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엽승덕은 글공부에 재주가 눈곱만큼도 없어 수재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가 하릴없이 노는 꼴은 볼 수 없으니 집안에서는 은화 이천 냥을 들여 엽승덕을 6품 동지 자리에 앉혔다.
엽승덕은 사람들한테 자신이 명목상일 뿐인 직위를 갖고 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여 업무 강도가 높지 않은 관직을 샀음에도 평소 관아에 눌러앉아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실상은 매달 녹봉으로 겨우 은화 한 냥을 받았으니, 그저 체면 유지용으로 관직에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젠 이 관직마저 잃어버렸으니 엽학문은 더없이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자신에게는 글공부에 재주가 있는 허서라는 귀한 손자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안색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지금으로선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큰아주버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멀쩡한 분이 기어코 외실을 데리고 살겠다고 하고 그 외실 때문에 얻어맞기까지 하다니요.”
손씨가 입을 삐죽거리며 흉을 봤다. 그녀가 관아에서 엽승덕을 도와줬던 건 다만 엽연채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엽승덕 역시 그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잃어 가길 간절히 바랐다.
이제 엽승덕은 허울뿐인 관직을 잃었으니 조만간 세자의 자리도 잃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그 자리는 자신의 남편이나 아들 영이에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손씨의 예상과는 달리 엽학문은 평상시처럼 엽승덕을 나무라지 않았다. 도리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쫓아냈다.
“됐으니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모두 나가 보거라!”
손씨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날 엽승덕이 시아버지와 함께 뒤쪽으로 가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시아버지는 은정랑이 엽승덕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고, 엽승덕이 외실을 데리고 사는 것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다시 그 일을 떠올리자 손씨는 오히려 기뻤다.
‘큰아주버님이 외실을 데리고 살게 내버려 두라지!’
그 외실은 그와 6년을 함께 했는데도 자식 하나 낳지 못했고, 균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니 결국 이 집안은 자신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었다.
* * *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학문은 조정에 나갔다.
그는 대전 안에서 엽학문은 가장 끄트머리 구석진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정4품의 관리라지만 직책은 비서소감에 불과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책이나 관리하는 별 볼 일 없는 관직이기에 평소에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머릿수나 채울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조정에 들어서자마자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며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엽학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효막심한 아들놈의 추문이 벌써 파다하게 퍼져 다들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얼마 후,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권신들은 메뚜기 떼로 인한 충해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나 다름없는 엽학문은 그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충해 문제를 놓고 벌인 논박은 얼추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엽학문이 조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때 한 어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소신이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슨 일이냐?”
위에서 나이 든 사람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언관 하나가 답했다.
“어제 부윤이 사건 하나를 심리했는데, 바로 비서소감의 적장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자는 관원인데 아내의 혼수품을 훔쳐 외실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상석에 앉은 황제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비서소감? 그게 누구냐?”
엽학문은 늘 황제의 부름을 받고 앞쪽으로 가까이 가 보길 바랐다. 마침내 오늘 그 소원이 이루어졌지만, 이유가 하필 추문 때문이라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엽학문은 난처한 모습으로 속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소신이옵니다…….”
황제는 눈꺼풀이 축 처진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낯이 익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 그대는 정안후靖安侯 아닌가?”
엽학문은 황제 앞에 얼굴을 비추었으나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허……. 그대는 아들 교육을 어찌한 겐가?”
“소신이 잘못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사옵니다……. 지금 소신의 못난 아들놈은 제 잘못을 뉘우치고 관아에 수감되어 깊이 반성하고 있사옵니다.”
황제의 질책에 엽학문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일로 얼굴을 비출 바에야 차라리 영원히 안 비추는 게 나았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은 이미 혼쭐이 났고 감옥살이도 하고 있는데, 이 망할 언관 놈들이 또 굳이 끄집어낸 것이다.
“자식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건 부모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이 일에는 정안후의 책임도 있사옵니다.”
언관이 냉랭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그가 가장 분개하는 일이 바로 이런 파렴치한 일이었으니, 그는 반드시 황제에게 심판을 요구할 작정이었다.
“황제 폐하, 중벌을 내리셔야 하옵나이다.”
“그럼 감봉 일 년에 품계를 세 단계 강등하겠다.”
연로한 황제가 꽤나 피곤한 모양인지 하품과 함께 이리 명했다.
“오늘 조회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다!”
황제가 자리를 떨치자 엽학문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해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품계를 세 단계나 강등한다고? 수십 년 끝에 간신히 이 자리에 올랐는데 품계를 세 단계나 강등하겠다고?’
그는 지금 정4품인 비서소감인데 품계를 세 단계 강등하면 종5품이 된다. 그럼 조정에 나와 황제가 정사를 논하는 것을 들을 자격마저 잃게 된다.
언관은 엽학문이 처벌받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반면, 엽학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와 별로 친하지 않은 동료 몇 명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천천히 다시 올라가면 되네.”
‘천천히 다시 올라가라고?’
자신은 벌써 육십이 넘었다. 엽학문은 당장 관아로 돌아가 엽승덕을 감옥에서 끄집어내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을 이렇게 수치스럽게 만들다니!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귀한 손자 허서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내년 춘시에서 장원으로 진사 급제하길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만 되면 저것들의 얼굴을 마구 짓밟아 줄 수 있을 거다.’
엽학문은 최대한 서둘러 출궁한 후 집으로 향했다. 그저 사람들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벌써 칠월 중순이 되어 집집은 중원절 준비로 바빴다. 특히 태자부는 준비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어 정신이 없었다. 바로 팔월에 있을 태자와 측비의 혼례식이었다.
태자의 측비는 첩실이라지만 정2품의 품계를 받는 귀인이기 때문에 혼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다만 팔인교八人轎를 탈 수는 없어 사인교四人轎를 타야 하고, 붉은색 혼례복을 입을 수 없으며, 전체적으로 연회가 태자비보다는 성대하지 않을 뿐이었다.
태자는 불쾌한 표정으로 서재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조금 낡은 듯한 붉은색 목패木牌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태자인데 어째서 3황자의 누이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는 말이냐?”
태자가 콧방귀를 뀌자 이계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아마 공주 마마의 외모가 더 친근해서 그랬을 겁니다!”
이에 태자는 태자비의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을 떠올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서가 갑자기 그에게 달려와 도움을 구했을 때, 태자는 엽승덕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다가 그 순간 엽연채가 확 떠올랐다. 그녀의 집안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허서는 그녀의 원수였다.
허서는 계책까지 내놓으며 추씨 가문을 어떻게 손봐 줄 것인지 이야기했다. 전부 들은 태자는 추씨 가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면 엽연채는 분명 도와줄 사람을 찾을 것이고 결국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며칠간 엽연채가 찾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신양 공주를 찾아갔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태자는 몹시도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허서라는 사람, 참 간교한 자이더군요.”
이계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적어도 추씨 가문을 상대하려고 내놓은 이번 계책은 꽤 쓸 만했습니다. 신양 공주 마마께서 주초낭중이 추씨 가문과 원수를 진 사람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때마침 알아내지 못하셨다면, 고소 철회 여부와 관계없이 추씨 가문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태자는 흥미롭다는 눈빛을 띠며 동조했다.
“쓸 만한 인재야. 향시에 응시한다고 들었는데 합격하면 내 사람으로 써야겠다.”
“다음 달에 향시가 있으니 그럼 소인이 인삼을 준비해 보내겠습니다.”
이계의 말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엽연채 생각이 들어 또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가자, 정화원으로 가서 식사해야겠구나.”
* * *
칠월이라 날씨는 점점 더 싸늘해지고 마른 바람이 불어 건조했다. 그러나 도성에는 백성들의 무미건조한 생활을 촉촉이 적셔 줄 큰 웃음거리가 생겼다.
정안후부 세자가 외실에게 잘 보이려고 아내의 혼수품에 손을 대 결국 감방에 처넣어졌다. 그뿐 아니라 자식을 잘못 키운 대가로 나이 지긋한 정안후 역시 간신히 오른 정4품 비서소감에서 강등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백성들은 휴식을 취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낼 때 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당연히 정안후부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최대한 얼굴을 밖에 비치지 않았다.
송화 골목의 영존거 또한 마찬가지로 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 마마는 찬거리를 사러 나갈 때도 뒷문을 통해 살그머니 빠져나갔다.
영존거. 하인들은 최대한 소리를 죽이려고 조심스럽게 집안일을 했고, 은정랑 모자는 소청의 원탁 앞에 앉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흘 후 중원절을 보내고 나면 넌 상주로 돌아가 향시 준비를 하거라!”
은정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오이씨같이 갸름한 자그마한 얼굴은 부드럽고 유약한 느낌을 풍겼으나, 눈빛은 독이라도 바른 양 음험하고 악랄했다.
과거 그녀의 눈에 비친 온씨와 엽연채는 오합지졸이라 언제든지 해치워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거듭해서 자신의 체면을 구겼고, 이번에는 심지어 자신을 감옥에 처넣기까지 했다. 상상도 못 했던 공격에 은정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상주는 도성에서 대략 5일 정도 가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본래 은정랑과 엽승덕은 칠월 말에 그곳으로 허서를 보내 향시를 준비하게 할 계획이었으나 뜻밖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일정을 앞당겨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유언비어가 허서의 심경에 영향을 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