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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60화 (160/858)

제160화

의붓자식이라는 말에 허서의 멀끔한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미소 띤 표정을 유지했다.

“연채야, 너도 참 지독하다. 큰이모님과 손잡고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려고 하다니. 하지만 네 불효막심한 행동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네 사촌 오라버니가 곧 형부로 끌려 들어가게 생겼잖니!”

“그쪽이 꾸민 짓이죠!”

추길은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허서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분노한 얼굴이 더욱 곱고 아리따운 엽연채를 감상할 따름이었다. 이 미인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은 자신으로 인해 드러난 것이니 그는 더욱 흥분되고 만족스러웠다.

허서가 득의양양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혈육 간의 정도 무시하고 아무리 악랄한 방법을 써 봤자 아버지와 내 어머니를 감옥에 보내는 게 고작이다. 기껏해야 장 몇 대 맞고 몇 개월 갇혀 있는 게 다다, 이 말이다!

그러나 형부는 들어가기는 쉬어도 나오기는 어려운 곳이다. 작게 보면 세심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니 장사를 접는 데서 그치겠지만, 크게 보면 궁 안의 귀인들이 마실 술에 독을 넣은 것이니 재산을 몰수해야 되는 대죄다! 하하하!”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데요?”

추길이 화가 나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허서 뒤에 있던 하인이 대신 답했다. 이자는 엽승덕을 곁에서 모시는 봉춘이었다.

“당연히 절도 고소를 철회해야지.”

“허튼소리! 꿈도 꾸지 말거라.”

온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좋아요. 이모님께서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시니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옥살이를 하게 되겠네요. 그리고 추씨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하겠죠! 그래도 제가 시간을 사흘 드릴 테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말을 마친 허서는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

허서는 속이 다 후련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며 그네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일 터였다. 자신은 반드시 위로 올라가 귀족이 되고 고관대작이 될 것이다.

사실 별것도 아닌 절도 사건에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쓴 격이니 좀 가치 없게 사용된 감이 있긴 했지만, 그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었겠는가. 특히 엽연채 앞에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을 터였다.

허서가 떠난 후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머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이가 가장 어린 추곡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는 자기가 무슨 천황天皇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구나! 이 어미는 수십 년간 장사해 오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었다. 설령 정말로 문제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품질 문제일 텐데,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할 정도로 심각할 리가 있겠느냐?”

온사월이 이를 악물고 부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벼운 대가를 치르더라도 추씨 가문 사업에는 전에 없던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큰이모, 죄송해요.”

엽연채가 얼굴을 들지 못하자 온사월은 손사래를 쳤다.

“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니 사과할 것 없다. 네 어미는 내 여동생이다. 동생을 위해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으냐.”

“큰이모, 제가 사흘 안에 해결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그러고도 정말 안 되겠으면 이 고소 건을 철회할게요.”

말을 마친 엽연채는 인사를 올린 후 밖으로 나갔다.

“아이 참……! 연채야!”

온사월은 그녀를 따라갔으나 수화문에 다다른 엽연채는 자신의 마차에 오르며 이리 말할 뿐이었다.

“이모, 제가 돌아가서 방법을 강구해 볼게요. 그러니 이모는 저희 어머니를 잘 보살펴 주세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경인은 말채찍을 휘둘렀고 마차는 밖을 향해 나아갔다.

“연채야!”

온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차가 떠나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어린 소녀가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랑아, 네가 융씨 아저씨를 찾아가 궁 안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아보고 오너라.”

추랑은 온사월의 분부에 이내 두 남동생과 함께 말을 타고 문을 나섰다. 그러나 추씨 가문은 저 멀리 정성에서 활동하는 상인이다 보니 이곳에서의 인맥이 그리 넓은 편이 못 되었다.

엽연채는 어두운 낯빛으로 마차 안에 앉아 있었고 추길은 초조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억울해했다.

“간신히 약점을 잡아 그 비천한 외실을 처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하늘도 정말 무심합니다.”

추길은 이미 체념한 상태였지만 엽연채는 추씨 가문이 연루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본래 이건 자신들의 일이었으니 다른 사람을 말려들게 해서는 절대 안 됐다.

“아가씨,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추길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집으로 갈 거다.”

엽연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추길은 ‘엥?’ 하며 생각했다.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하지 않으셨나? 면목이 없으니까 일단 나오는 대로 말씀하신 건가? 3일 후에 패배를 인정하고 고발을 철회하시려는 건가?’

추길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정국백부 수화문으로 들어섰다. 엽연채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곧장 서과원으로 향했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추길이 그 뒤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같이 가요!”

“추길아, 넌 주방으로 가서 계란찜을 가져오거라.”

“그건 왜…….”

추길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분부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서과원에 도착한 엽연채는 그대로 난죽거로 걸어 들어갔다.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여한은 엽연채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셋째 마님, 오셨군요.”

“그래!”

엽연채가 작은 서재 창가로 뛰어가 창문에 기대어 안을 들여다보니 주운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 셋째 공자께서는?”

그녀는 여한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셋째 공자께서는 출타하신 게냐?”

“아닙니다.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여한의 대답에 엽연채는 하늘을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지금 오시午時가 다 되어 가는데 여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말이냐? 과거 시험 준비를 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여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셋째 공자께서는 이미 준비를 끝마치셨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게 준비를 끝마쳤다고 말할 수 있는 시험인가?’

이 시험은 행장에 옷 몇 벌 챙기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따지고 들 기분이 아니라 곧장 본채의 침실로 향했다.

주운환은 얼굴을 안쪽으로 기울인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새까만 머리칼이 베개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엽연채가 가까이 다가가니 그에게선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엽연채는 그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셋째 공자, 공자!”

잠에서 깬 주운환은 머리가 좀 어질어질했다. 몸을 돌려 눈을 게슴츠레 뜨니 소녀가 아름답고 요염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운환은 잠결에 그만 손을 뻗어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어루만지고 말았다.

엽연채는 주운환이 갑자기 자신을 쓰다듬자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윽,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 말에 주운환은 깜짝 놀라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사람이 진짜였던 것이다.

주운환은 얼른 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습니까?”

아직 잠에서 덜 깨 잠긴 목소리였다. 엽연채가 보니 그는 흰색 중의中衣를 입고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등 뒤로 넘어가 있었다. 화려한 용모를 가진 그의 눈초리에선 취기가 살짝 느껴졌다. 주운환은 막 깬 탓에 나른하고 몽롱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자태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엽연채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내의 침실에 들어와 그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난처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물었다.

“술은 왜 마신 거예요?”

“소저가 가져다 놓은 게 아니었습니까?”

주운환은 ‘흥’ 하고 작게 콧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소저가 한밤중에 문 앞에 술 단지를 두고 가지 않으셨습니까. 밤에 마셔 보라는 뜻 아니었어요?”

“으…….”

엽연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그 뜻으로 그곳에 두고 갔으니 말이다.

“숙취 때문에 힘들어할까 봐 보러 온 겁니까?”

주운환은 이마를 짚고 씽긋 웃었다.

“확실히 좋은 술이에요. 숙취가 있는데도 머리는 안 아프고 조금 어지러운 게 다입니다.”

“그 술 때문에 공자님을 찾아왔어요.”

엽연채는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저께 큰이모와 함께 엽승덕과 그 외실을 관아에 고발해 곧 있으면 그자들을 감옥에 처넣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허서라는 놈이 무슨 수를 썼는지 제 사촌 오라버니 집안에서 궁으로 들여보낸 술에 문제가 생기게 했어요. 그 바람에 사촌 오라버니가 형부 사람들에게 끌려갔어요.”

그 말에 주운환이 날카로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신이 확 든 모양이었다.

“하, 그 허서라는 자가 그리 대단하단 말입니까?”

엽연채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대단한지 어쩐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놈이 그리했어요.”

“소저의 사촌 오라버니가 황상皇商이시죠! 이번에 술을 궁 안으로 들여보내는 일을 맡으셨고요.”

“맞아요. 그래서 이 일을 양왕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론을 꺼냈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어떻게 양왕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양왕부로 달려가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중요한 임무가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우선 무슨 일인지부터 알아봅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운환은 창가에 놓인 탁자 앞으로 걸어가 붓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한편에 놓인 벼루에는 먹이 다 말라 있었다. 엽연채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벼루에 물을 따른 후 그에게 먹을 갈아 주기 시작했다. 주운환은 정성스럽게 먹을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곤 상황에 걸맞지 않게 그만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먹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운환은 자리에 앉아 붓을 먹물에 찍은 후 서신을 작성했다. 그는 완성된 서신을 잘 접은 뒤 여한을 안으로 불러 그 서신을 전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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