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68화 (168/858)

제168화

한편 태자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엽연채가 하는 이야기만 들었다. 엽연채는 태자비에게 허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고했고, 게다가 결과 또한 허서의 패배였으니 태자비의 마음속에 허서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와 달리 태자는 자신이 허서를 칭찬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엽연채와 태자비가 한입으로 허서를 멍청하다고 욕하니 태자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흥이 깨져 버린 그는 차를 몇 모금 더 마시더니 이내 자리를 떠났다.

태자의 뒤를 쫓아가던 이계는 그의 기분이 언짢아 보이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전하, 그저 여인들의 소견일…….”

태자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계를 쏘아보자 그의 얼굴은 단박에 굳어졌다.

태자는 곧장 서재로 향했는데 스물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서재 문 앞에 서 있었다. 태자가 가장 신임하는 모사인 송초였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일어나거라!”

태자가 손짓으로 예를 면하도록 했다. 그러곤 잠시 생각하다가 송초를 쳐다보며 운을 뗐다.

“내 너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그는 이리 말하며 서재 안으로 들어갔고, 송초도 얼른 뒤를 따르며 공손히 대답했다.

“전하, 말씀하시옵소서.”

태자는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허서의 일을 너도 알고 있으렷다.”

“예, 전하.”

뒤를 쫓아온 송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허서가 처음 도움을 청했을 때 태자는 그를 상대하기 귀찮아 송초에게 그를 만나게 했다. 허서는 자신의 고충을 송초에게 털어놓으며 추씨 가문을 날려 버릴 계책도 함께 알려 주었다. 송초는 그 이야기를 태자에게 전했고, 이에 태자는 허서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직접 그를 만났던 것이다.

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허서가 어리석으냐?”

그 말에 송초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는 사실 허서와 자신의 일 처리 방식이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태자가 그자를 칭찬하는 걸 보고는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험담을 했다간 자신이 속 좁은 사람으로 비칠까 봐 꾹 참았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 태자의 말에서 그를 꺼려하는 듯한 느낌이 들자 그는 얼른 동조했다.

“예, 확실히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 말에 기분이 확 상한 태자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송초는 공수하며 대답했다.

“전하, 그쪽에서… 또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진 태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힐난했다.

“정말 찰거머리처럼 아무리 떼어 내도 나가떨어지지를 않는구나! 에잇, 역겨운 것!”

그는 분을 못 참고 한쪽에 놓인 찻상을 쾅쾅 내리쳤다. 이계는 몸을 굽힌 채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잠시 후 송초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뗐다.

“전하, 그럼 어떻게…….”

“이런 일마저 내가 방도를 강구해야 하면 너희들은 대체 왜 있는 것이냐?”

태자는 지난번 송초와 다른 이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러자 송초는 얼른 인사를 올리고 물러갔다.

그 후 곁에서 시중을 들던 이계는 뜨거운 물을 가져와 차를 따르는 틈을 타 자리를 잠시 비웠다. 그는 나이 어린 환관을 찾아가 허서에게 보낼 야생 산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두었다.

어제 이계는 태자가 허서를 자신의 사람으로 삼으려 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허서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그에게 줄 산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태자는 더 이상 허서를 원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인삼을 보내서 뭐 하겠는가.

한편, 태자가 떠나자 태자비는 엽연채의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차 한 잔을 마신 후 점심이 되기도 전에 엽연채와 주묘서를 돌려보냈다.

* * *

중원절이 하루밖에 남지 않아 가가호호 중원절 준비로 정신이 없는데 궁명헌에선 역정을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도둑고양이가 온종일 물건을 훔쳐 가네!”

추길은 고양이를 쫓아가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엽연채가 기르는 고양이는 구덩이를 파고 물건을 숨기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특히 번쩍거리며 빛을 발하는 물건들을 족족 물어다가 곳곳에 숨겨 놓곤 했다. 그런데도 엽연채는 화를 내기는커녕 고양이를 아주 예뻐하며 자주 놀아 주었다.

“그만 놀고 이리 오너라!”

엽연채는 녀석을 부르며 바닥에 조그만 쥐포를 던져 주었다. 고양이는 그 소리를 듣고 쏜살같이 달려와 쥐포를 뜯어 먹었다.

그 모습에 추길과 혜연은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내 추길이 목청을 높였다.

“허구한 날 여기저기 오줌이나 갈기고 물건을 숨겨요. 그러니까 장씨 가문 사람들이 하나같이 저놈을 두들겨 패려고 했겠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혜연도 맞잡으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저놈을 며칠 가둬 놓고 교육한 다음 다시 풀어 주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야!”

추길이 대번에 동조하며 눈을 반짝이는데도 엽연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희가 돌보기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마.”

추길과 혜연은 별수 없이 입을 삐죽거렸다. 엽연채가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그들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녜요, 저희가 돌볼 수 있어요.”

“그래, 알겠다.”

엽연채는 빙그레 웃더니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갔고, 추길과 혜연은 고양이가 정원에 파 놓은 구멍을 분주히 메웠다.

“추길아.”

이때, 녹엽이 걸어오며 추길을 불렀다.

“마님께서 셋째 마님을 부르셔.”

“아, 알겠어.”

추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마님께서 부르셔요.”

엽연채는 화본을 내려놓고 추길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일상원에 도착하니 진씨가 주학해를 안고 강심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하좌에는 비 이낭이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웬일로 백 이낭이 아니라 비 이낭이 진씨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 무슨 꿍꿍이수작인 걸까?’

“어머님.”

엽연채는 안으로 걸어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그래. 내일이 중원절이다. 집안에는 법도가 있지만 그래도 우린 인정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셋째를 낳아 준 이낭이… 멀지 않은 곳에 묻혀 있다. 내일 너희 부부가 찾아가 옷가지와 지전紙錢을 태워 주고 오너라.”

그리 말하는 진씨의 눈에는 멸시가 담겨 있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 이낭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맞습니다! 마님 말씀이 맞아요. 운 이낭은 가엽게도 세상을 너무 일찍 떴죠. 법도에 따르면 셋째 부인께서는 이낭의 며느리가 아니고, 그네는 출신도 그 모양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셋째 도련님을 낳은 사람이죠. 부인, 도련님과 함께 가서 명복을 빌어 주고 오셔요.”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을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어머님.”

“그래, 그럼 나가 보거라!”

진씨가 그들을 물리자 엽연채와 추길은 바로 밖으로 나왔다. 일상원 대문을 넘어서자 추길이 냉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가문에선 엄격한 법도를 내세우며 서자와 이낭 사이에 선을 분명하게 긋는데 이곳 주씨 가문은 정반대로 행동하네요. 매번 이걸 들먹이잖아요. 특히 그 비 이낭이 그래요. 셋째 공자님을 낳아 준 이낭의 출신을 비웃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오늘 일도 분명 비 이낭이 꾸민 짓일 겁니다.”

말을 마친 추길은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가 정말로 셋째 공자에게 시집을 간 게 아니니, 셋째 공자 친모의 신분 때문에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 것이었다. 셋째 공자와 헤어지고 나면 아가씨는 얼굴도 예쁘고 순결한 몸이니 더 좋은 곳에 시집갈 수 있을 터였다.

서과원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궁명헌이 아니라 난죽거로 향했다. 서책을 읽던 주운환은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공자님, 방금 전에 어머님께서 절 부르셨어요. 내일이 중원절이니 공자님과 함께 운 이낭을 찾아가 지전을 태우고 오라고 하셨어요.”

엽연채가 말을 전하자 주운환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에도 매년 갔다 왔어요?”

“전에는 안 갔습니다. 매년 기일에만 한 번씩 갔었죠.”

엽연채는 더욱 분명히 사정을 알게 되었다. 전에 진씨와 다른 사람들은 주운환을 상대하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그런 사람들이 주운환에게 중원절이니 친모의 무덤에 다녀오라고 했을 리가 없었다. 주운환이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나서야 이 일을 신경 쓰기 시작한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주운환의 흠을 들추어내는 것이었다.

“같이 가려고요?”

주운환이 갑자기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가야지요.”

엽연채는 자신이 한시적으로 그의 아내 역할을 맡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내는 아내이니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운환은 잠시 멍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주운환과 함께 문을 나섰다.

운 이낭은 첩실이기 때문에 주씨 가문 선영先塋(조상의 무덤)에 함께 묻힐 수 없었다. 보통 정식으로 신분을 부여받은 첩실들은 선영 근처에 마련해 둔 땅에 매장된다. 그러나 주운환을 낳아 준 이낭은 그곳에도 묻히지 못하고 도성 근교의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매장되었다.

두 사람은 들판에 서 있는 한 나무 아래에 마차를 세웠다. 여양과 혜연은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엽연채와 주운환은 제수용 물품을 담은 바구니와 옷가지, 지전을 들고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 가을이라 잡초가 많았지만 대부분 시들어 있어 발목에도 닿지 않았다.

엽연채가 주운환과 함께 다가가자 황량한 들판 위에 만들어진 조그만 봉분이 저 멀리 보였다. 그 위로 나무로 만든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비석에는 간단히 ‘운씨의 묘’라고 적혀 있었다.

가져온 것들을 내려놓으려던 엽연채는 어리둥절해졌다. 나무로 만든 비석 아래에 화환이 놓여 있었다. 아주 평범한, 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야생화로 만든 간단한 화환이었다. 주운환도 붉은색, 분홍색, 노란색, 흰색 꽃이 섞인 화환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는 눈치였다.

“셋째 공자, 이건 누가 가져다 둔 거예요?”

엽연채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매년 기일에 이곳에 와 보면 이런 화환이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중원절에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청명절淸明節(음력 4월 5일경)이나 중양절重陽節(음력 9월 9일)에도 가져다 뒀던 것일까요?”

주운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이는 그를 보며 물었다.

“셋째 공자께서는 운 이낭을 싫어하시나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