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엽학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아침이 밝자마자 엽학문은 엽승덕을 장씨 가문으로 보냈다. 장찬에게 정 부윤을 만나 이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장찬은 그들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얼마 전 장만만의 일로 장씨 가문은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돌아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방문객을 사절하고 있었다. 오점이 더 생길까 봐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는 판인데, 괜히 쓸데없는 일에 참견해 말썽을 일으키고 싶겠는가?
엽학문은 장찬 쪽도 뜻대로 되지 않자 머리 뚜껑이 다 열렸다. 그는 잘 알고 지내는 권력가들을 찾아가 사정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가 가서 말해도 정 부윤은 악인을 도와 나쁜 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완고하게 유지했다.
온사월이 고소를 철회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달리 방도가 없게 된 엽학문과 엽승덕은 그녀를 설득할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엽균이 자진해서 온씨 가문으로 찾아와 중재에 나선 것이었다.
“부윤이 이미 고발을 수리했으니 이틀 뒤에 심리가 시작될 겁니다. 물증도 전부 관아에서 확보하고 있으니 심문이 시작되면 아버지는 분명 감옥살이를 하게 될 겁니다.”
엽균은 그리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외삼촌, 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쩜 이리 인정머리 없고 냉정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 말에 온지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자신에게 골칫거리를 안겨 준 온사월과 온사우를 원망했다. 게다가 엽균이 말한 것처럼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굳이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단 말인가. 큰누이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매부를 감옥에 처넣으면 엽 후부는 분명 자신에게 보복하려고 들 것이고, 그럼 이쪽은 관직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큰누이의 말씀에 따르겠다고 밝힌 후였다. 지금 엽균을 안으로 들여보내면 정안후부의 위세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처럼 보일 테니 그는 일단 이렇게 둘러댔다.
“네 큰이모는 아침부터 출타하셨다.”
“전 큰이모를 뵈러 온 게 아닙니다. 그분은 쇳덩이처럼 냉정하고 무정한 분이잖아요. 전 저희 어머니를 뵈러 왔어요! 어제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는 한 번도 모습을 안 비추셨습니다. 하룻밤 부부라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 어머니를 설득할 생각입니다.”
엽균의 말에 온지개는 두 눈을 반짝였으나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난 이미 큰누님께 엽씨 가문 사람들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드렸다…….”
“외삼촌, 그 말씀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엽씨 가문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다고요? 저희 어머니는 엽씨 가문 사람 아닙니까? 제 누이동생도 엽씨 가문 사람이라 볼 수 있는데요? 다 떠나서 누이동생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온씨 가문 피고, 그 피가 제 몸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온씨 가문 외조카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엽균은 수화문으로 냅다 달려 들어갔고 온지개가 말리려고 했으나 엽균이 그보다 한발 빨리 영복원으로 향했다.
“어머니!”
온씨는 응접실에서 온남아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바로 엽균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보니 엽균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어 그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엽균은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래도 어머니 앞으로 다가가니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온씨와 은정랑은 사이가 이미 벌어진 후였다. 그도 지금 자신의 행동이 은정랑을 돕고 있는 것임은 분명히 알았다. 모친 앞에 서니 속으로 좀 찔리기는 했다.
온씨는 엽균을 보더니 기쁜 얼굴로 반겼다.
“균이가 왔구나? 그래, 온 식구가 모였는데 네가 빠지면 안 되지.”
엽균은 친정 식구들과 한자리에 모이길 염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하나 다시 생각해 보니 온씨 가문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와 정랑은 감옥에 처넣어 고생하게 만들려고 하는 셈이었다.
실망감이 밀려온 엽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이곳에서 즐거이 계시면서 어찌 그리 모진 마음을 잡수고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 고생하게 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온남아가 굳은 표정으로 황당해했다. 그녀 또한 사정을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너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화가 난 엽균이 말을 이었다.
“어제 큰이모님께서 늦게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큰이모님은 먼저 송화 골목으로 가서 아버지를 두들겨 팬 다음 혼수 단자를 들고 관아로 달려가 아버지를 고발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혼수품을 훔쳤… 가져갔다고 말이죠.
할아버지께서는 다들 한 가족이니 시끄럽게 소란 피우지 말고 좋게 말로 풀자고 하셨죠. 하지만 큰이모님과 연채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더니 기필코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온씨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엽균, 이 고약한 놈!”
이때, 뒤에서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들리더니 엽균은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등허리에서 통증을 느꼈다. 발에 차인 그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고개를 드니 격노한 엽연채가 뒤에 서 있었다.
“연채야!”
온씨는 그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엽균이 아무리 괘씸해도 그녀의 아들이고 엽연채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딸인데, 눈앞에서 남매가 몸싸움을 하고 만 것이다.
“어머니를 책망하면서 어째서 아버지가 어머니의 혼수품을 어디다 가져다주었는지는 똑똑히 말하지 않는 겁니까?”
엽연채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차라리 모두 분명하게 밝히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어머니 혼수품을 은정랑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자 엽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연채야!”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고개를 가로젓더니 엽연채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몸을 돌려 온씨를 쳐다보더니 간곡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어머니, 어찌 됐든 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깊은 정을 나눈 부부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를 감옥에 보낼 수가 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남편이자 인생의 반쪽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어머니 물건을 몇 개 가져간 것뿐이에요. 다른 집안 부인들은 혼수품 중에 좋은 물건이 있으면 남편에게 쓰라고 주는데 어머니는… 어머니는 지금 기분이 언짢으시죠. 그래도 그냥 아버지에게 돌려달라고 하면 그만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아버지는 저와 연채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의 남편입니다. 어쨌든 간에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던 그는 순간 얼이 빠져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온씨가 걸어 나와 낭하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싸늘한 표정이었으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
엽연채는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알고 보니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구나…….”
온씨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은정랑 그 망할 년의 편이었다니! 그년 편을 들다니!”
지난번 송화 골목에 갔다 온 후로 온씨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 후 그녀는 꽤 오랫동안 남몰래 엽균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그럴수록 그녀는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정말로 은정랑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적의 편을 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지금 엽균은 자신의 마지막 인내심까지 무너뜨려 버렸다.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엽균은 온씨가 눈물을 흘리며 웃는 기괴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모습에 그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머니는 어째서 좀 더 대범하게 행동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사내가 수많은 처첩을 두는 건 흔한 일인데, 어째서 어머니는 기어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사우야.”
밖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온지개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엽균을 역성들었다. 그는 사내인지라 남편이 집 안에 이낭이나 통방을 두거나 집 밖에 외실外室을 두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야박한 여인들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외삼촌, 지금 누구 편을 드시는 겁니까?”
엽연채가 차디찬 눈빛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연채야… 그게 무슨 말이냐? 난 그저…….”
온지개는 부끄럽고 분해 대꾸할 말을 찾았으나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그의 말허리를 싹둑 잘라 버렸다.
“그저 저희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러시겠죠. 그 사람들에게 감히 밉보일 수 없으니까요.”
“너…….”
온지개는 기가 막혔다.
“난 그저 도리를 말하는 것뿐이다. 사내가 처첩들을 거느리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니까.”
“아, 그럼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여인이 기꺼이 아랫사람이 되려고 한답니까? 그 여인은 자신이 정실이 되고 싶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넌 어째서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속을 헤아리려는 것이냐?”
이리 쏘아붙인 엽균은 성질이 나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속을 헤아린다고 했어요? 누가 소인이고 누가 도리를 아는 군자라는 겁니까?”
참다못한 온남아가 이렇게 끼어들자 엽연채가 냉큼 그 말을 받았다.
“그 여인이 군자라면 제 분수를 알고 정안후부에 들어왔겠죠!”
“허서의 과거 시험 때문에 그리한 거라고 이미 말했는데 어째서 또 그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냐? 여러 번 설명을 해 줬는데도 믿지 않고 있잖니!”
엽균은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속을 헤아리는 게 아니라고?’
“이 이야기는 됐고 지금은 눈앞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게 생겼다. 어찌 됐든 간에 하룻밤 부부라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도 있는데, 아버지를 정말로 감옥에 보내서는 안 되…….”
그런데 이때, ‘퍽’ 하고 큰 소리가 울렸다. 엽균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온씨가 조그만 국화 화분을 내던진 것이었다. 화분이 엽균의 발 언저리에서 깨지면서 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엽균이 고개를 들어 보니 온씨가 독기 어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