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나와 네 할아버지가 문제 되지 않도록 힘쓸 것이다.”
“추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시간을 더 끌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한데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하셨잖아요.”
허서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받자 엽승덕이 자책했다.
“다 내가 무능한 인간이라 그렇다.”
그러자 허서가 이를 꽉 물고 외쳤다.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방법?”
엽승덕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허서는 엽승덕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엽승덕은 깜짝 놀라더니 이내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 생긴 데 크게 기뻐했다.
“그게 다 참말이냐?”
“예.”
허서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가자꾸나.”
엽승덕은 그를 끌고 서둘러 문밖을 나섰다.
* * *
한편, 엽연채가 정국백부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엽연채는 추씨 가문 송무주가 든 술 단지를 들고 마차에서 내려 난죽거를 지났다. 문이 닫혀 있는 걸 보아하니 주운환은 출타한 모양이었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주운환에게 주려고 멀리서 술 단지를 품에 안고 왔는데 막상 그가 없으니 마음속이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
“기다렸다가 내일 드리세요!”
추길은 그리 말하며 쩍 하품했다. 요 며칠간 피곤한 일투성이었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여 술 단지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주운환이 최대한 빨리 이 술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랐다. 곰곰이 생각하던 엽연채는 난죽거 대문 앞에 술 단지를 내려놓고는 돌아섰다. 추길은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됐지만 물어보기 귀찮아 그저 엽연채를 따라 그곳을 떠났다.
궁명헌.혜연이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준비해 둔 터라 엽연채는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끼니를 해결한 뒤 바로 목욕을 하고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정말이지 너무 피곤했다. 더군다나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라 편히 자지도 못했다. 그러니 자기 침상에 눕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문 깊은 밤이 되어서야 주운환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등롱을 들고 난죽거 대문에 다다르자 문 앞에 단지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셋째 도련님, 이게 뭘까요?”
“술 같은데.”
여양의 물음에 여한이 문을 열며 대꾸했다. 그는 이미 은은한 술 향기를 맡은 후였다.
주운환은 몸을 숙여 그 단지를 안아 들었다. 대문이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리자 그는 바로 작은 서재로 향해 창문 근처에 놓인 탁자 위에 단지를 내려놓았다. 그사이 여한과 여양은 목욕물을 준비했다. 주운환은 일 년 내내 찬물로 목욕을 하기에 물은 차디찼다.
목욕을 마친 주운환이 곧장 작은 서재로 돌아가 술 단지를 열어 보니 순한 향이 코를 찔렀다. 한 잔을 따라 들이켜니 처음에는 달곰한 향이 부드럽게 입 안을 감쌌고 목구멍으로 넘기니 화끈거리고 얼얼한 기운이 느껴졌으며, 배 속에 다다르자 온몸이 따뜻하고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차가운 물로 목욕해 정신이 맑아지고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술 한 모금이 속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심신이 나른해지고 온갖 정과 회포가 일어났다. 그렇게 주운환은 야심한 밤 창가 앞에서 술을 들이켰고 엽연채는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숙면을 취했다.
* * *
칠월이 무르익자 날씨는 점점 더 선선해졌고 추풍이 불어오며 가을의 정취 역시 더욱 짙어졌다. 면 이불을 껴안고 자던 엽연채는 아침에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잠깐 더 잘까 싶었지만 깬 김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바로 몸치장을 한 뒤 서둘러 문밖을 나섰다. 어제 엽균이 찾아와 온씨의 화를 돋우었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성 서쪽에 위치한 추씨 가문 저택은 보통의 사진원四進院식 구조였다. 성문과 가까웠고 황궁이 위치한 장명가長明街와도 바로 이어졌다.
엽연채는 어제 온씨 일행을 이곳에 데려다준 뒤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곳 하인들은 모두 그녀를 알아봤다.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도착을 알렸다.
“이종사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뭔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연채가 왔구나.”
온사월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어머니는 지금 서과원에서 네 외할머니 아침 식사 시중을 들고 있다. 기운을 차렸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궁금하단 듯 말문을 뗐다.
“큰이모와 오라버니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어요?”
“관아에서 언제 재판을 시작할 건지 아직 통보해 오지 않았단다.”
추랑의 대꾸에 추경이 이리 덧붙였다.
“분명 엽씨 가문에서 관아에 선물을 보내 사정 좀 봐 달라고 부탁했을 거야. 우리가 가서 재촉하지 않으면 시간을 질질 끌 생각이겠지.”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그건 그나마 나았다. 만약 그쪽에서 엽씨 가문을 도와 훔친 물건을 가져가게 한 뒤,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발뺌해 버리면 그야말로 답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 부윤은 청렴한 관리이니 천리天理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 엽균이 자신들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다. 분명 정 부윤이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니 자신들을 압박해 고소를 포기하게 하려는 속셈으로 왔을 것이다.
추경도 같은 생각을 한 터라 온사월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니, 저희가 지금 가서 사건을 빨리 심리해 달라고 재촉해야겠어요. 일을 질질 끌다가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말이죠.”
온사월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그녀는 이 일로 은정랑 그 천박한 여편네를 쫓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일단 그 마음은 접고 그것들을 감옥에 처넣어 콩밥을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온사월이 냉랭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그래, 가서 독촉해야겠구나.”
“예.”
추경의 대꾸와 함께 그와 남동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을 나서려는 찰나, 마마媽媽 한 명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둘째 도련님! 궁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온사월과 추경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궁에서? 내무부內務府 사람인가?’
그들이 추측하고 있는 사이, 짙은 붉은색 관복을 입고 염소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호위 무사로 보이는 열 명이 넘는 장정들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엽연채는 그들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중년 사내가 입고 있는 관복은 정4품 관복이었다. 또 호위 무사들을 여럿 대동하고 찾아온 데다 오만하고 음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좋은 일로 온 건 아니었다.
“황상 추씨 가문의 주인이 누구요?”
중년 사내가 물었다.
“접니다.”
추경이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현재 추씨 가문 주인은 그의 큰형이었지만, 이번에 궁으로 술을 운송하는 일은 그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싸늘한 눈빛으로 추경을 훑어보더니 손을 흔들며 명했다.
“데려가거라.”
그러자 뒤에 있던 호위 무사가 얼른 달려들어 추경을 붙잡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아연실색했다.
격노한 온사월이 가장 먼저 항의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머니!”
추경이 얼른 큰 소리로 그녀를 제지한 다음, 고개를 돌려 중년 사내에게 읍하며 물었다.
“대인, 제가 무슨 잘못을 범했는지요?”
“난 형부시랑刑部侍郎이오. 추씨 가문에서 궁으로 보낸 술에 문제가 생겼소. 내무부의 주초낭중酒醋郎中이 그 술을 확인차 마시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소. 지금 태의가 진찰 중이오.”
중년 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추씨 가문에서 술에 독을 탔다고 의심하고 있소.”
“저희가 왜 독을 탑니까?”
온사월이 다급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대인, 다들 아시다시피 음식과 술이 궁으로 반입될 때는 수차례 엄격한 검사를 거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가 어째서 술에 독을 타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습니까? 애초에 왜 그런 짓을 하겠고요?”
그러나 형부시랑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신들은 공무 집행 중이라고 선을 그을 뿐이었다.
“부인, 이 사건은 조사 중에 있으니 경위는 나중에 밝혀질 겁니다. 우리는 체포하는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데려가거라!”
중년 사내는 호위 무사들에게 추경을 끌고 가라고 지시하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경아! 경아…….”
온사월은 다급한 마음에 그들을 뒤쫓아 문밖으로 나갔다. 추씨 가문 형제들과 엽연채도 따라갔으나 그들이라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호위 무사들이 추경을 붙들고 호송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형부시랑이 관교官轎를 타고 저택을 떠나자 추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가 술을 거듭 시음했고 신중에 신중을 기했으니 문제가 생길 수 없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진 온사월은 낯빛이 시퍼렇게 질렸다. 엽연채가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이모…….”
“아가씨!”
추길이 갑자기 엽연채를 부르며 그녀를 톡톡 쳤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맞은편에 있는 한 음식점 문 앞에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그는 기품이 느껴지는 짙은 남색 도포에 비단으로 만든 문생건을 쓰고 있었는데, 미남이라고는 일컬을 수 없는 용모였다. 다만 깨끗하고 말쑥한 기운이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언뜻 봐도 책을 많이 읽은 서생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허서였다. 엽연채는 그를 보더니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허서는 엽연채의 곱고 아리따운 얼굴이 자신 때문에 분노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게 되자 순간 흡족한 눈빛을 띠었다. 그러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그녀에게 읍한 뒤 말을 걸었다.
“연채야, 어제 길에서 마주쳤는데 내 쪽으로 와 인사도 건네지 않더구나. 그래서 오늘 내가 일부러 너를 보러 왔단다.”
온사월은 이 서생이 점잖고 우아한 풍모를 가지긴 했으나 위화감이 드는 미소를 짓고 있단 생각에 엽연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불청객이 왔음을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신지?”
“이모님, 이자가 바로 그 외실의 아들인 허서입니다.”
추길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에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들은 안색이 확 변했고 온사월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네가 그 외실이 데려온 의붓자식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