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61화 (161/858)

제161화

엽연채는 한나절 이상 난죽거에 머물렀다. 유시酉時(오후 5시~7시)가 다 되어 갈 즈음,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여양이 서신을 건네자 작은 서재에 앉아 있던 주운환은 서신을 바로 뜯었고, 엽연채는 창가에 기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운환은 빠른 속도로 서신을 읽어 내려가더니 헛웃음을 쳤다.

“태자가 뒤에서 술수를 부렸네요.”

그러자 엽연채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허서 그놈이 어떻게 태자 전하와 한패가 되었을까요? 설마 그놈이 태자 전하의 눈에 든 걸까요?”

그런 거라면 허서는 때려죽일 수 없는 바퀴벌레가 된 셈이다. 엽연채는 생각하면 할수록 낙심해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 일은 조사를 더 해 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내무부 주초사酒醋司는 그저 작은 부처에 불과하니 태자가 추씨 가문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누워서 떡을 먹는 것만큼 쉽지요. 주초낭중이 술을 마신 후 쓰러졌고, 그걸 알게 된 태자가 태의에게 지시를 내렸을 겁니다.

당연히 이를 거역할 수 없는 태의는 그저 진단이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우선 추씨 가문 사람을 형부에 가둬 놓을 수 있죠. 아가씨가 사건을 철회하면 그 주초낭중은 어젯밤에 먹은 다른 음식 때문에 그리된 거라고 말할 겁니다.”

주운환이 말을 마치자 여한이 자기 생각을 고했다.

“양왕 전하께 분명 그 주초낭중을 겁줄 방법이 있으실 테니 고소 건을 철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양왕 전하께서 주초낭중이 어젯밤에 쓰러진 건 분명 다른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엽연채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황궁은 추씨 가문에서 만든 술을 다시는 쓰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엽연채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되면 추씨 가문 사업은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때 주운환이 입술을 씨익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한 방법이죠.”

“그게 뭔데요?”

엽연채가 얼른 캐물었다. 주운환이 낮은 목소리로 방법을 이야기해 주자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곧장 궁명헌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혜연에게 종이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위에 자신이 부탁하는 바를 적은 후 이를 전달하라고 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채비를 마친 후 곧장 추씨 가문으로 달려갔다.

추씨 가문은 사람들은 초조한 나머지 뜨거운 가마 속의 개미처럼 갈팡질팡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추랑이 만나러 갔던 융씨 아저씨에게서도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았다. 이에 추씨 가문 사람들은 큰방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종사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밖에 있던 어멈이 황급히 아뢰었다. 온사월이 고개를 들자 엽연채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채야.”

“이모, 제가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게 참말이냐?”

온사월은 크게 기뻐하면서도 쉬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우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아직 제대로 모르잖니.”

“저만 따라오시면 돼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온사월을 잡아당겼다.

“이모와 함께 뵈러 갈 분이 있어요.”

두 사람이 대문을 나서자 허서가 또 맞은편 필묵筆墨 상점에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엽연채는 분명 그가 일부러 이곳에 나타난 것이리라 생각했다.

티끌만큼 보잘것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득세하게 됐으니 자신들 앞에서 한껏 뻐기고 있는 것이었다. 허서는 외실이 데려온 의붓자식이라고 천시당해 왔는데, 이제 그걸 딛고 일어섰다 싶으니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과시하고파 안달이 났을 것이었다.

“연채야, 이모님과 어디 가는 거니? 고소 건을 철회하러 가는 거니?”

허서는 그녀와 온사월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온사월이 역정을 내려는 찰나,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감옥살이할 준비나 하라고 해요! 철회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꾸밀 수 있었던 거예요?”

허서는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하!”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보고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쏜살같이 앞을 향해 달려갔다.

허서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곁에 있던 봉춘이 염려하며 입을 뗐다.

“공자님, 설마 저들이 정말로 해결 방법을 찾아낸 걸까요?”

“그럴 리가 없다.”

허서는 단박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 이번 일로 자신이 부탁을 드린 사람은 바로 태자였다. 태자가 나섰으니 엽연채가 반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가자, 가서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올 준비를 하자꾸나.”

허서가 영존거로 돌아와 보니 엽승덕이 애간장을 태우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엽승덕은 하루가 멀다 하고 관아로 달려갔다. 추씨 가문에서 고소를 철회했다는 희소식을 듣길 바랐지만 매번 낙담하여 귀가할 뿐이었다.

“서야, 돌아왔구나. 추씨 가문 쪽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있더냐?”

엽승덕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봉춘이 말했다.

“하지만 세자야, 걱정 마세요. 저희가 그 사람들에게 사흘의 말미를 주겠다 했는데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습니다. 저쪽은 체면이 깎일까 봐 차마 철회하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하루만 더 견디세요. 그럼 마님께서는 분명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엽승덕은 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은정랑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은정랑은 벌써 며칠째 관아에 붙잡혀 있었다. 부윤이 잘 대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래 봤자 감옥이었다. 엽승덕은 허서가 곧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하는 데 희망을 걸고 시름을 달랬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관아에서 서신이 날아왔다. 엽승덕과 허서는 고소 건이 철회됐다는 공문서인 줄 알고 서신을 열어 보다가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일 사건을 심리하겠다는 통지서였다.

엽승덕은 굳은 표정으로 서슬 푸른 호통을 쳤다.

“이것들이 아주 실성을 했구나! 추씨 가문 전체를 희생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는 잠시 멍해 있다가 어떤 생각에 미쳤다.

“설마… 추씨 가문에서 진상한 술 문제를 해결한 건가?”

그 말에 허서는 누군가에게 뺨을 사정없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를 하도 꽉 물어 금방이라도 피가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이 큰 대가를 치르고 꾸민 계략이었는데 엽연채가 그걸 물거품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두 번이나 일부러 추씨 가문 문 앞에서 서성이며 거들먹거렸다! 허서는 폭발하는 수치심과 분노를 견디기 어려웠다.

* * *

사소한 절도 사건이라 사시巳時(오전 9~11시) 일각에 심리가 열렸다.

엽승덕, 허서, 엽균, 엽승신 부부 그리고 엽승강 부부는 아침부터 함께 관아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엽연채, 온사월, 추씨 가문 형제들이 보였고, 원래라면 형부에 갇혀 있어야 할 추경도 함께 있는 모습이 허서의 눈에 들어왔다. 허서의 안색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추씨 가문 일이 정말로 해결됐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때 엽승신이 허허 웃으며 사람들에게 알렸다.

“부윤 대인께서 나오십니다.”

엽연채와 온사월이 고개를 들어 보니 붉은색 관복을 입은 정 부윤이 길쭉하고 커다란 탁자 앞에 앉았다.

“사건 심리를 시작하겠소!”

정 부윤이 경당목驚堂木(법정에서 법관이 주의를 환기하거나 경고하기 위해 내리치던 막대기)을 탕탕 내리치며 개정開廷을 선포했다.

온사월은 엽연채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추씨 가문의 며느리 온씨가 부윤 대인을 뵈옵니다. 송화 골목 영존거의 은정랑을 절도죄로 고발하고자 합니다.”

온사월은 그리 말하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정 부윤은 이미 사건에 대해 파악한 후였지만, 그래도 절차에 따라 소장을 살펴보고는 다시 경당목을 치며 명했다.

“죄인 은정랑을 끌고 오너라.”

잠시 후, 은정랑이 끌려 나왔다. 그녀는 붙잡혀 갈 때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좀 헝클어졌고 안색이 창백하며 수척해 보일 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온사월은 엽씨 가문의 보호 덕분에 은정랑이 부윤의 보살핌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정랑!”

엽승덕은 은정랑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그녀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랑, 당신만 무사하면 그걸로 됐소.”

은정랑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전 괜찮아요……. 그저 나리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죄인은 무릎을 꿇거라!”

정 부윤은 헛기침을 하더니 엽승덕을 쳐다보며 말했다.

“엽 세자야, 이곳은 관아의 법당입니다. 피해자와 그 가족, 죄인을 제외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나가시기 바랍니다.”

“부윤 대인, 영존거는 저의 집입니다.”

엽승덕은 ‘쿵’ 소리를 내며 은정랑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절도 사건이라 해도 그 또한 제가 벌인 짓이니 정랑과는 무관합니다.”

정 부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엽 세자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랑꾼이라고 하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엽 세자도 관리의 몸인데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야 됩니까.”

그러나 엽승덕은 읍하며 고집을 피웠다.

“부윤 대인, 감사하지만 저는 정랑과 함께 무릎 꿇고 있겠습니다.”

그 말에 정 부윤은 말문이 막혔고, 온사월은 은정랑에 대한 애정이 갈수록 깊어지는 엽승덕을 쳐다보며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같은 시각, 관아 밖은 구경하려고 모여든 백성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슨 사건이에요? 저 젊은 부인은 곱고 순하게 생겼네요. 그 곁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도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는데 어느 가문 나리입니까?”

백성들은 귀족 구경을 제일 재미있어하는 법이었다.

“저 부부는 무슨 억울한 사정이 있는 걸까? 아유, 저 젊은 부인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 좀 봐. 가여워라!”

“그러게 말이야!”

구경꾼들이 상간녀와 상간남에게 동정을 보내자 온사월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이에 추랑이 고개를 돌려 그 사람들의 말을 정정했다.

“여러분, 혹시 그런 말 아십니까? 빛 좋은 개살구란 말 말입니다. 저 둘은 부부가 아니라 간통한 음란한 사람들입니다!”

“그 입 다물어라!”

엽승덕이 고개를 돌려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허, 정숙하시오!”

정 부윤이 다시 경당목을 두드리며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관아의 법당 안에 있는 사람들만 통제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바깥의 백성들은 사건 심리가 열리면 늘 모여 웅성거리기 마련이었다. 추랑의 목소리도 그다지 크지 않아 사건 심리에 별 영향을 주지 않으니 정 부윤은 그냥 내버려 두고 추랑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건 절도 사건입니다! 저 여인은 외실이고 저 사내는 부인의 혼수품을 훔쳐 저 여인에게 갖다 바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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