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67화 (167/858)

제167화

주묘서는 동쪽 수화문 밖 대추나무 아래, 돌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 있던 주묘서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작은 새언니, 왜 이렇게 늦었…….”

주묘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엽연채는 몸에 딱 달라붙는 대금식 유군을 입고 있었는데, 새하얀 얇은 상의 아래로 비치는 암홍색 속옷이며 분홍색과 진홍색을 섞어 놓은 치맛자락의 오밀조밀한 해당화 자수가 시선을 끌었다. 엽연채가 사뿐사뿐 걸음을 뗄 때마다 잘록하고 가느다란 허리의 보금步禁이 달랑거렸고 수홍색 얇은 비단 피백披帛이 휘날렸다.

주묘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입은 옷을 살폈다. 자신도 오늘 대금식 유군을 입었는데 하필 색깔도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자신은 엽연채만큼 아름답고 맵시 있어 보이지 않았다.

주묘서가 어두운 낯빛으로 물었다.

“새언니, 왜 저랑 같은 옷을 입었어요?”

“안 같은데요.”

엽연채가 그녀를 훑어보니 형태만 흡사한 것이었다. 게다가 애당초 대금식 유군이라는 게 다 이런 형태이지 않은가. 자신은 새하얀 상의를 입고 있는데 주묘서는 옅은 노란색 상의를 입고 있었고, 치마 역시 색만 비슷하고 치맛자락의 꽃문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큰아가씨, 무슨 그런 농담을 하셔요. 저희 아가씨는 지난번에 태자부에 가셨을 때도 이 옷과 거의 비슷하게 입으셨어요. 그때 큰아가씨는 배자를 입으셨고요. 이번에도 저희 아가씨는 저번과 비슷하게 입으셨으니 따라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큰아가씨라고 해야 옳겠죠.”

추길이 조롱이 언뜻 느껴지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정곡을 찔렀다. 이에 주묘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 자신은 엽연채가 대금식 유군을 입은 모습을 보고는 그 옷이 확실히 허리선이며 몸선이 더 드러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지난번 양왕부에 갔을 때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대금식 유군을 선택했던 것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출발해야지요?”

엽연채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주묘서는 기분이 못내 찝찝했지만, 엽연채가 먼저 입은 걸 따라 입은 건 사실이니, 여기서 더 실랑이해 봤자 자신만 손해를 볼 터다 싶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그럼 가요!”

네 사람은 그제야 마차에 올랐고 경인이 말을 몰고 정국백부를 나섰다.

* * *

몇 각刻을 달리던 마차는 자연스레 태자부의 동쪽 측문으로 들어선 뒤 수화문 근처에서 멈춰 섰다.

가장 먼저 뛰어내린 주묘서가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금슬에게 미소 띤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금슬아, 이렇게 또 보는구나.”

“네. 소저께서는 점점 더 곱고 아리따워지시네요.”

금슬이 듣기 좋은 칭찬을 해 주자 주묘서는 은근히 우쭐거렸다.

엽연채도 앞으로 다가오자 금슬이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두 분, 가시죠!”

금슬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은 잠시 후 정화원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태자비와 태자가 침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한 침상 아래에는 기다란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어여쁘게 생긴 시녀가 그 앞에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주묘서는 태자를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열렬히 동경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엽연채와 주묘서는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일어나서 그만 앉으시게나.”

태자비가 가볍게 손짓하며 인사를 받았다.

찻잔을 들고 있던 태자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을 건넸다.

“지난번에 보니 주 부인이 차를 아주 잘 끓이던데 이번에도 차를 끓이러 왔나 보군.”

“예.”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고 대꾸했다.

그러자 태자 부부 침상 앞에 놓인 탁자에 앉아 있던 시녀가 얼른 일어서더니 엽연채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엽연채는 부들방석 위에 자리 잡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주묘서는 엽연채가 태자와 태자비 곁에 가까이 자리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질투심이 타오른 그녀는 자신도 저곳에 앉아 태자에게 차를 올리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주 소저,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나 금슬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주묘서는 불만스러웠지만 금슬을 따라 오른쪽에 놓인 기다란 탁자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금슬과 함께 자리에 앉아 달갑지 않은 얼굴로 꽃을 닦다가 엽연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작은 새언니, 요즘 피곤해했는데 차를 끓일 수 있겠어요? 마마, 저희 작은 새언니가 몸이 좋지 않아 혹여나 실수를 하여 마마와 전하께 상처라도 입힐까 걱정되옵니다.”

가늘고 매끈한 섬섬옥수로 작은 자사호紫砂壺(자사토紫砂土로 만든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고급 다기)를 살며시 들어 올리던 엽연채는 그 말에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러고는 깃털 부채를 위로 말아 올린 것 같은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워 눈에 비친 조롱기를 숨겼다.

태자는 고개를 숙인 채 엽연채를 쳐다보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넓고 고운 이마에 가늘고 긴 둥근 눈썹, 귀엽고 아리따운 얼굴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와 보였다.

태자비는 주묘서가 갑자기 내뱉은 말이 대단히 무례하게 느껴졌지만 엽연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태자를 보자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얼른 주묘서의 말에 호응하며 분위기를 흐려 놓으려고 했다.

“아, 주 부인이 요즘 그리 피곤하다는 말인가?”

“예! 마마는 모르시겠지만 저희 작은 새언니 친정집에 일이 있었습니다. 새언니는 매일같이 추씨 가문과 관아를 드나들었으니 피곤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주묘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간절한 눈빛으로 태자비를 쳐다봤다. 그녀는 태자비가 자신과 엽연채의 역할을 바꾸라고 하기를, 자신더러 가까이 와서 차를 끓이라고 말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태자비는 그저 ‘그렇구나.’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나도 최근에 주 부인 친정집에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자비는 말을 하다 멈추더니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외실을 데리고 사는 엽승덕의 행동이 얼마나 몰염치한 짓인지 이야기하려 했는데, 지금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은 그것보다 더 질이 나빴다. 첩으로 앉히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자리만 하게 하려는 것이니 말이다.

태자비가 화제를 바꾸려 하는데 엽연채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예, 저희 친정집에 일이 있었습니다. 마마 앞에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잖아도 어떻게 이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주묘서 이 맹추가 큰 짐을 덜어 주었다.

“사실 저희 친정집은 별일 없었고 저희 큰이모 집안이 누군가 때문에 난처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흐음…….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제 와 대화를 일단락할 수도 없어 태자비는 별수 없이 관심을 보였다.

“저희 이모댁이 황상이라 궁 안에 술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멀쩡했던 술에 문제가 생겼고, 주초낭중이 그 술을 마시고 쓰러졌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 외실의 아들 허서가 찾아와 저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고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자가 궁 안의 누군가와 결탁해 저희 이모 가문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를 압박해 고발 건을 철회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죠.”

태자는 두 눈을 씀벅이며 하얀 손으로 쥔 쥘부채로 손아귀를 톡톡 두드렸다.

태자비는 태자가 뒤에서 술수를 부렸다는 걸 모르는 데다 궁에서 일어난 이 일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아 그저 ‘쯧쯧’ 혀를 찼다.

“그런 사람이 있었단 말이냐?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구나.”

그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입술이 살짝 올라가며 요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함정을 파려고 잔머리를 꽤나 굴렸던 모양입니다. 저희가 고발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추씨 가문 사업은 무너졌겠지요. 그리고 철회했더라도 그자와 결탁한 주초낭중이 음식을 먹고 그 술을 먹었는데 그 음식과 술이 상극이었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럼 추씨 가문 술은 특정 음식과는 상극이란 소리니 결국 황상의 자격을 잃게 되었을 겁니다. 사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겠죠.”

태자는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말대로였다. 그래서 자신이 허서를 크게 칭찬했던 것이다. 허서는 아주 교활하고 영리한 자였다.

“물론 방금 말씀드린 이 함정은 저는 잘 몰랐고 저희 사촌 오라버니가 다 알아차린 겁니다. 그런데 저희 사촌 오라버니는 그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했습니다.”

예상 밖의 소리에 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말은 허서를 어리석다고 낮잡아보는 것인가 아님 허서를 높게 평가하는 자신을 어리석다고 비웃는 것인가?

그러나 태자의 사정을 모르는 태자비는 아주 재미있단 듯이 물었다.

“왜 그자를 어리석다고 한 것이냐?”

“저희 사촌 오라버니는 허서가 자신만 머리가 있고 다른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주초낭중은 그저 주초낭중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이 말한 게 모두 진실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주초낭중은 이리도 쉽게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니 분명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겁니다. 주초낭중 같은 관리들은 많든 적든 상인들에게 금품을 받을 테니 평소 여러 상인들에게서 이익을 챙겼을 겁니다. 그쪽으로 조사하면 틀림없이 뭔가가 나올 터죠. 하지만 그러러면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신양 공주 마마께 부탁을 드렸지요. 조사한 결과, 주초낭중은 정말로 여러 상인들에게서 뇌물을 받았고, 그중에는 추씨 가문과 원수를 진 탕씨 가문이 있었습니다. 공주 마마께서 그 점을 지적하시자 주초낭중은 제 코가 석 자가 됐고, 그가 한 말은 전부 믿을 수 없는 거짓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허서는 그냥 잔머리나 좀 굴리는 사람일 뿐, 실은 대단히 우둔한 자입니다.”

태자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 맞다. 정말 우둔하고 거만한 자구나.”

태자의 보기 좋은 얼굴이 조금 더 굳어졌다. 그리 생각해 보니 정말 허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런데 자신은 그를 아주 똑똑하다고 판단했으니 자신도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엽연채는 딱딱하게 굳은 태자의 표정을 힐끗 쳐다보더니 눈에 비친 웃음기를 감추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드리웠다. 사실 허서는 정말 교활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 생각이라는 게 때로는 이랬다. 모를 때는 그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지만 알고 나면 별것 아니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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