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66화 (166/858)

제166화

“어머니, 걱정 마세요. 반드시 과거 시험에 합격해 기필코 출세할 겁니다!”

허서는 결의를 불태웠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될 뿐만 아니라 정안후부의 적손嫡孫이 될 수 있었다. 그러면 오늘의 모욕을 엽연채와 온씨에게 백배 천배로 대갚음해 줄 수 있었다.

“다만… 엽연채가 신양 공주와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혹시라도 걔가…….”

은정랑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허서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허서가 콧방귀를 뀌며 자신했다.

“걔만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게 아니에요. 공주는 그래 봤자 공주입니다. 지금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가장 큰 권력을 쥐고 계신 분은 태자 전하입니다.”

지난번 태자에게 도움을 청하며 추씨 가문을 처리할 계책을 내놓았을 때 태자가 저를 크게 칭찬했다. 자신이 과거 시험에 붙고 진사 급제도 하게 되면 태자는 분명 자신을 눈여겨볼 것이었다.

은정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보묵방에 가서 문방사우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상주에 도착하는 즉시 문을 걸어 잠그고 시험 준비에 매진할 겁니다.”

허서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상주에도 필묵 상점이 있지만 그는 여태 보묵방의 붓과 먹만 써 왔기에 다른 곳에서 파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허서는 옷을 갈아입은 후 위자를 데리고 보묵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처럼 안으로 들어서니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기분이 너무 좋아 오늘 아침 날이 밝자마자 보묵방으로 달려와 문방사우를 고르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선반 위에는 다양한 붓이 걸려 있었는데, 붓이 하도 많아 눈앞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참을 고르고 또 고르던 그녀는 마침내 호필湖筆(저장성浙江省 후저우시湖州市에서 나는 붓) 하나를 집었다. 그런데 이때, 혜연이 갑자기 그녀를 톡톡 쳤다.

“아가씨.”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말쑥하게 생긴 서생이 보묵방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서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딱이네!’

엽연채가 이리 생각하며 까만 눈썹을 치켜올리자 허서도 그녀를 보고는 순간 간악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는 이내 평소 보이는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런 우연이 있나. 이리 또 마주치는군.”

그러자 엽연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정말 우연이네요. 한데 허 공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외출을 할 만한가 봐요?”

일순 허서의 눈 속에 음험한 기운이 일렁였으나 그는 입가의 미소를 유지했다. 허서는 안으로 걸어오더니 일렬로 걸려 있는 붓들을 사이에 두고 엽연채에게 대꾸했다.

“지금 체면이 있고 없고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중에는 내가 연채 너보다 훨씬 더 체면이 설 게다.”

그 말은 자신이 반드시 과거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큰소리치다가 큰코다쳐요.”

혜연이 냉랭한 목소리로 핀잔한 후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우리 아가씨께 ‘연채야.’라고 부르지 말아요. 당신이 뭔데요? 누가 당신 누이동생이라도 됩니까?”

‘당신이 뭔데?’라는 말은 허서의 자존심을 마구 짓밟아 버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에서 자라 사람들에게 멸시당했고, 또 지금은 외실의 아들이자 의붓자식으로 지내고 있어 이런 부분에 더욱 예민했다. 혜연이 내뱉은 말에 허서의 얼굴이 삽시간에 참담히 일그러졌다.

허서는 ‘하하’ 냉소를 짓더니 독사 같은 눈빛으로 엽연채를 노려보며 장담했다.

“네가 자발적으로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를 날이 올 게다.”

“당신 주제에?”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비웃음에 마음이 더욱 상한 허서는 한층 독기 어린 눈빛을 띠었다.

“그래, 내 주제에! 설령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난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넌 영원히 서자의 아내에 불과하겠지!

공주 마마께 들러붙었다고 우쭐대지 말거라. 추씨 가문 사람을 형부로 한 번 들여보냈으니 두 번은 못 할까? 네가 몇 번이고 빼낼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내 뒤에 계신 분은 네가 감히 건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엽연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기어코 향시에 합격하고 전시殿試에도 급제할 것이다. 그런 다음 태자의 지지까지 얻게 되면 남은 것은 고속 승진뿐이었다. 이뿐 아니라 자신은 엽연채의 오라비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반면 엽연채는 몰락한 가문의 서자의 아내일 뿐이니 영원히 지금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 그 뒤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엽연채는 그가 누구인지 뻔히 알았지만 일부러 조롱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허서는 자신이 태자의 눈에 든 걸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지난번 태자는 이쪽에서 떠들고 다니기를 허하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이런 귀인들의 일은 가급적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 좋기도 했다. 그랬다가 나중에 태자의 심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허서는 잔뜩 뻐기고 싶은 마음에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그분이 누구냐고?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알려 줘야 하지? 그러나 이건 말해 줄 수 있지. 나와 그분은 인연이 있다. 3년 전, 요릿집 천수루天水樓가 개업했을 때 그곳 주인이 분위기를 띄우려고 추첨 행사를 마련했지. 이등에는 두 명이 당첨되는 거였는데, 내가 이등에 당첨됐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그분이셨다.

그 귀인께서는 내가 그분과 함께 이등을 뽑았으니 일등을 뽑은 것보다 더 운이 좋다고 말씀해 주셨지. 그러고는 내가 뽑은 패자牌子 위에 글자 하나를 적어 주시면서 내 소원을 하나 들어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번에 그 패자를 들고 그분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한 번 쓰고 나면 끝일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 일로 내가 그 귀인의 눈에 든 거야. 그러니 너한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말을 마친 허서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그 뒷모습이 문 입구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혜연은 이를 꽉 물고 그를 욕했다.

“저 뻔뻔한 놈!”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말하는 기세를 보니 대단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봐요!”

‘바로 태자란다!’

엽연채는 조롱기 가득한 얼굴로 속으로 이리 대꾸했다. 그러곤 허서를 골탕 먹이겠다는 눈빛을 번뜩이더니 새빨간 입술을 씨익 올렸다.

“저자가 누구의 마음을 사로잡았든 간에 우린 저자를 가만 안 둘 수 있다.”

혜연은 그 말에 어리둥절해했다.

‘아직 그분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저자를 가만 안 둔다고?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지?’

“가자꾸나.”

엽연채는 대충 벼루 하나를 고른 다음 계산대로 가서 값을 지불했다. 그런 다음 경인에게 마차를 몰게 해 곧장 정국백부로 달려갔다.

정국백부 수화문에 도착한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자 대나무 숲 앞에 앉아 돌로 장난을 치고 있는 여양의 모습이 보였다.

“셋째 마님, 돌아오셨군요!”

여양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지난번에 제게 말씀하셨던 일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허서와 태자의 관계를 알아보라는 부탁이었다. 엽연채가 입꼬리를 당기며 물었다.

“셋째 공자님은 집에 계시느냐?”

“셋째 도련님은 출타하셨어요. 셋째 도련님께서 저보고 이곳에서 셋째 마님을 기다렸다가 돌아오시면 이 소식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이미 알고 있단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하자 여양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엥? 이미 알고 계신다고요?”

“그래, 난 이만 처소로 돌아가 보마.”

그들은 함께 서과원으로 걸어간 다음 여양은 난죽거로 들어가고 엽연채와 혜연은 궁명헌으로 향했다.

검은 고양이는 엽연채를 보더니 얼른 그녀에게로 뛰어왔다. 엽연채는 그 고양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됐다. 이제 길들었구나!’

엽연채는 검은 고양이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요 녀석이 갖고 놀 장난감을 가져오너라.”

혜연은 입을 씰룩거리며 침실로 가서 순금 패자를 꺼내 들었다. 이게 바로 고양이가 가지고 놀 장난감으로, 엽연채가 특별히 주문제작까지 한 것이었다.

“작은 새언니.”

이때, 문밖에서 주묘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양이를 데리고 놀던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보니 주묘서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새언니, 이거 봐요. 태자부에서 또 초대장을 보내왔어요.”

주묘서의 손에는 용과 봉황 문양의 금박이 붙은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태자부에서 보낸 것이었다.

추길이 두 눈을 반짝이며 기쁜 목소리를 냈다.

“아가씨, 태자비 마마께서 또 아가씨를 부르신 거네요.”

엽연채의 눈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주묘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만날까요?”

“내일 아침 진시辰時(아침 7시~9시) 삼각에 동쪽 수화문에서 봐요.”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의 가슴 언저리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나한상에 앉아 있었는데,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그녀의 무릎 위에 웅크린 채였다. 털은 윤기가 흘렀지만 온통 검은색이고 또 한쪽 눈이 먼 탓에 아무리 봐도 영 괴상한 생김새였다.

“새언니, 고양이를 기를 거면 차라리 흰색 고양이를 길러요. 얼룩 고양이도 괜찮고요. 얜 너무 못생겼잖아요. 눈도 이상하고!”

주묘서가 꼴 보기 싫다는 얼굴로 흉을 봤다.

“전 얘가 좋은걸요.”

엽연채가 개의치 않고 옅은 미소를 짓자 주묘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생각했다.

‘고양이도 꼭 저 같은 걸 기르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더는 말하는 게 귀찮아진 주묘서는 인사를 남기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아가씨, 내일 어떤 옷을 입으실 거예요?”

신이 난 추길은 물으면서 옷장으로 걸어가 옷을 뒤적였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붉은 입술을 추켜올렸다.

“가장 예쁜 걸로! 그 분홍색과 홍색을 섞어놓은 듯한 옷 있잖아.”

“네!”

추길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드디어 눈을 뜨셨구나!’

* * *

이튿날 아침, 진시辰時 일각. 살짝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춘산은 이른 아침부터 엽연채의 처소로 달려와 그녀를 불러댔다.

“셋째 마님, 셋째 마님. 준비 다 되셨어요? 큰아가씨가 수화문에서 셋째 마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혜연과 함께 엽연채의 머리를 빗기던 추길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까!’

추길이 눈을 부라리며 밖을 향해 대꾸했다.

“거의 다 됐어요!”

춘산은 그제야 되돌아갔고 추길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말했다.

“아주 자기가 주인공이네요! 태자비 마마께서 부른 중요한 손님은 우리 아가씨이고 큰아가씨는 그냥 껴서 한 번 갔다 온 건데, 자기를 찾아 부르신 줄 아나 봐요. 흥!”

엽연채의 눈빛에도 조롱하는 기색이 비쳤지만 그녀는 말을 더 보태지는 않았다.

추길은 마지막으로 복숭아꽃 술로 장식된 금잠을 엽연채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아가씨, 다 됐어요.”

“그럼 가자꾸나.”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추길과 함께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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