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그래, 난 속 좁은 사람이다! 야박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뭐? 네가 그리 말하니 네 말대로 해 줘야겠구나! 고발을 철회해? 하하하, 꿈도 꾸지 말거라! 난 그 인간들을 풀어 주지 않을 게야! 그뿐만 아니라 아예 엽승덕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그 외실의 숨통도 같이!
네가 이 친어미는 알아보지 못하고 그 외실을 어미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 너도 함께 나가 죽어 버려라! 너 같은 아들 낳은 적 없는 셈 치면 그만이다! 그만 썩 꺼지거라!”
엽균은 온씨가 이런 악독한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버렸다. 그가 떠나간 방향을 쳐다보던 온씨가 휘청거리자 엽연채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앉으세요.”
온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오래 머물렀으니 넌 어서 집으로 돌아가 보거라. 남아와 채 마마가 내 옆에 있어 주면 된다.”
엽연채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나 모친이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은 게 분명하니 고집을 부리기도 뭐했다.
“그럼 언니, 저희 어머니 좀 잘 부탁해요.”
엽연채가 온남아에게 당부했다.
“걱정 마!”
온남아는 방금 전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라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큰이모께서도 계시니 작은이모를 잘 다독여 주실 거야.”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복원을 나온 엽연채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수화문 밖에 있는 화단에 앉아 온사월의 마차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얼마 후, 마차에서 내린 온사월은 엽연채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연채야,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냐?”
“방금 전에 제 어리석은 오라버니가 다녀갔어요.”
엽연채는 엽균이 와서 떠들어댄 말을 모조리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온사월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고얀 놈! 어떻게 그런 아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연채야, 가자꾸나. 여기서 지내지 말고 도성에 있는 내 저택으로 가야겠다.”
엽연채는 온사월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온지개는 큰누이 온사월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 들었다. 자신이 아까 엽균을 들여보낸 건 엽균이 온씨를 설득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갈등이 해소되고 모두가 좋은 결과를 맞이하길 원했으니까. 그런데 화해는 고사하고 이 꼴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온지개는 큰누이와 맞닥뜨릴까 봐 서재에 숨어 밖으로 나올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이때, 그의 시동이 안으로 달려 들어오며 고했다.
“나리, 큰아씨께서…….”
“무슨 일이냐? 누님이 이곳까지 왔느냐?”
온지개는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게 아니라… 큰아씨께서 지금 짐을 싸고 계십니다. 추씨 가문 저택으로 옮겨 가신다고 하셨어요.”
온지개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갑자기 다시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큰누님이 거처를 옮긴다고 했느냐?”
“예. 지금 짐을 꾸리고 계십니다. 거기다 노마님도 추씨 가문으로 모셔가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게 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온지개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큰누이가 이번에 집에 오면서 수레에 가득 실어 온 선물들이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고, 뒤이어 십 년 전에 집에 왔을 때 떠날 즈음에 그간 생활비가 많이 들었을 터라며 은화 천 냥을 주었던 일이 기억났다.
온지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얼른 흔설원으로 달려갔다. 과연 온사월이 하인들에게 물건을 옮기라며 지시하고 있었고 진씨는 그 곁에서 그녀를 말리고 있었다.
“큰아가씨, 잘 계시다가 왜 가시려는 겁니까? 내년까지 계시기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온사월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곳에선 더 머무를 수 없네.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는가? 오늘은 배은망덕한 놈을 들여보냈는데 내일은 살인범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리 말하며 그녀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온지개를 흘겨봤다. 그 눈빛은 어제 온지개의 뺨을 세 대나 후려칠 때 보였던 눈빛보다도 더욱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온지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추경이 미소를 지으며 진씨에게 좋게 말했다.
“외숙모, 기왕 왔으니 저희 저택에서도 지내봐야죠. 어머니는 도성에 있는 추씨 가문 저택에서는 한 번도 지내본 적이 없으세요.”
온사월 모자는 도성에서 내년 정월 대보름까지 지낼 계획이었다. 대략 반년 정도 도성에 체류하는 동안 온사월은 온씨 가문에서 지내며 외할머니께 못다 한 효를 행하고 싶어 했지만, 추경을 비롯한 사 형제는 아무래도 함께 지내기 좀 불편해 추씨 가문 저택을 이미 청소해 둔 상태였다. 지금 그리로 옮겨 갈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쪽의 친척들을 만나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도성에 있는 추씨 가문 저택으로 옮겨 가니 어머니도 모셔가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시게 하려는 겁니다.”
추경이 말을 마치자 온사월은 고개를 돌려 추랑에게 일렀다.
“랑아, 가서 네 외할머니 처소에 보냈던 물건들을 가져오너라.”
그 말에 진씨와 온지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온사월이 노부인 처소로 보낸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노부인 혼자 다 쓸 수가 없으니 거의 자신들의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온사월이 그걸 전부 챙겨간다고 했다!
“큰이모, 저희 어머니 쪽도 다 정리되었어요.”
엽연채가 달려오며 말했다.
“연채야…….”
진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불렀다.
“외숙모, 저희 어머니도 큰이모댁에서 지내시게 하려고요.”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온지개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이 났다. 자신도 그들이 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큰누님과 사우가 이미 가기로 결정한 것 같으니 그럼 가 보세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옷소매를 뿌리치며 걸어갔다.
“아이고, 나리…….”
진씨가 얼른 그의 뒤를 쫓으며 말렸다.
“어떻게 아가씨들을 그냥 보내실 수 있습니까?”
“간다고 하면 가는 거지, 내가 가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요!”
격노한 온지개가 목청을 돋웠다.
“그래 봤자 상인에 불과한데 능력이 뭐 얼마나 되겠소. 더군다나 연채는 불운을 자초하는 아이오. 멀쩡한 장씨 가문과의 혼사에 잡음이 생기더니 결국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소. 방금 전 영복원에선 나에게 고함을 치며 내가 그 사람들에게 감히 밉보일 수 없는 모양이라고 하더군! 흥! 그러는 저는 얼마나 능력이 있길래 두려워하지 않는지 내 두고 볼 것이오.”
말을 마친 온지개는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온사월이 짐 정리를 마치자 온씨도 이쪽으로 건너왔다. 그녀는 큰오라비인 온지개에게 진작에 실망할 대로 실망한 상태였지만 오늘 일까지 겪고 나니 한시도 더 이곳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지낼수록 울화만 더욱 치밀 테니 우선 큰언니와 함께 며칠 있을 생각이었다.
엽연채 일행은 온 노부인을 마차에 태운 뒤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어른들을 추씨 가문 저택으로 바래다준 후 작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동대가로 들어선 마차가 송화 골목을 지나자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마차의 발을 걷어 올리고 영존거 방향을 쳐다봤다. 엽연채는 서늘한 눈빛을 번쩍이면서 하루빨리 그들을 감옥으로 처넣어 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때, 골목 입구에서 사람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자는 어두운 회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비단으로 만든 문생건을 쓰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생의 차림을 한 사내는 다름 아닌 허서였다.
허서도 마침 엽연채를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지나가는 마차에서 보는 이의 넋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허서는 멀끔하긴 하나 그다지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다. 그래도 전에는 늘 품위 있고 학식이 높은 학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채 음침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욕설까지 내뱉었다.
“빌어먹을 계집애! 어디 두고 보자!”
엽연채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발을 내리자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아름답고 밝은 빛도 함께 가려졌다.
허서는 영패令牌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마음은 더욱 침울해졌다. 절대로 저 빌어먹을 것 뜻대로 되게 놔둬서는 안 되었다.
‘엽승덕과 어머니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허서는 멸시가 담긴 엽연채의 미소가 발이 내려가며 가려지는 걸 보곤 더없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노기와 오기가 확 치밀어 올랐다.
‘이 일이 엽연채 뜻대로 되게 두면 나 허서는 사람이 아니다!’
허서는 이를 갈며 영존거로 냅다 달려갔다. 영존거에선 엽승덕이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는 허서가 돌아오자 얼른 다가가 물었다.
“서야, 어찌 돌아온 것이냐? 스승님이 계신 서원에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곧 있으면 감옥살이의 고초를 겪게 생겼는데 제가 어떻게 맘 편히 서원에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두 분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찬 허서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엽승덕은 흥분한 허서의 모습을 보고 감동해 마지않다가 저도 모르게 엽연채가 다시 떠올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허서는 친자식이 아닌데도 친아버지를 대하듯 저를 존경하는데, 그 불효녀는 공경은커녕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아비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번 기회에 그 불초자식을 버린 게 잘못된 행동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네 마음은 알겠으나 네가 아무리 화가 나고 걱정이 된다 해도 이 일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너는 어서 서원으로 돌아가거라. 네가 과거에 급제해야 우리가 기를 펼 수 있다. 설령 실형이 선고된다 하더라도 장 이삼십 대를 맞거나 옥에 몇 개월 갇히는 게 고작이다.”
엽승덕이 허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너와 네 어미는 내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어요!”
그러나 허서는 완강하게 반박했다. 그 순간 엽연채의 멸시 어린 조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그녀의 뜻대로 된다면 자신은 그녀의 마음속에 분명 비천한 인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리고 향시에 급제하고 장원으로 진사가 돼 벼슬길에 오른다 해도 부모의 절도죄는 오점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더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과거 시험 응시에도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잖아도 어머니가 바깥 첩실인 외실인지라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 절도죄까지 추가되면 정말 끝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