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추경은 그녀를 더는 쳐다볼 수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널 처음 봤을 땐 겨우 이만했는데 이제는 술을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컸구나.”
“오라버니가 절 본 적이 있어요?”
“십 년 전에 너희 큰이모가 가족들을 만나러 도성에 왔을 때, 네 사촌 큰오라비와 둘째 오라비를 데리고 왔었단다.”
온씨가 대신 대답했다.
“그때도 큰언니는 친정집에서 머물렀는데 경이가 매일같이 찾아왔지. 너희가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모른다. 그때 너는 겨우 네다섯 살 정도였으니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추경은 허리에 대고 손짓을 하면서 말을 받았다.
“그때 넌 키가 겨우 내 허리에 닿을 정도였지. 내가 나비 모양 꽃등을 높이 들어 올리곤 했는데 그럼 너는 폴짝폴짝 뛰며 그걸 잡으려고 했단다. 물론 늘 잡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자 온남아가 ‘풉’ 하고 실소했다.
“지금도 연채는 잡지 못할걸요!”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고 엽연채의 조막만 한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됐다.
‘지금 내 키가 작다고 놀리는 거지……?’
엽연채는 부끄럽고 무안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을 가렸다. 앵두 같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말이다. 요염하고 아리따운 두 눈에선 광채가 흐르고 깃털 부채를 위로 말아 올린 것 같은 기다란 속눈썹은 푸드덕 날갯짓하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녀리고도 사랑스러운 그 모습이 더없이 곱고 아름다웠다.
“다들 한 잔하시지요. 남기지 말고 다 비우는 겁니다!”
추랑이 미소를 지으며 재차 술을 따르자 온사월이 그를 꾸짖었다.
“랑이 너 지금 술을 얻어 마시려는 게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또 한바탕 까르르 웃어 댔다.
“아유, 술은 충분히 드신 것 같은데 식사는 안 하실 거예요?”
이때, 진씨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커다란 찬합을 든 여종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들, 어서 식사하시죠!”
“그래요.”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오라비를 찾았다.
“어, 그런데 오라버니가 안 보이네요?”
“서재에서 뭘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진씨의 대꾸에 엽연채와 추경의 눈에서 순간 웃음기가 비쳤다. 뺨을 얻어맞았으니 창피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
온사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가서 데려와야겠다. 한집안 식구끼리 밥을 따로 먹을 수는 없지. 경아, 네 사촌 누이동생과 함께 가서 외삼촌을 모셔오너라.”
“예. 남아야, 가자꾸나.”
추경은 그리 말하며 온남아를 쳐다봤고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온지개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얼굴에 붉게 부어오른 손자국이 남아 있어 온지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아버지. 밥상이 차려졌어요. 어서 영복원으로 가서 함께 드시죠!”
“돼, 됐다. 지금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너희끼리 식사하거라.”
“외삼촌, 저희 어머니께서 식사하러 오시라고 하셨어요. 급한 일이라도 우선 식사부터 하신 다음 처리하시죠. 집안사람들이 어렵게 한자리에 모였잖아요.”
추경의 웃음소리가 밖에서 울려 퍼졌다. 그제야 온지개는 굳은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유, 조카가 왔었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지금 가마.”
그렇게 세 사람은 영복원으로 돌아왔고 온지개는 온사월의 얼굴을 보더니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그러나 온사월은 그의 뺨을 후려친 일이 없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식구끼리 식사하는 자리이니 따로 밥상을 나눌 것 없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끼리 자리에 앉자꾸나.”
응접실에는 두 개의 상이 놓여 있었다. 온씨, 온사월, 진씨, 온지개, 엽연채, 추경, 추랑이 한 상에 자리했고 온남아, 추환, 추곡 그리고 온남아의 두 남동생과 서녀인 세 여동생이 한 상에 자리했다. 사람들은 재차 송무주를 따라 마시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온씨는 기쁜 얼굴로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온지개를 쳐다보며 물었다.
“큰오라버니, 얼굴이 왜 그래요? 좀 붉기도 하고… 이리 보니 부어올랐는데요?”
온지개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낮잠을 자다가 눌려서 붉은 자국이 남은 거란다.”
그러자 온사월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픽 웃더니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이건 우리 가문에서 빚은 술이다. 많이 마시거라.”
온지개는 그녀가 자신에게 술을 따라 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느껴져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온사월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얼마나 기쁘니. 우리 세 남매가 십 년이나 함께하지 못했구나. 지개야, 내가 없어도 네가 누이동생과 균이를 집으로 불러 어머니도 뵙게 하고 남매끼리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해라. 평소에 서로 돕고 보살펴야 혈육 간의 정이라는 말 앞에서 떳떳하지 않겠느냐?”
온지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온사월이 누이동생이 엽씨 가문과 엽승덕에게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잘 돌보라고 자신에게 당부하고 있다는 걸 그도 알았다. 누이동생의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얼른 알겠노라고 대꾸했다.
“큰누님 말씀이 옳습니다.”
온사월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엽씨 가문에 가서 한바탕 난리를 쳤다. 분명 그쪽 사람들이 화해를 청하려고 사람을 보낼 것이니 지개 너는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제대로 지키고 있어야 한다. 아무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온씨는 그 말을 듣더니 별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큰언니도 참.”
“너는 이 일에서 빠지거라. 넌 그저 맘 편히 친정에서 지내면 된다. 친정집에서 널 보호해 줄 수 없으면 넌 어디다 수모를 하소연해야 한다는 말이냐?”
온사월은 말을 하며 온지개를 쳐다봤다. 그러자 온지개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찬동을 표했다.
“큰누님 말씀이 맞아요. 사우, 너는 이곳에서 편히 쉬거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관여하지 말고.”
온사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엽연채는 이제야 온지개가 친정 식구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온 식구가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각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수년간 서로 만나지 못한 자매는 같은 방에서 함께 잠을 청했고 엽연채와 추길은 온남아의 정원으로 가 동쪽 행랑채에서 잠들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엽연채는 온씨 가문에서 온씨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들은 함께 외출해 도성에 사는 오랜 벗들의 집을 방문했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다 되어 갈 즈음, 이미 관아에서 돌아온 온지개는 서재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온지개는 이렇다 할 능력도 없고 글공부에도 재능이 없는 사람이지만 황제는 조정을 위해 온몸을 다 바친 선대의 얼굴을 봐 그에게 중시대부中侍大夫라는 한직閑職을 주었다. 묘시卯時(오전 5~7시) 점호에 얼굴을 비추고 관아의 문건과 서적을 정리하면 금세 그날 업무가 끝나는 한가한 자리였다.
“나리, 엽씨 가문 공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온지개의 시동이 달려오며 고했다.
“균이가 왔다는 말이냐? 오면 온 거지, 나에게 따로 보고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지만 어제 큰누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이에 온지개는 어젯밤 온사월이 한 말을 떠올리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순간 좀 짜증이 나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가서 보마!”
자리를 떨친 온지개는 협문을 나서 오른쪽으로 돌아 걸어갔다. 엽균이 수화문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온지개가 나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외삼촌, 어째서 제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겁니까?”
“어제 네 큰이모가 너희 가문을 찾아가 한바탕 소란이 일지 않았더냐? 그러더니 우리에게 너희 엽씨 가문 사람들을 들이지 말라고 분부를 내렸다. 그러니 넌 우선 돌아가거라. 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화가 풀리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게 아니라…….”
온지개의 말에 엽균은 다급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외삼촌은 아직 모르시는 것 같군요. 큰이모님께서 저희 아버지를 관아에 고발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버지 외실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하셨어요.”
엽균은 어제 있었던 절도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그에게 모두 들려주었고 사정을 알게 된 온지개는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그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황당해했다.
“큰누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느냐? 아무리 그래도 한집안 사람이고 친지인데 어떻게 관아에 고발까지 한단 말이냐!”
지금 온씨 가문은 예전만 못하고 자신은 그저 한직에 머무르는 관리인 데 반해 정안후부는 뭐가 됐든 간에 후부였고 가세도 훨씬 나았다. 엽학문은 비서소감祕書少監이라 요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정4품의 관리라 권신들 앞에 얼굴을 내밀 자격은 있었다. 게다가 이젠 엽씨 가문은 대리시경과 사돈을 맺었으니 온씨 가문과 비교할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온지개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엽씨 가문에 밉보여서는 안 됐다. 그러나 온사월에게 뺨을 세 대나 얻어맞은 일이 떠오르자 얼굴이 찌릿찌릿하더니 지금도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너희 가문에서는… 아직 방도를 생각해 내지 못했느냐? 네 조부님이 손을 쓰면 이 사건을 없던 일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저희가 그럴 수 있었으면 뭣 하러 이곳에 찾아왔겠습니까!”
엽균은 성난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제 엽연채와 온사월이 떠난 후 엽학문과 엽승덕은 곧장 관아로 가서 정 부윤에게 후한 선물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정 부윤은 그들이 준비해 간 선물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은 가볍게 보면 집안일이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절도 사건이니 개인적으로 조용히 해결할 수 있으면 그리하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끝내 해결이 안 될 경우, 자신은 원칙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 말이다.
엽학문은 정 부윤에게 사정 좀 봐달라고 부탁했지만 정 부윤은 은정랑이 좀 더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주겠지만 풀어 줄 수는 없다고 했고, 사건을 꼼꼼히 심리한 후에야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또 사정을 봐준다 하더라도 시간을 사흘가량 더 끄는 것이 고작이니 그 안에 알아서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심문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엽학문과 엽승덕은 화가 치밀었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