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그저 죽순 두 개를 뜯으러 왔던 건데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요!”
놀라워하던 추랑이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돌려 추경을 쳐다보았다.
“참나, 형님, 어떻게 그런 눈이 삔 사람이 다 있답니까? 그 사촌 매제… 그저께 보니 아주 기가 막히게 눈이 잘생겼던데 실제론 눈이 멀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쟤들이 한 이야기가 진짜는 아니겠죠?”
추경은 얼이 빠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추랑이 헤헤거리며 웃었다.
“형님은 연채의 미색에 홀딱 빠졌잖아요. 잘됐어요. 이제 형님에게 기회가 온 거예요! 근데 연채 얼굴이면 이혼을 한다고 해도 형님에겐 기회가 안 올 것 같은데요.”
“예끼, 이 고약한 놈!”
추경이 그를 툭 치며 소리쳤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흠, 네 말이 맞다.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거라.”
“형님은 절 반편이로 아십니까?”
추랑이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밖으로 말이 새 나가 다른 사람이 채어 가면 어떡합니까? 형님은 스무 해 동안 혼자 지내셨으니 이젠 그 생활에서 벗어나야죠. 전 절대로 밖에다 말하고 다니지 않을 겁니다.”
“그래, 알겠으니 가자!”
추경의 말에 추랑은 그를 따라 경쾌한 발걸음으로 화원을 질렀다. 추경의 발걸음 역시 가벼웠다. 자신은 사실 엽연채를 진작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십 년 전, 어머니를 따라 처음 도성으로 와 친척집을 방문했을 때 이쪽은 열 살이었고 엽연채는 겨우 다섯 살 꼬마였다. 자신은 귀엽고 예쁜 그 꼬마를 품에 안고 내려놓을 생각을 안 했고, 결국 떠날 때 몰래 그녀를 품에 안고 배에 올랐다가 어머니한테 들켜 몇 대나 두들겨 맞은 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돌려보내야 했다.
그 후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열다섯이 된 추랑은 여전히 엽연채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머니에게 혼사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엽연채가 대리시경의 적장손과 정혼했다는 소식이었다.
정혼자는 권세를 쥔 관리 집안의 자제일 뿐만 아니라 소년수재라 불릴 만큼 재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어딜 봐도 자신은 그의 상대가 안 되니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도성에 와서 다시 그녀를 보니 또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 그의 어깨목마를 타고 과일을 따 먹던 귀여운 꼬마는 이제 늘씬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해 있었다.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으나 이미 한 사내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추경은 실의에 빠졌지만 진심으로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엽연채가 그 고귀한 사내에게 시집을 간 게 아니라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가 보잘것없는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니 슬픔과 근심에 잠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잘 살기를 조용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엽연채와 그 사람은 진짜 부부가 아니며 헤어질 계획이라고 한다. 추경의 마음속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기필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연채를 많이 예뻐하시니 그 아이가 이혼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추랑이 헤실거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셋째야, 이 이야기는 일단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말거라.”
추경은 정색하며 신신당부했다.
“어찌 됐든 간에 연채는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머니께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어머니가 언짢아하실 수도 있다. 알겠느냐?”
“알겠어요, 형님. 이건 우리끼리 비밀로 할게요.”
추랑은 그리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이에 추경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동생은 진지하지 못한 듯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믿음직스러운 성정이었다.
“그런데 연채가 형님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그러니 많이 노력해야 될 거예요!”
추랑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추경을 응원했다.
화원을 나온 추경과 추랑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어멈이 커다란 죽순을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점심에는 죽순을 볶아 먹으면 되겠네요.”
“내가 볶을게요!”
추경이 말했다.
“둘째 공자님이 한동안 주방에 안 들어오셨죠. 오늘 이모님과 사촌 여동생이 계시니 공자님이 만든 요리를 맛보여 드리세요.”
주방 어멈이 미소를 지으며 이리 대꾸했다. 추경의 눈매에 웃음기가 어리더니 그는 이내 죽순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주방 어멈은 조수 역할을 하고 추경이 주도적으로 요리를 만들었다.
한 시진 정도 바쁘게 움직이니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쯤 요리가 완성되었다. 주방 어멈은 얼른 여종들을 시켜 음식을 하나하나 찬합에 담게 한 다음 큰방으로 들고 가게 했다.
추경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큰방으로 와 보니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고 밥상도 차려져 있었다. 온씨 모녀까지 함께 자리하니 머릿수는 총 일곱이었는데, 일가친척이므로 상을 차릴 때 남녀의 자리를 따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온사월은 상에 차려진 가정식이 주방 어멈이 만들어 주던 것과는 다름을 알아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경이가 요리를 했나 보구나?”
추경이 그렇노라 대꾸하며 그녀 옆에 앉았다.
엽연채와 온씨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엽연채는 상에 차려진 여덟 가지 음식을 살펴보고 있었다.
죽순초육사竹筍炒肉絲(죽순을 고기, 목이버섯 등과 함께 채 썰어 볶은 요리), 청증어清蒸魚(생선찜), 탕수갈비糖醋排骨, 청반압사清拌鸭丝, 홍조증계紅棗蒸鷄(붉은 대추 등을 넣은 찜닭), 십금투장什锦套腸(돼지 곱창을 볶은 후 갖가지 양념으로 졸인 요리), 소청채炒靑菜(청경채 볶음), 죽순이 들어간 산약배골탕이 차려져 있었다. 전부 가정식이었지만 색, 향, 맛을 모두 갖춰 요릿집에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솜씨였다.
온씨도 음식을 훑더니 조카를 칭찬했다.
“경이가 정말 대단하구나. 요리도 할 줄 알고 말이다.”
그리 말하고는 온사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큰언니도 참. 다른 사람들은 아들에게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닦으라 하는데 언니는 밥하는 법을 가르쳤네요.”
그러자 온사월이 ‘아이고’ 소리를 냈다.
“나도 학문을 익히라고 했는데 안 하더라고. 평소에 술을 빚더니 밥 짓는 법도 배우려고 하더라. 술 빚는 데 도움이 된다며 말이다.”
“좋은 생각이네요.”
엽연채가 추경의 편을 들었다.
“술을 빚는 것도 음식을 만드는 거잖아요. 술은 대부분 곡물, 과일 등을 발효시켜 만드는 것이니 음식과 관련이 있죠. 둘째 오라버니는 요리를 배웠으니 음식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어 술을 빚는 데도 분명 도움이 됐을 겁니다.”
엽연채를 쳐다보는 추경의 눈빛은 더욱 반짝거렸다.
“연채만 절 이해해 주네요.”
그 말에 엽연채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손을 내밀어 죽순 하나를 집어 들고 살짝 베어 물었다.
“맛있어?”
추경이 물었다.
“맛있어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이는 술을 안 빚으면 요리사를 해도 되겠어.”
온씨는 입이 마르도록 그를 연거푸 칭찬했다.
“언니, 뉘 집 딸이 경이에게 시집을 갈지 모르겠지만 정말 크나큰 복을 받았어요.”
추경은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러나 온사월은 쓴웃음을 짓더니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오 년 전에 경이에게 혼처를 구해 줬는데, 글쎄 이 녀석이 하나같이 다 싫다고 퇴짜를 놓더라고. 사우야, 네가 도성에 참한 규수가 있는지 알아봐 다리 좀 놓아 주렴.”
온씨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겠다고 약속하려는데 추경이 급히 뜯어말렸다.
“이모,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전 지금 새 술을 개량하고 있어 일이년 정도 더 있다 알아봐도 됩니다.”
“봐라, 이렇다니까.”
온사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매번 술을 빚어야 한다고 핑계를 댄다니까.”
“언니, 경이가 열심히 하는 모양인데 좋은 술을 만들어 냈어요?”
“송무주가 바로 경이가 빚은 술이야.”
온사월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온씨에게 대꾸했다.
“경이가 송무주를 만들어 내지 못했으면 우리 추씨 가문은 아직 일어서지 못했을 거야.”
그 말에 온씨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추씨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큰외조카가 경영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둘째 외조카가 만들어 낸 새 술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때 온사월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비쳤다. 그동안 둘째 아들의 혼사를 서두르지 않았던 건 추씨 가문이 새 술을 필요로 했는데 마침 둘째가 주조酒造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일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러다 보니 혼사는 스무 살인 지금까지도 뒷전이 된 것이었다. 다른 또래 사내들에게는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아이도 있는데 자신의 아들에게는 정혼녀조차 없었다.
“이 송무주가 정말 좋더라고요. 다음 날 깼을 때 숙취가 있어도 머리는 안 아프고 그냥 살짝 어지러운 정도였어요. 둘째 오라버니, 정주定州로 돌아가면 몇 단지만 더 보내 주세요.”
추경은 간곡히 부탁하는 엽연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흔쾌히 응했다.
“그러마.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온씨, 온사월과 작별 인사를 한 뒤 그곳을 떠났다. 경인이 모는 마차가 작은 골목을 나와 대명가大明街로 들어서자 엽연채가 발을 걷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동대가로 돌아가자꾸나. 천자각天姿閣에 가서 지난번에 보낸 옷감으로 옷을 다 만들었는지 물어봐야겠어.”
칠월 초에 엽연채는 자신과 주운환의 몸 치수를 잰 다음 치수와 옷감을 옷 만드는 상점 천자각으로 보냈다.
“알겠습니다!”
경인이 냉큼 방향을 바꾸었으나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말렸다.
“아가씨, 벌써 완성됐을 리가 없어요. 그때 보낼 때가 칠월 초사흗날 아니면 초나흗날이었던 거 같은데 이제 칠월 열엿새잖아요. 그리고 날씨도 추워지니 옷을 지으려는 사람들도 많고요. 천자각은 장사도 잘되니 아직 다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저희가 치수와 옷감을 보낼 때 상점 주인이 칠월 스무날은 되어야 완성된다고 했고요.”
엽연채는 내심 실망했다. 요즘 날씨가 적잖이 쌀쌀해져 자신은 외출할 때 배자를 하나 더 걸쳤는데, 주운환은 여전히 그 오래된 옷 두 벌만 입고 다녔다. 게다가 너무 얇은 옷이라 추워 보였다.
“그래도 일단 가 보자꾸나!”
그러더니 엽연채는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참, 천자각 맞은편에 책방이 있었지? 가는 김에 화본도 좀 골라야겠어.”
엽연채는 조앵기를 떠올렸다. 그녀도 자신처럼 화본 읽기를 좋아하니 재미있는 걸로 몇 권 골라 다음에 선물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