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에! 셋째 공자님이요?”
추길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때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맞은편 상점의 문 앞에 주운환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엽연채를 보더니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온사월이 추길에게 물었다.
“어떤 셋째 공자님을 말하는 게냐?”
“아, 저희 아가씨의 부군이요!”
추길은 답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드니 열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 자라난 대나무처럼 산뜻한 연청색 도포는 미끈하게 뻗은 그의 체형을 돋보이게 했다. 흰 머리끈으로 반을 묶어 뒤로 넘긴 새까만 머리카락이 더해진 얼굴은 화려하면서도 맑고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년은 한적한 정원에서 발걸음 내키는 대로 걷는 것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온사월 일행에게 가까워졌다. 덕과 재주를 겸비한 사내가 절세미남이기까지 하니 온사월은 기쁜 마음에 활짝 웃었다.
주운환은 엽연채 곁의 사람들을 보고는 그들의 신분을 짐작했다. 그는 우선 온사월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이모님, 형님들. 처음 뵙겠습니다.”
“이쪽은…….”
엽연채가 소개해 주기도 전에 온사월은 주운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박원이로구나! 인물 한번 정말 훤하게 생겼구나!”
주운환, 엽연채 그리고 추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엽연채가 얼굴을 가리며 난감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이모, 박원이 아니라 운환이에요.”
“운… 환? 그게 아니라…….”
온사월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분명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 여동생이 자신에게 보낸 서신에는 분명 조카딸이 장박원에게 시집을 간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운환으로 바뀐 거지?’
추경과 추랑도 어리둥절해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의아하다는 눈빛을 엽연채에게 향했다.
“그게… 중간에 일이 생겨서 전 장씨 가문으로 시집가지 않고 주씨 가문으로 시집갔어요.”
온사월은 적잖이 난감했다. 그녀는 주운환이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신경 쓸까 봐 얼른 듣기 좋은 말을 건넸다.
“아, 그랬던 거구나. 이렇게 보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이런 걸 바로 하늘이 맺어 준 부부의 인연이라고 하는 게지.”
그러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온사월은 엽연채가 요 며칠 동안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내내 밖을 돌아다녔으니 시집에서 그녀를 나무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마침 남편도 그녀를 데리러 온 걸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보냈다.
“일도 잘 해결됐으니 넌 어서 집으로 돌아가 보거라.”
“예. 그럼 이모, 저희 어머니 좀 잘 부탁드려요.”
엽연채가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이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이 추환이 자기네 마차를 끌고 왔다. 온사월과 추환, 추곡은 커다란 마차에 올랐고, 추랑은 마부석에 앉았다. 추경은 말 위에 따로 올라탔다. 그렇게 그들은 천천히 떠나갔다.
말을 타고 가던 추경이 고개를 돌려보니 엽연채는 여전히 관아 문 앞에 서서 주운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다시 앞을 보고 가볍게 말채찍을 휘두르자 일행은 이내 모퉁이를 돌아 멀어졌다.
* * *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들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엽승덕이 곤장을 맞지 않은 게 좀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감옥살이하게 됐으니 목적은 그런대로 달성한 셈이었다. 나중에는 명목상의 직위마저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이 추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와 보니 온씨가 큰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씨는 얼른 앞으로 다가와 그들을 맞이하며 물었다.
“큰언니, 어디 갔던 거예요?”
“오늘이 바로 엽승덕 사건을 재판하는 날이었다. 엽승덕은 감옥에 갇혔단다.”
온사월이 냉소를 짓자 온씨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역시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몹쓸 인간은 평생 그 안에서 썩어야 돼요.”
지난번 송화 골목에서 각혈한 사건 후로 온씨의 애정은 원망과 증오로 바뀌었다. 지금 그녀는 엽승덕을 죽도록 미워하고 있었다.
온사월은 그런 그녀에게 엽균이 엽승덕 대신 곤장을 맞았고 엽승덕은 은정랑을 보호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온씨가 엽승덕을 죽도록 미워한다고 해서, 아니 도리어 그렇기에 그 개만도 못한 남녀의 사랑을 절대 남의 일처럼 넘길 수 없을 터였다.
“아 참, 내가 이곳에 돌아온 지 꽤 됐는데 어째서 그 일을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이냐?”
온사월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전에 네가 보낸 서신에는 연채가 대리시경의 적장손인 소년수재와 혼인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오늘 보니 박원이가 아니라 운환이라고 하더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 말에 온씨의 표정이 굳어졌으나 숨길 비밀도 아닌지라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눈이 삐어서 장박원 그 금수만도 못한 놈을 연채와 정혼시켰었죠! 혼례식 당일에 그놈이 제 시동생의 여식을 데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연채가 주씨 가문으로 보내진 겁니다.”
“뭐라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냐?”
온사월은 충격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그런데…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주씨 가문으로 보낸 것이냐? 주씨 가문은…….”
온사월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정성은 서남쪽에 위치한 응성과 가까웠는데, 주씨 가문이 전에 지키던 지역이 바로 응성이었다. 그래서 온사월은 8년 전 주씨 가문이 응성을 빼앗기고 결국 옥안관에서 참패했던 사건을 도성 사람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처참한 패배 후, 주씨 가문은 장남을 제외한 모든 형제가 옥안관에 뼈를 묻고 말았다. 당시 응성은 서로西魯의 몽고인들에게 점령당했으나 나중에 강왕康王이 풍씨 가문과 손잡고 함께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강왕은 서북쪽으로 돌아왔고 풍씨 가문이 응성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연채가 시집간 곳이 8년 전 응성에서 패퇴해 재기불능이 된 주씨 가문이란 거니?”
온사월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그게… 네, 맞아요.”
온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온사월은 놀란 소리로 외쳤다.
“내 기억으론 주씨 가문 적장자가 그때 이미 열일곱 살 정도였는데!”
당시 주씨 가문은 그 일대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대단한 영웅이었다. 백성들은 주씨 가문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리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됐던 사람이 현재 주씨 가문의 적장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하나같이 그를 소년영웅이라고 칭찬했다. 어린 나이에 사촌들과 함께 전장에 나갔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해 몇 년 지나지 않아 용맹한 장수가 되어 대제의 강산을 굳건히 지켰다. 당시 추경과 그의 동생들도 커서 주씨 가문 적장자처럼 영웅이 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 본 그 소년은 이제 겨우 열일곱 정도로 보였다. 그럼 8년 전에는 겨우 열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어린애였을 터다.
“연채와 혼인한 사람은 주씨 가문 장남이 아니라 셋째 아들이에요.”
온씨는 속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온사월도 추길이 그를 ‘셋째 공자님’이라고 불렀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내 떠보듯이 온씨에게 물었다.
“정실이 낳은 아들이냐?”
온씨는 굳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서, 서출이에요.”
온사월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추씨 가문 형제들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는지 안색이 확 변했다.
‘내 사촌 여동생이 서자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온사월이 눈시울을 붉히며 한탄했다.
“연채는 어엿한 적장녀이고 용모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뛰어난데 어쩌다가 서자에게 시집을 간 게냐.”
온씨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운환이 그 아이가… 서자이기는 하지만 연채에게 아주 잘해 주고 인품도 괜찮으니 그거면 됐어요.”
하나 온사월은 엽연채의 억울한 처지가 안타깝기 짝이 없어 계속 아쉬워했다.
“손씨 그 망할 년에게 혼사를 빼앗겼더라도 그런 사람에게 시집보낼 것까진 없었잖니.”
이때, 계속 조용하던 채 마마가 분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가씨 부군은 원래 엽이채의 정혼자였습니다. 그런데 엽이채가 장박원과 도망갔을 때, 손씨 그 천박한 여편네가 엽이채의 정혼자를 큰아가씨와 맺어 주자고 후부 나리를 꼬드겼습니다. 경황이 없던 나리께서 그때 정신이 돌아 그만 큰아가씨를 주씨 가문으로 보내 버리신 겁니다.”
온사월은 피를 토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여동생은 어쩜 이리도 운수가 사나운지 번번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남편이 밖에서 첩실을 데리고 사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거기에 여식의 혼사마저 계략에 휘말려 망쳐 버리고 말다니!
“가서 마음 좀 가라앉혀야겠다.”
온사월은 가슴을 움켜쥐고 벽을 짚으며 밖으로 나갔다.
“큰, 큰언니…….”
온씨는 온사월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다 자신이 강하지 못한 탓이었다.
* * *
한편, 추풍과 봉춘은 곤장을 맞고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지경이 된 엽균을 들쳐 메고 정안후부로 돌아갔다.
그 시각, 안녕당 서차간.
엽학문과 묘씨가 침상 위에 앉아 있었고, 엽승신과 엽승강이 관아에서 벌어진 일을 그들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엽승신은 침을 사방으로 튀겨 댔다.
“결국 규율에 따라 장 30대와 옥살이 3개월 처분이 내려졌어요. 곤장은 균이가 대신 맞아 줬지만 큰형님은 3개월 동안 콩밥을 드셔야 돼요.”
엽학문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크게 씩씩거렸다. 정안후부에서 콩밥을 먹는 사람이 나오다니, 조상님의 얼굴에 먹칠이란 먹칠을 다 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이 밖으로 퍼지면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후부 나리, 큰일 났습니다!”
밖에서 유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학문은 당장에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밖으로 뛰쳐나가 유이를 발로 뻥 걷어찼다.
“걸핏하면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하는데 좀 제대로 된 말은 못 하는 것이냐?”
걷어차인 유이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서 일어나거라.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게냐?”
묘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호부户部(호적 관리와 재경財經 업무를 맡아보던 관아)에서 공문서를 보내왔는데 세자야의 관직을 삭탈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이가 조그만 책자를 건넸다. 엽학문은 그걸 받아들기조차 싫었다. 그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침상으로 돌아가면서 유이를 내쫓았다.
“알겠으니 썩 나가 보거라!”
엽승덕은 범법 행위를 저질렀으니 6품인 동지同知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소식을 접한 상부에서 면직 서류를 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