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71화 (171/858)

제171화

마차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로를 일각쯤 달린 후 멈춰 섰다. 엽연채와 혜연이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드니 천수각의 편액이 시야에 들어왔다.

엽연채는 안으로 들어가 영수증을 꺼내며 주인을 찾았다. 상점 주인은 부티 나게 차려입은 사십 대 부인으로, 그녀는 영수증을 받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부인, 며칠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래도 몇 벌은 완성되지 않았어요? 사내 옷 중에서요.”

“옷은 완성됐지만 장식용 무늬와 단추 달기, 감침질 등이 덜 되었는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엽연채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주인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

“부인, 며칠만 더 기다리세요. 그때 칠월 스무날에 완성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제 며칠 안 남았습니다.”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혜연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나와 보니 추길은 천수각 문 앞에 서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저분 영교 아가씨 아니에요?”

엽연채가 추길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니 대각선 맞은편 자수 상점 옆에 과연 엽영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수홍색 장화妝花 배자 차림이었는데, 손에 조그만 자루를 들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상대방은 흑옥처럼 윤기가 나는 검은 머리칼에 호리호리하고 미끈한 뒤태를 뽐내고 있었다.

“고모와 표숙表叔이네!”

바람에 펄럭이는 흰옷 차림의 사내를 알아본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두 여종과 함께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제가 흰색 자수실을 좀 골라 봤어요. 옅은 녹색 단자緞子를 써서 향낭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 위에 흰색 연꽃을 수놓으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엽영교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럴 것 없다. 난 향낭을 차지 않거든. 고모님께나 더 만들어 드리렴. 그럼 난 먼저 가 보마.”

묘기화는 단박에 거절하고서는 발걸음을 떼려 했다. 엽영교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요?”

“전통극을 보러 간다.”

“어디 가서 보는데요?”

“말해도 넌 모른다. 회방루에 갈 거란다.”

“저도 갈래요.”

“가서 뭐 하려고. 넌 전통극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묘기화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리 말할 때였다.

“고모, 표숙.”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묘기화가 고개를 돌려보니 미소를 띤 엽연채가 앞에 서 있었다. 햇살에 비친 그녀의 조그만 얼굴은 맑은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탓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연채야.”

엽연채를 본 엽영교는 기뻐하며 얼른 다가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어쩐 일로 이곳에 온 거야?”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엽연채는 그리 대꾸하며 묘기화를 쳐다봤다.

“표숙, 회방루에 가서 전통극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제화부용>을 보러 가세요?”

그러자 묘기화가 어리둥절한 투로 물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당연히 알죠. 회방루는 이름이 알려진 곳이 아니었는데 그 전통극 때문에 유명해졌잖아요. 게다가 배우가 노래를 잘 불러 도성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죠. 방금 전 회방루에 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 전통극을 보러 가시나 보다.’ 하고 짐작했죠. 그런데 그 극은 공연한 지 꽤 되도록 계속 상편만 올린 걸로 아는데, 설마 하편이 나온 거예요?”

묘기화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 하편이 나왔단다. 나온 지 며칠 됐어.”

“그럼 저도 갈래요.”

엽연채는 돌아서서 엽영교에게도 권했다.

“이 전통극 정말 유명해요. 사내들도 감동해 눈물범벅이 될 정도거든요. 고모, 저희 같이 보러 가요.”

“와, 그렇게 대단해?”

엽연채의 말에 호기심이 한층 발동한 엽영교는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묘기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도 가도 되죠?”

묘기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그렇게 그들은 회방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회방루는 이곳에서 멀지 않아 걸어서 반각半刻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었다.

엽연채와 엽영교는 가는 동안 팔짱을 끼고 재잘거렸다.

“연채야, 큰새언니를 보러 여기 온 거지? 아침에 집에서 수를 놓고 있다가 전 마마와 셋째 새언니가 출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두 사람이 돌아오고 나서야 큰새언니를 보러 갔다는 걸 알게 됐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일 큰새언니를 집으로 모셔온다고 하더라.”

엽연채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엽영교는 몹시 분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큰오라버니는……. 도대체 그 외실이 무슨 수로 큰오라버니를 유혹했기에 저 모양 저 꼴로 홀린 건지 원. 여하튼 어떻게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있나 몰라. 오라버니는 평생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해. 나오면 또 역겨운 짓거리로 새언니에게 해를 입힐 테니까.”

엽연채는 그만 ‘풉’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그들은 이내 회방루 문 앞에 도착했다. 엽연채가 고개를 드니 3층 높이의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기와와 검은 기둥이 눈에 띄는 건물로, 대문 앞에는 ‘회방루’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외관 장식이 덕명반에는 못 미쳤다.

엽연채는 지난번 주운환과 함께 덕명반에 가서 전통극을 보던 기억이 떠오르자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제 부군도 여기 극을 제일 좋아하니 오늘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엽영교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기뻐하는 거니? 전통극을 보는 사내는…….”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제일 먼저 전통극을 보겠다고 한 사람이 묘기화라는 사실이 한발 늦게 떠오른 것이다.

엽영교의 눈에는 공연장에 자주 와서 전통극을 보는 사내들은 착실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연장에는 많은 게 없었으나 연극쟁이는 많았다. 그리고 이 연극쟁이들은 하나같이 사내 꾀어내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방금 전 엽연채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의 조카사위는 공연장에 늘 죽치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엽연채가 ‘오늘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르겠네요.’라는 말을 어찌 꺼냈을까.

“넌 철 좀 들어라!”

엽영교는 훈계조로 말하며 엽연채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아얏!”

엽연채는 작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엽영교에게 이마를 한 대 쥐어박혔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하마터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두 사람이 대문을 넘어서자 희곡사戲曲史로 장식된 커다란 벽이 보였고 이 벽을 돌아가니 회관이 나왔다. 회관 안에는 팔선상이 놓여 있는데 이미 모든 자리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고, 진지하게 극을 감상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커다란 무대 위에선 배우들의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때,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심부름꾼이 공손하게 다가서며 알은체했다.

“묘 공자님 아니십니까? 늘 앉으시는 곳으로 가실 거죠? 어서 이쪽으로 오시죠!”

엽영교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심부름꾼이 단박에 묘기화의 얼굴을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늘 앉으시는 곳’이라고도 말했다.

‘이럴 수가!’

알고 보니 묘기화도 공연장에 죽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엽영교는 심부름꾼을 따라가다가 무대 위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를 보며 엽연채에게 물었다.

“지금 무대에서 공연하는 게 네가 말한 그 극이니?”

엽연채가 무대를 보니 원로元老로 분장한 배우가 긴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욕을 하고 있었고 옆에 있는 사내 무사 역은 재주넘기를 하고 있었다.

엽연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그 극은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배우들이 울며불며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이런 호쾌한 장면이 어디 있었는가?

세 사람이 심부름꾼을 따라 위층에 올라가니 2층 귀빈실이 보였는데 구조는 덕명반과 비슷했다. 병풍으로 공간을 분리한 것이라 완벽하게 사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 귀빈실은 시야가 확 트이고 무대와 정면인 곳에 위치해 있어 무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귀빈실에는 복숭아꽃이 조각된 배나무로 만든 기다란 탑상榻牀과 권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또 기다란 탑상 앞에는 술주전자와 술잔이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묘기화는 정말로 이곳의 단골손님인 듯했다. 그가 분부하지 않아도 심부름꾼은 그가 뭘 시킬지 잘 아는 듯 아래로 내려가 술을 들고 왔다. 묘기화는 이내 탑상에 앉아 그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엽영교는 그의 정혼녀인지라 그의 옆자리에 앉기가 도리어 더 어려웠다. 그녀는 엽연채와 함께 권의에 앉아 묘기화에게 물었다.

“그 연극은 언제 시작해요?”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정각에 시작해.”

“오늘 공연하는 건 하편이에요?”

엽영교가 걱정스러운 투로 다시 물었다.

“내용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괜찮아요, 고모. 이 극은 연속으로 공연한다네요.”

엽연채는 기다란 탁자 위에 놓인 소책자를 집어 들며 엽영교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공연 제목이 주르륵 적힌 소책자 위쪽을 가리켰다.

“미시 정각에 상편을 공연하고 미시 중반에 하편을 공연한대요. 하편만 보고 싶은 사람은 미시 중반에 와서 보면 되는 거죠. 우린 일찍 왔으니 이 극 전부를 볼 수 있어요.”

그 말에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도 이 극을 제대로 보기는 처음이라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치며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다.

엽연채와 엽영교는 주전부리를 먹으며 아래층 무대에서 공연 중인 전통극을 감상했다. 극이 다 끝나 가고 있을 때 보기 시작한 탓에 좀처럼 줄거리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엽연채와 엽영교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무사 역의 배우가 원로 역의 배우에게 쫓기고 얻어맞으며 재주넘기를 하는데 그 모습이 배꼽을 잡을 만큼 우스웠다.

잠시 후, 두 배우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자 모든 배우들이 무대 위로 나와 다 함께 합창했다. 곧이어 붉은색 막이 천천히 내려와 무대 전체를 가렸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다.”

엽영교가 매화 무늬가 들어간 둥글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엽연채는 녹차 과자를 집어 들고 ‘와삭’ 소리를 내며 한 입 베어 물더니 아래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대 위에서 피리 연주가 전주로 들려오며 붉은색 막이 올라갔다. 이어 하얀빛을 띤 노란색 배자를 입은 화단이 무대로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엽연채와 엽영교는 집중해서 연극을 보았고, 반 시진쯤 감상하고 나니 이 극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남녀의 치정을 다룬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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