 멉니다. 왔다 갔다 하는데 열하루나 열이틀 정도는 걸리지요. 이번 향시는 중추절仲秋節(음력 팔월 보름, 우리나라의 추석과 비슷한 명절) 다음 날인 팔월 열엿새에 열리는데, 아흐레 동안 치러집니다. 그러니 지금 가서 적응해야 시간이 맞을 겁니다.”

주운환의 설명에 엽연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팔월 초에 출발하면 시간이 너무 촉박할 것이고, 고향에서의 생활에도 바로 적응할 수도 없으니 일찍이 가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주운환은 침실 쪽으로 걸어가 안을 휘둘러보았다. 벌써 자신의 침실에 못 들어온 지 한참이 되었다. 전에는 평범한 가자상架子床과 나무 탁자만 놓여 있었고, 그 탁자 위에는 빗과 거울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휑뎅그렁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느새 풍경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낡고 색이 바랬던, 용과 봉황 무늬가 조각된 가자상 위에는 이젠 소용돌이무늬가 들어간 고급 비단 휘장이 걸려 있었고, 침상 위에는 해당화를 수놓은 도톰한 진홍색 이불이 깔려 있었다. 창가에는 구름 문양으로 조각된 얇은 다리가 달린, 녹나무 나전螺鈿 화장대가 자리했는데, 그 위로는 화려한 구리거울과 정교한 화장함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쓸쓸하고 적막했던 방은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규방으로 완전히 변한 후였다. 그리고 엽연채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주운환은 마음이 들떠 좀처럼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이쪽에 있어요.”

이때 엽연채가 가까이 와 물건 위치를 알려 주었다.

화장대 옆에 붙박이장이 있는데, 엽연채는 앞쪽 두 개를 썼고 뒤쪽 작은 장에 주운환의 물건이 모두 들어 있었다. 주운환은 옷장을 열어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이게 가을옷을 보관한 옷장입니까?”

엽연채가 물었다.

“네.”

주운환이 답하며 상자를 여니 위쪽에 구김이 잔뜩 간 도포가 보였다. 바로 그가 찾는 옷이었다. 그는 뚜껑을 덮은 다음 상자를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 * *

이튿날 아침, 외출한 엽연채는 우선 천자각부터 찾아갔다. 복스럽게 생긴 상점 주인은 엽연채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부인, 어쩐 일로 또 오셨는지요?”

엽연채는 알아보기 쉬운 얼굴이라 상점 주인은 그녀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부군께서 내일 시험을 치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은화 열 냥을 더 드릴 테니 오늘 저녁까지 어떻게 안 될까요?”

엽연채의 부탁에 상점 주인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향시가 코앞이라 부인만 급하게 옷을 필요로 하시는 게 아니라서요. 벌써 다른 몇 분도 부인처럼 옷을 빨리 완성해 달라고 돈을 추가하고 가셨어요. 돈을 추가하시면 저희가 최대한 빨리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래도 전부 다 끝낼 수 있다고 장담은 못 드려요. 저녁 무렵에 가지러 오세요.”

엽연채는 알겠다고 대꾸하고 은화를 건넨 뒤 추씨 가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엽승강과 나씨, 엽미채가 함께 와 있었다. 그들은 온씨의 거처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엽연채가 오자 사람들은 짐을 마차에 실은 후 함께 정안후부로 출발했고 온사월은 추경과 추랑에게 온씨를 배웅하도록 했다.

* * *

정안후부로 돌아온 일행이 수화문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엽영교가 대나무 숲 아래에 놓인 돌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연채야.”

엽영교는 엽연채를 보자마자 곧바로 달려왔다. 온씨는 나씨 손에 이끌려 함께 걸어갔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문안으로 들어섰는데, 엽연채와 엽영교만 여전히 수화문 쪽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됐어요?”

엽연채가 물었다.

“내가… 어제 어머니한테 파혼 이야기를 꺼냈는데 씨알도 안 먹혔어.”

엽영교가 낙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두 분 다 동의하지 않으셨어.”

그러자 엽연채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어떡해요? 도둑을 잡을 때도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고모는 증거도 없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니 당연히 두 분도 동의하지 않으셨겠죠. 그저 말다툼 좀 했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게다가 아직 일을 제대로 알아본 것도 아닌데 고모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했어요.”

엽영교는 엽연채의 말을 수긍하며 속으로 후회했다. 자신은 성격이 급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단정해 버리니, 참을성이 영 부족한 편이었다.

“큰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어쩌면 정말로 오해일 수도 있어요.”

옥패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거들었으나 엽연채는 선을 그었다.

“나도 정말 오해였기를 바라! 하지만 그냥 오해이겠거니 덮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확인해 보지 않고 시집을 갔다가는 비참한 꼴이 될지도 몰라.”

엽영교는 이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어젯밤 내내 깊이 고심해 봤다. 전부 이쪽의 상상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이대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연채야, 이따 점심 먹고 다시 그 공연장으로 가 보자. 어제 그 심부름꾼의 태도를 보니 오라버니가 그곳에 자주 들르는 것 같더라.”

여기까지 정리한 후 두 사람은 그제야 수화문으로 들어서서 안녕당으로 향했다. 온씨는 이미 그곳에서 묘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엽연채는 엽영교와 함께 문을 나섰다. 그 연극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회방루는 요즘 매일같이 미시未時(오후 1시~3시)에 공연을 했다. 엽연채와 엽영교는 공연장 뒤뜰에 마차를 세워 둔 다음 회관으로 들어섰다.

“두 분, 자리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이때, 심부름꾼이 공손하게 다가서며 물었다.

“회관으로 하겠네.”

엽연채는 그리 답하며 심부름꾼에게 은화 두 냥을 쥐여 주더니 동남쪽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가 좋겠어.”

“그럼 저쪽으로 가시죠.”

심부름꾼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동남쪽에 놓인 조그만 팔선상 앞에 앉자 엽영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왜 귀빈실로 가지 않는 거야?”

“어쩌면 표숙이 오늘도 올지 모르잖아요. 여기서 어제 그 자리를 볼 수 있거든요. 봐요!”

엽연채는 아래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2층을 가리켰다. 엽영교는 순간 멍해졌다. 어제 그 귀빈실을 분명히 볼 수 있었고 더군다나 팔선상이 마침 기둥 쪽에 위치하고 있어 자신들의 몸을 숨기기에도 아주 용이했다.

“기다려 봐요.”

엽연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부름꾼은 과일과 간식거리를 상에 올렸고 엽연채는 엽영교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시가 다 되어 갈 즈음 묘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2층으로 올라갔다.

미시 정각이 되자 무대 위에서는 공연이 시작되었고,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묘기화는 귀빈실 난간에 기대어 앉아 무대 위의 화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구멍 나도록 주시하는 걸 보면 저 화단이 따로 만나는 여인인 걸까?”

엽영교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냉랭한 목소리로 뇌까리더니 눈동자를 휙 돌려 옥패를 쳐다보았다.

“가서 심부름꾼을 데려오너라.”

옥패는 이내 대답하고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심부름꾼이 걸어왔다.

“두 분, 무슨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무대 위의 저 화단은 누구냐?”

엽영교가 물었다.

“저 화단은 저희 공연장 간판 배우인 약란 소저입니다.”

심부름꾼이 곰살맞게 대답했다.

“좀 있다가 약란 소저를 이리로 데려올 수 있느냐? 직접 만나 보고 싶구나.”

엽영교는 그리 말하며 은화 열 냥의 가치를 지닌 조그만 말굽은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게… 죄송하지만 돈을 아무리 많이 주셔도 어렵습니다. 약란 소저는 손님들을 직접 만나지 않습니다.”

심부름꾼이 웃는 얼굴로 사과했다. 이에 엽영교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돈을 더 내놓았다.

“그럼 열 냥을 더 주마.”

“정말로 아니 되어서 그렇습니다.”

심부름꾼은 은화 스무 냥을 쳐다보며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곱실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사죄의 차원에서 두 분께 간식거리를 두 접시 더 드리겠습니다.”

심부름꾼은 그리 말한 뒤 돌아서서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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