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69화 (169/858)

제169화

그러나 질문을 던지자마자 엽연채는 자신이 너무 무례했다고 후회했다. ‘이렇게 물어봐서는 안 됐는데.’ 하는 마음에 급히 수습하려 할 때 주운환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뗐다.

“제가 한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전 이분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좋다 싫다 말할 게 없지요. 어린 시절 슬프거나 눈물이 날 땐 이분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생각해 봐도 아무 느낌도 없지요.”

그가 제수 용품을 하나하나 올리자 엽연채는 얼른 향을 피웠다. 부부가 지전을 태우는 것으로 제사는 끝이 났고 두 사람은 바구니를 들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던 도중 엽연채는 고개를 돌려 쓸쓸해 보이는 봉분과 저렴해 보이는 야생화 화환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그곳에 화환을 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 순간, 운 이낭의 신분이 떠올랐다. 그녀가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면 함께 일했던 기녀이거나 아니면… 설마 생전에 서로 사모했던 손님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엽연채는 더 이상 그 사람이 누구일지 알고 싶지 않아졌다. 주운환이 흥미 없어 할 만도 했다. 자신의 생모와 감정을 나눴던 기루 손님이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 *

중원절이 지난 후, 허서는 바로 행장을 꾸린 다음 위자와 진 마마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 상주에 돌아가 시험 막바지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엽학문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송화 골목으로 몰래 유이를 보내 허서에게 보신용 식품과 은화를 전달했다.

허서가 탄 마차가 송화 골목을 빠져나왔다. 마차는 큰길을 통해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 송화 골목 맞은편에는 요릿집이 하나 있는데, 길가에 인접한 2층 귀빈실 창문에서 엽학문이 점점 멀어져 가는 허서의 마차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이윽고 마차는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으나 엽학문은 여전히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리, 그리 아쉬워하실 것 없습니다. 저분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다시 돌아오시면 언제든 만나실 수 있습니다.”

유이의 말에 엽학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 아이가 바로 자신의 귀한 손자였다. 글공부에 재주가 있어 곧 과거 시험을 치를 터였다. 그래서 다음 달 향시에 합격하고 내년 춘시에서 진사가 되면, 거기다 만약 성적이 좋아 삼갑三甲(전시殿試에서 성적에 따라 진사를 세 등급인 일갑一甲, 이갑二甲, 삼갑三甲으로 나눈 것) 안에 들어가면 기를 쭉 펴고 다니며 가문을 빛낼 것이었다.

엽학문은 차를 다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갔다. 안녕당으로 돌아오니 묘씨와 나씨가 서차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 모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소?”

엽학문이 묻자 묘씨가 입을 열었다.

“나리, 큰며느리 일을 상의하고 있었습니다. 얼굴도 못 봤는데 사이가 틀어져 버렸으니 그냥 이리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엽학문은 언짢은 얼굴로 툭 내뱉었다.

“그 막돼먹은 것이 사소한 일을 붙잡고 늘어져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았소. 전체를 볼 줄 모르고! 안 돌아오면 그냥 그러라고 내버려 두시오.”

“지금 저희 꼴이 어떻게 됐습니까?”

묘씨의 살짝 뾰족한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 집안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신 겁니까? 큰애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며느리는 친정집과 큰언니 집을 전전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저희 가문을 더욱 조롱할 겁니다.”

그 말에 엽학문의 낯빛 역시 어두워졌다. 이 일로 정안후부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린 후였다.

“어서 큰아가를 집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해서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해요. 팔월 말에 영교가 출가하는데 집안 꼴이 이렇게 우스워서야 되겠습니까?”

엽학문은 가타부타 말없이 콧방귀를 뀌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중원절이 지나자 날씨는 더욱 쌀쌀해졌다. 푸른 덮개가 달린 조그만 마차가 인파로 북적이는 장명가長明街를 지나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이어 사진원四進院식 저택의 동쪽 측문으로 향했다.

마차가 수화문에 도착하자 엽연채와 혜연, 추길이 마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정원이 나왔는데, 그곳에서 일찌감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나이 든 마마媽媽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오셨군요. 이모님은 서쪽 곁채에 계십니다.”

엽연채의 모친과 외조모는 현재 이곳의 서쪽 곁채에서 지내고 있었다.

잠시 후, 노마마의 안내를 받아 낭하를 걸어가던 엽연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일이 너무 많아 이제야 짬을 내 큰마님을 뵈러 왔습니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방 안으로 들어서자 온씨와 온사월이 침상에 앉아 있고 양쪽 하좌에 나씨와 전 마마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 연채 아가씨가 오셨군요.”

전 마마는 엽연채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이네요.”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답례했고, 이어서 나씨를 쳐다보며 인사했다.

“숙모, 오셨어요.”

“사실 큰아가씨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었는데 집안일 때문에 가 봐야 해요.”

전 마마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온씨를 쳐다봤다.

“그럼 말씀을 전해 드렸으니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어서 돌아가 보시게!”

온씨의 인사에 전 마마와 나씨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뒤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자 엽연채가 물었다.

“무슨 말을 전하러 온 거예요?”

“무슨 일이겠습니까? 마님을 집으로 모셔가겠다는 거죠.”

채 마마의 대답에 엽연채는 눈을 크게 뜨고 온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돌아가시려고요?”

“집을 나오고 시간이 꽤 흘렀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지.”

온씨가 옅은 한숨을 쉬며 이리 말하자 채 마마도 동조했다.

“지금 세자야도 감옥에서 형을 받고 계시고 또 마님을 모시러 사람들이 왔으니 안 돌아갈 수는 없죠.”

“채 마마. 지금 할아버지조차 그 외실 편을 들고 계시는데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면 잘 지내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엽연채가 싸늘한 목소리로 반대하자 채 마마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걸요. 세자야가 잘못을 범하시긴 했으나 벌도 받고 계시고요. 마님께서 돌아가지 않으면 뭘 어떡하겠어요?”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온씨 하좌의 수돈에 앉았다.

“연채야.”

온씨가 엽연채의 손을 잡자마자 엽연채는 본심을 내뱉었다.

“어머니, 엽승덕과 더는 못 살겠으면… 차라리 헤어지세요.”

“네?”

“연채야…….”

채 마마가 엽연채를 쳐다보며 놀라 되물었고 온씨도 얼빠진 사람처럼 멍해졌다. 딸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헤어지라니?

“연채야, 그 이야기를 왜 또 꺼내는 게냐?”

곁에 있던 온사월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녀도 여동생의 처지를 보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헤어지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요 맹추야.”

온씨는 작게 한숨을 쉬며 엽연채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내가 이혼하면 넌 어쩌려고 그러니? 넌 지금도 충분히 힘든 생활을 하고 있고 네 시어머니도 널 미워하는데 내가 이혼하면 널 더 얕잡아 볼 게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온사월도 온씨를 따라 엽연채의 미간 부분을 콩 쥐어박았고 두 사람에게 연달아 맞은 엽연채는 ‘아얏’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하하.”

온씨는 그 모습을 보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이혼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아들에게도 기대지 못하는 상황인데, 정말로 이혼하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딸이 주는 돈으로 생활하라는 말인가? 그럼 주씨 가문에서 분명 불만스러워할 거고, 이로 인해 딸의 부부 사이와 고부 관계는 틀어지게 될 테니 그리되게 할 수는 없다.

“셋째 마님께서 모레 모시러 온다고 하셨으니 서둘러 짐을 꾸리겠습니다!”

상전들의 대화가 잠시 일단락된 틈을 타 채 마마가 이리 고했다.

“연채, 너는 밖에 나가서 놀고 있거라.”

온씨는 엽연채를 밖으로 내보냈다.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혜연, 추길을 데리고 뒤쪽 화원으로 가 그곳을 거닐며 시간을 죽였다. 작은 뜰 오른쪽에 위치한 이 화원에는 조그마한 연못과 석가산이 있는데 그 주위로 대나무와 다양한 화초가 자라나 있어 아주 싱그러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계절이 계절인지라 연꽃은 꽃잎이 이미 시들어 떨어졌고 연밥이 든 회색 열매만 남아 있었으며, 수면 위론 누르스름하게 변한 대나무 잎도 둥둥 떠 다녔다.

“아가씨, 마님께 헤어지라고 하셨잖아요.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씀하신 거예요?”

혜연의 물음에 추길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럼!”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했다.

“아직 때가 아닐 뿐이다.”

은정랑과 허서가 점점 더 자신들을 미워하고 있으니 먼저 이들부터 해결해야 한다. 엽연채는 대나무 가지를 하나 꺾어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내가 조그만 집을 하나 사서 어머니께 드릴 거란다. 그리고 나도 이혼하고 나면 어머니와 그곳에서 함께 지낼 거란다.”

“하지만 그리되면 아가씨는 재가하시기 더 힘들 거예요.”

추길의 염려에 엽연채의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쓸쓸함이 어렸다.

“뭣 하러 재가를 한단 말이냐? 어머니와 함께 잘 살면 되지. 정 적적하면 아이도 하나 데려다 키우면 되고 말이다.”

“시집을 왜 안 가세요?”

추길이 애가 타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아가씨는 용모도 아름답고 순결한 몸이니 마음만 먹으면 시집갈 데 없겠습니까?”

“으,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자.”

엽연채는 대화에 흥미를 잃고 돌아서서 화원 밖으로 걸어갔다.

혜연과 추길은 대나무 아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추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게 다 셋째 공자님 때문이야. 아가씨는 공자님과 부부로 지내려고 하는데 공자님이 원하지 않는 거잖아. 완전 자기 위주로만 생각해! 그러니 아가씨가 이젠 혼인할 마음도 없는 거잖아. 돌아가서 따귀를 올려붙어야겠어.”

“따귀를 올려붙였다가는 아가씨께서 정말 화내실 거야!”

혜연이 그녀를 쏘아보며 경고했다.

“솔직히 이 일은 공자를 탓할 일이 아니잖아. 아가씨와 공자 모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함께하게 된 거니까. 한 해쯤 지나고 나면 속상하고 번거로운 일은 줄어들 테니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너희 둘 대나무 아래 뿌리라도 내렸어? 죽순이라도 되려고?”

어느새 화원 입구에 도착한 엽연채가 입을 삐죽거리며 그들을 불렀다.

“지금 가요!”

혜연은 추길을 잡아끌고 얼른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세 사람이 화원 밖으로 나가자 대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나왔는데 그중 한 명은 커다란 죽순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 둘은 추경과 추랑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