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55화 (155/858)

제155화

엽연채는 그 말을 듣더니 순간 멍해졌다. 온사월이 이어서 말했다.

“네 어미는 때론 성미가 급하지만, 가족들하고는 그래도 잘 지내는 모양이던데.”

“맞습니다! 마님은 영교 아가씨, 셋째 마님, 주인마님과 모두 잘 지내고 계셔요. 전에는 둘째 마님과도 잘 지내셨는데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진 후로 사이가 벌어졌죠.”

“봐 봐라.”

추길의 동조에 온사월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 어미는 집안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는데 환경이 바뀌면 이렇게 잘 지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단 네 아비와 갈라서게 되면 네 어미에게는 오점이 남게 되고 사람들이 네 어미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되면 더 큰 수모를 당할지도 모르지.”

엽연채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러니 자신이 분발해서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어 드려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혼은 생각하지도 말거라. 네 어미도 동의하지 않을 게다.”

온사월이 다시 한번 신신당부할 때,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온씨 가문 동쪽 측문으로 들어서더니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온사월과 차례로 마차에서 내린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경인에게 일렀다.

“넌 먼저 집으로 돌아가거라. 가서 오늘 친척이 도성으로 돌아와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내일 집으로 갈 것이라고 전하거라.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다시 이리로 오면 돼.”

“예.”

경인은 대답한 후 말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몰고 떠났다.

“가자꾸나! 벌써 시간이 이리 됐구나. 다들 안 자고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게다.”

온사월은 엽연채를 끌고 수화문을 넘어서더니 온 노부인의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영복원으로 들어서기 전, 마흔 살 가까이 되어 보이는 사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물이 훤한 이 사내는 짙은 남색 금포를 입고 정원 입구 옆에 서 있었다. 그 사내는 온사월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큰누님! 십 년 만입니다. 큰누님께서는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온사월을 반기는 이 사내는 엽연채의 외삼촌인 온지개였다.

“하하, 지개구나! 너도 그대로구나.”

온사월은 그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다가가더니 ‘짝짝짝’ 소리가 나도록 뺨을 세 대나 연달아 후려쳤다. 난데없이 뺨을 얻어맞은 온지개는 비틀거리며 벽에 부딪혔고 엽연채와 추씨 가문 형제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온지개도 어리둥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큰누님! 어, 어째서 절 때리시는 겁니까?”

온지개는 붉어진 볼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님이 오셨다는 소리에 일부러 마중을 나온 건데 갑자기 사람을 왜 때리시는 겁니까!”

“때리면 안 되느냐?”

온사월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다그쳤다.

“사우가 시집에서 그런 수모를 겪고 있는데 넌 사우의 큰오라비로서, 사우의 친정 식구로서 어찌했느냐?”

온지개는 순간 멍해지더니 회피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했다.

“다 한 식구 아닙니까…….”

“한 식구 좋아하네!”

온사월은 또다시 그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친정 식구들이 사우를 위해 나섰다면 엽승덕이 외실을 끼고 살더라도 그렇게까지 제멋대로 날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넌 목을 움츠린 거북이처럼 네 누이동생이 업신여김을 당하는데도 찍소리도 못 하고 항의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온지개는 머리를 움츠렸고 감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큰누님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러나 보지 못한 십 년간 그는 자신이 장성했으니 더는 큰누님도 두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이렇게 사나웠고 자신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머저리 같은 놈!”

온사월은 싸늘한 콧방귀를 뀌더니 엽연채를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누이가 오자마자 자신의 뺨을 후려칠 거라고는, 온지개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 봉변에 온지개는 몹시도 분하고 억울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개망신을 당한 그는 그들이 영복원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이내 그대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엽연채와 온사월이 안으로 들어서니 온씨와 다른 사람들은 노부인의 침실이 아닌 동쪽에 위치한 작은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응접실의 사면을 둘러싼, 정교한 꽃무늬가 새겨진 장지가 활짝 열려 있어 안에 누가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원탁 위에는 차와 과일 등이 차려져 있었고 진씨는 일이 생겼는지 먼저 자리를 뜬 상태였다. 온남아, 추환, 추곡이 곁에 있었는데, 쌍둥이 형제가 대체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온씨와 온남아가 함께 박장대소했다.

“어머, 큰이모와 연채가 돌아왔어요.”

온남아가 가장 먼저 엽연채 일행을 발견하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밖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끌어당겼다.

“어서 이리로 와 앉으세요. 작은이모께서 큰이모를 얼마나 기다리셨는데요. 시간이 좀 지나면 돌아왔는지 물어보시고 잠시 후에 또 물어보시고, 아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물어보셨다니까요.”

온사월이 그들 쪽으로 걸어가자 온씨가 얼른 그녀를 잡아당겨 자신 옆에 앉히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큰언니, 드디어 돌아왔네요! 집안 사업과 관련된 일은 잘 마무리된 거예요?”

“그래. 근데 방금 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게냐? 어찌 이렇게 즐겁게 웃고 있었어?”

온사월은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온씨를 다정히 바라봤다.

“곡이가 큰언니가 정성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던 이야기를 해 줬어요.”

온씨는 추곡이 입담을 자랑했던 일화를 온사월에게 다시 들려줬다. 그러자 온사월이 웃으며 농담조로 욕을 했고, 이내 자매는 간식거리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제는 전부 온사월이 정성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온씨는 고개를 들고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술을 두 주전자 가져다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왜 안 가져온 게냐? 이야기에 흥을 돋우려면 술이 있어야 하는데.”

엽연채와 온남아는 응접실 밖 회랑에 놓인 기다란 팔걸이가 달려 있고 붉은 칠이 된 나무 걸상 위에 앉아 있었다. 모친의 말을 들은 엽연채는 섭섭한 마음에 입을 삐죽 내밀더니 온남아의 어깨 위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전에는 나만 보면 ‘우리 연채, 우리 연채!’ 하시더니 오늘은 먹고 마실 게 필요하니 그제야 제 생각이 나셨나 봐요. 누가 한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온 친자매 아니랄까 봐.”

온남아는 ‘풉’ 하고 웃더니 온씨 편을 들었다.

“그래서 술은?”

그 말에 엽연채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말로 집안 사업 때문에 밖에 나갔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적당히 둘러대려는 찰나 뒤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술은 여기에 있다. 이건 우리 추씨 가문에서 새로 출시한 송무주松霧酒다. 삼천 근만 만들었는데 대부분 궁으로 들여보냈고 두 단지가 남아 하나는 외삼촌댁에 드리고 나머지 하나는 막내이모 댁에 보낼 거란다. 우린 여기서 마시자꾸나!”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스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사내가 뒤에 서 있었다. 옷깃이 둥글고 암문暗紋이 들어간 푸른색 금포를 입은 사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총명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손에 술 단지를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미소를 걸치니 더욱 외모가 청신해 보였고 씩씩하고 늠름한 자태에선 환한 빛이 흘렀다. 그는 엽연채의 둘째 사촌 오라버니인 추경이었다.

추경은 응접실로 들어가 탁자 위에 술을 내려놓았다.

“이건 우리 추씨 가문의 야심작인 송무주다. 연채와 남아도 어서 와서 마셔 보거라.”

엽연채와 온남아가 피식 웃더니 탁자 앞에 앉았다. 추경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 주었으나 셋째 남동생이 받을 차례가 되자 그냥 지나쳤다.

그러자 추랑이 굳은 표정으로 따졌다.

“둘째 형님, 저도 한참을 기다리다가 이제야 한 모금 마실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왜 안 주시는 겁니까?”

“네가 오래 기다린 건 맞지만 넌 전에도 몇 번 마셔 봤잖니. 지금은 술이 이 두 단지 밖에 없으니 막내이모댁 식구들과 외삼촌댁 식구들이 마실 수 있게 남겨 두자꾸나.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술을 빚으면 너희는 그걸 마시면 되니 말이다.”

“그래, 그래. 너희는 마시지 말거라. 너희 막내이모와 사촌 누이동생들에게 맛보게 해 주자꾸나.”

온사월이 미소를 지으며 동조했다. 그 말에 추랑과 쌍둥이 형제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으로, 그들은 미주美酒를 눈앞에 두고도 침만 꼴깍꼴깍 삼켜야 했다.

엽연채의 술잔은 술로 가득 차 있었다. 조그만 백옥 잔에는 연둣빛 술이 담겨 있는데 진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가 홀짝이자 처음에는 달달한 향이 풍기더니 이내 부드럽고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전에 마셔 봤던 술보다 더 은은하고 향긋한 솔향이 감돌았고 독특한 맛이 입을 즐겁게 했다.

엽연채는 전에 법화사에서 주운환과 양왕이 만나는 것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양왕과 주운환은 상락주를 마셨는데, 양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주운환은 꽤 호평을 했었다. 주운환은 술을 즐기는 편처럼 보였다.

“둘째 오라버니, 조그만 단지에 이 술을 좀 담아 주실 수 있어요?”

“이 두 단지는 원래 너희 두 집안에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엽연채의 말에 답하던 추경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정안후부에서 벌어진 소동을 보고는 그들에게 술을 주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막내이모댁에 드리려고 했던 건 네가 가져가렴!”

온씨는 온사월이 그저 엽승덕에게 매질만 한 줄 알았고, 두들겨 팼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내일 네가 절반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집으로 보내 네 할아버지께 드려야겠다.”

온씨의 말에 엽연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할아버지는 지금 자기들을 죽도록 원망하고 증오하고 있을 것이었다.

추경이 얼른 미소를 지으며 무마했다.

“내일 제가 보내면 되니 이모님은 마음 푹 놓고 여기서 저희 어머니와 함께 즐거이 계셔요.”

온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추경은 엽연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연채야, 이 송무주가 입에 맞니?”

“네, 맛이 아주 좋네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눈썹꼬리에서 풍기는 요염한 분위기와 반짝거리는 커다란 두 눈이 추경의 눈에 들어왔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탓에 붉게 달아오른 조그만 얼굴에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미소가 떠 있었다. 그 모습이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 그의 넋을 뒤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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