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72화 (172/858)

제172화

극의 줄거리는 이러했다.

‘부용’이라는 이름의 무희는 집안이 가난해 어릴 때 무방舞坊(무희舞姬들이 일하던 곳)에 팔려 왔는데, 타고난 자태가 원체 뛰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무방을 대표하는 무희가 되었다. 무방에선 그녀를 데리고 여러 귀족들의 저택을 방문해 공연을 선보였는데, 특히 평남후부平南侯府에서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녀를 여러 번 저택으로 불렀다.

그런데 평남후부 세자는 금琴을 잘 타는 사내였다. 자연히 그의 금 연주에 맞춰 부용이 춤을 추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지기知己가 된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싹트더니 결국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남후부 세자에게는 이미 본처가 있었고 부용도 무방 주인의 덜떨어진 아들과 정혼을 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자구책을 찾아내려 애를 썼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끝내 사랑의 도피를 하기로 약속했다. 상편은 이렇게 번민 속에서 막을 내렸다.

하편에서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괴로움을 겪다가 결국 신분상의 문제와 도덕적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평남후부 세자에게는 가문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있기에 부용은 그를 위해 스스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서로에게 이별을 고하는 그날 밤, 두 사람은 혼례복을 입고 천지 신령에게 절을 올리며 하룻밤 동안 부부로 지낸다. 애달프고 비통한 이야기에 관객들은 모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엽연채는 이 극이 그녀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극작가의 기교는 아주 훌륭하다고 느꼈다. 대사와 노래가 극의 흐름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는데, 여기에 화단의 살짝 쉰 듯한 목소리가 더해져 작품의 애절한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엽연채는 혼례복인 봉관하피가 휘날리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감동에 빠졌다.

모든 관객이 숨을 죽인 채 연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엽연채 일행이 착석한 귀빈실 역시 고요했다. 오직 엽영교가 씨앗을 까먹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묘기화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연극 무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있었는데 엽영교 때문에 방해를 받자 미간을 찌푸렸다.

“영교야, 넌 이 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엽영교는 ‘풉’ 하고 웃으며 말했다.

“하편이 상편보다 별로예요. 그리고 저 남녀 주인공은 바보 같아요.”

그 말에 묘기화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넌 정말 어리석구나.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다.”

“제가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엽영교가 이맛살을 구기며 화난 목소리로 따졌다.

“보세요. 한 사람은 아내가 있고 또 한 사람은 정혼자가 있잖아요. 그럼 감정을 누르고 법도를 따라야죠. 어째서 남의 의심을 살 행동을 하는 거죠?”

“넌 생각이 트이지 않았구나.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라는 말도 모르는 게냐?”

묘기화의 대꾸에 엽연채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묘기화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병풍을 돌아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엽영교는 그의 순백색 뒷모습이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더니 놀라 자리를 떨치며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그러나 두어 걸음 가다가 더는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오더니 근심 어린 모습으로 탑상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며 운을 뗐다.

“연채야, 기화 오라버니도 큰오라버니처럼 밖에 여인이 있는 게 아닐까?”

엽연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엽영교에게 물었다.

“고모, 그런 느낌을 받은 거예요?”

엽영교는 고개를 들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오라버니가 계속 혼례식을 미루었잖아.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걸 어떻게 모르겠니. 하지만 별다른 생각을 하진 않았어. 그저 오라버니가 남녀 간의 정을 잘 모르고 온 마음을 곡을 쓰는 데 쏟아부었다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오늘 보니 내 생각에는…….”

거기까지 말을 꺼낸 엽영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시려고요?”

엽연채가 이리 묻자 엽영교는 아래층 무대에서 애통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배우들을 흘깃했다. 이에 묘기화의 방금 전 말과 행동이 다시 떠오른 엽영교는 콧방귀를 뀌더니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 혼사 물려야겠다.”

엽영교와 함께 외출한 옥패의 낯빛이 확 변했다.

“아가씨, 흥분하지 마세요. 연극이 뭐라고요. 괜히 공자님을 의심하시면 안 됩니다.”

엽영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엽연채에게 물었다.

“연채야, 네 생각은 어떠니?”

“‘열 채의 절을 부술지언정 한 사람의 혼인을 깨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죠. 그러나 고모는 상황이 복잡하니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큰아씨께서도 공자님을 의심하시는 거예요?”

옥패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반박했다.

“공자님과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며 함께 성장한 사이에요. 공자님은 여러 면에서 뛰어나시고 또 한 핏줄인 외삼촌의 아드님이십니다. 이건 인륜대사인 혼사이지 어린애들 장난이 아니에요. 주인마님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옥패야, 넌 내 여종이 맞는 게냐?”

엽영교가 싸늘한 목소리로 성을 냈다.

“내 말을 안 들을 거면 나도 널 더 이상 내 여종으로 쓰지 않겠다.”

“아가씨…….”

옥패는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전 그저 아가씨가 금방 화내시고 또 금방 풀리시는 분이니 순간의 충동으로 평생 후회할 일을 하실까 봐 걱정이 되어 그런 겁니다.”

“옥패 말도 일리가 있어요. 고모, 이 일은 천천히 신중하게 생각해 볼 일이지 충동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엽연채가 나서서 중재했다. 그러나 내심 엽영교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진작부터 엽영교와 묘기화의 관계를 탐탁지 않아 했다.

둘의 관계는 엽영교가 늘 묘기화에게 매달리고 그는 냉담하게 반응하는 그런 관계였다. 전에 엽연채는 묘기화의 성격 자체가 원래 쌀쌀맞아 그녀를 그리 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 묘기화가 엽영교에게 혼사를 늦춰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이유가 변경 지역으로 가 풍경을 감상하며 작곡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다른 일도 아닌 인륜지대사인 혼사였다. 그런데 그는 작곡을 혼사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순위를 이렇게 둔 사내에게 고모가 시집을 가면 얼마나 힘들어지겠는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걸 보니 적어도 그가 가정에 책임감을 가지리라는 기대는 품지 말아야 할 터였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참 얄궂어서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 봐야 고락苦樂을 느낄 수 있는 법이었다. 전에 엽영교가 자기 입으로 그의 이런 부분을 이해하겠다고 했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벌어진 이 일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심상찮은 낌새가 보여. 확실하게 조사해 봐야지.’

엽영교는 맥이 풀려 울적한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 무대에서 펼쳐지던 연극도 끝이 났다. 무방의 덜떨어진 아들에게 시집간 여주인공은 결국 신혼 첫날밤에 비애와 번민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고, 남주인공은 가문을 빛내며 살아가다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지만 죽을 때까지 여주인공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는 결말이었다. 아래층 관객들은 흐느껴 울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엽영교는 무대 위에 쓰러져 있는 혼례복을 입은 아리따운 화단을 흘깃 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가자!”

아래층으로 내려와 문밖으로 나오자 엽영교가 다시 입을 뗐다.

“내일 집안사람들이 큰새언니를 모셔올 거야. 연채 너도 올 거니?”

“네.”

“그럼 나 먼저 간다.”

엽영교는 미소를 짓더니 옥패와 함께 떠나갔다.

엽연채가 천자각 쪽으로 돌아가 마차에 오르자 추길이 말했다.

“요즘 정말 일이 끝도 없네요. 하나가 지나가면 또 다른 일이 생기니 원. 언제쯤 끝이 날까요?”

엽연채도 묘기화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연극 하나로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정말로 문제 있는 사람이라면…….

전생에 묘기화가 혼인 직전에 실족사했던 일이 다시 떠오르자 엽연채는 차라리 그 편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면 묘씨 가문에서 소란을 피울 거고 전생과 마찬가지로 엽영교에게 과부로 지내며 평생 수절하라고 압박할 것이다.

‘고모는 당연히 그러지 않겠다고 할 거고 그럼 묘씨 가문에선 죽자 사자 소란을 피우겠지. 결국 고모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질 거야…….’

* * *

엽영교가 집으로 돌아오자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서차간으로 향하니 묘씨는 전 마마와 함께 내일 온씨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균이 그 변변치 않은 녀석은 아직도 몸이 성치 않은 게지? 이 일을 큰애의 처가 알게 되면 속이 또 뒤집어질 테니 우선 그 녀석을 밖에서 지내게 하거라. 눈에 안 띄면 거슬릴 일도 없을 게다.”

묘씨의 분부에 전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내일 누구를 보낼까요?”

“둘째 내외는 소란을 피우고 싶어 안달이 난 것들이니 셋째 내외를 보내거라.”

묘씨가 대꾸할 때 밖에 걸린 방한용 문발이 걷어 올려지더니 밖에 서 있던 여종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묘씨는 엽영교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왔구나. 지금 밥상을 차리고 있단다.”

“어머니.”

엽영교는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하좌에 놓인 수돈에 앉았다.

“오늘 자수 상점에서 물건을 사다가 우연히 기화 오라버니를 만났어요.”

묘씨는 순간 벙찐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당부했다.

“다음 달 말에 혼례식을 올리니 넌 당분간 외출하지 말거라.”

그러나 엽영교는 예쁘장한 얼굴에 인상을 쓰며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우연히 또 연채를 만나 셋이서 함께 전통극을 보러 공연장으로 갔어요. 제 생각에는 기화 오라버니도 큰오라버니처럼 밖에 따로 여인이 있는 것 같아요.”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묘씨는 농담조로 딸을 나무랐다.

“망발이 아니에요.”

엽영교가 이를 꽉 물고 말했다.

“이 혼인… 안 할래요.”

“너 이 녀석! 내가 그건 안 된다고 하면 혼인을 미뤄 달라고 말하려는 게지? 미뤘다가 내년에 혼인하겠다고 하려는 게지?”

묘씨는 그리 말하며 그녀의 미간을 콩 쥐어박았다.

“또 혼인을 미루려고 꾀를 쓰는구나!”

엽영교는 말문이 막히고 기가 찰 따름이었다.

“아니라고요. 전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네 말 안 믿는다.”

묘씨가 콧방귀를 뀌자 엽영교는 눈시울을 붉혔다.

“전 지금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혼례식을 미루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정말로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요.”

묘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 딸에 대해서 잘 알았다. 표정을 보니 딸이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