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이모, 진정하세요. 이 금수만도 못한 놈은 이모께서 기력을 낭비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어머니, 괜찮으신 거죠.”
엽연채와 추씨 가문 형제들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다음번에도 매질을 하시려거든 저희에게 말씀하세요. 저희가 하면 됩니다.”
“너희에게 다 맡겨 버리면 난 뭘 하라는 것이냐? 때리려거든 내가 때려야지! 안 그러면 속이 시원할 리가 없다.”
온사월은 아들들의 만류에 콧방귀를 뀌었다.
“가자꾸나!”
그러곤 돌아서서 휙 가 버렸다.
매질을 당한 엽균은 고통에 몸을 웅크린 채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막돼먹은 여편네……. 무지막지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저러니 아버지가 정랑에게만 잘해 주는 것이다. 정랑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이모처럼 무지막지한 여인이니 그녀도 아버지를 원망할 것 없었다.
엽연채는 그의 곁으로 걸어가 엽균을 내려다봤다. 순간 그녀의 눈빛에선 서늘함이 감돌았다.
“방금 전에 할아버지 마음이 변한 이유가 은정랑이 엽승덕을 구해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죠?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를 오라버니가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난 오라버니에게 이야기해야겠어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당기며 신랄한 조소를 날렸다.
엽연채는 더 이상 이 오라비를 구해 줄 생각이 없었다. 처절하게 당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니 미리 그에게 예고를 해 줘야 나중에 더욱 볼 만할 것이었다.
“엽승덕이 할아버지를 데리고 후조방에 간 건 할아버지에게 허서가 자신과 은정랑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어요. 할아버지는 글공부로 공명을 떨칠 수 있는 손자가 생겼다고 여기니 당연히 아버지를 도운 거죠.”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엽균은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찌나 화가 끓는지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넌 두 분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엽연채는 입가의 비웃음을 더욱 짙게 하더니 그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이고, 가엽게도. 우리 가여운 오라버니는 허서가 아버지와 정랑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 사람들은 매일같이 허서가 과거에 급제하면 바로 집안으로 들이고 오라버니를 내쫓을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또 허튼소리를 하는구나!”
엽균은 놀라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전에는 그저 철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이리 악독한 녀석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허서와 정랑을 중상모략하다니!”
엽연채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오라버니 말이 맞아요. 하, 사실 제가 거짓말을 한 거예요! 허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도 오라버니는 집에서 내쫓길 겁니다.”
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웃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엽균은 쫓아가려 했으나 다리가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동생이란 게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오라비를 저주하다니! 이렇게 악독하고 속이 시커먼 인간은 본 적이 없어! 정랑과 아버지가 그리할 리가 없다. 자기 속이 시꺼머니 다른 사람도 자기 같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큰공자님!”
이때 그의 시동 추풍이 뚱뚱한 몸을 흔들며 달려왔다.
“왜 이제야 오는 것이냐! 방금 전에는 어째서 숨어 있던 게냐!”
엽균이 사납게 호통치자 추풍이 몸을 웅크리며 변명했다.
“마음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추씨 가문 두 형제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어떻게 올 수 있었겠습니까?”
추풍은 그리 말하며 엽균을 부축했다.
“가시죠, 공자님.”
“먼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뵙고 가야겠다.”
너무도 억울한 엽균은 추풍의 부축을 받아 절름거리며 안녕당으로 돌아갔다.
안녕당 서차간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엽균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은 얼굴로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묘씨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고 엽영교의 눈에선 순간 비웃는 기색이 비쳤다.
손씨는 고소해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균아 몰골이 어쩌다 그리되었느냐? 큰아주버님과 똑같은데 설마 그 부인한테 두들겨 맞은 게니?”
“그러게 말입니다!”
추풍이 걸걸한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큰도련님께 큰아가씨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계셨는데 갑자기 부인이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달려와 공자님을 흠씬 두들겨 팼습니다.”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막돼먹은 여편네 같으니라고!”
“아버지,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엽승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씨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그를 꼬집었다. 외실을 끼고 사는 큰아주버님이 된통 얻어맞았고 또 곧 있으면 감옥에 들어가게 됐으니 나씨는 말 못 하게 속이 후련하던 참이었다. 쓰레기 같은 사내는 이런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나 엽승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한 식구인데 어떻게 큰형님을 정말로 감옥에 처넣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온사월에게는 양보해 사건을 무마할 생각이 전연 없으니 이제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엽승덕이 감옥살이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정랑을 쫓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엽학문은 두 선택지 중 무엇도 고르려 하지 않았다. 엽승덕이 감옥에 들어가면 아버지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내가 부윤을 찾아가 다른 방법이 있을지 알아봐야겠구나.”
낯빛이 어두운 엽학문은 그리 말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때, 유이가 안으로 들어오며 알렸다.
“후야, 부윤께서 또 사람을 보냈습니다. 일이 잘 마무리됐는지 여쭤 보시는데요? 잘 안됐으면 내일 오후에 심문을 하실 거라고 합니다.”
그 말에 엽학문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이 더욱 짙어졌다.
“내 지금 부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첫째 너도 함께 가자꾸나.”
그러자 엽승덕이 엽학문에게 말했다.
“전, 전 영존거로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 시간이면 허서가 스승님 댁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 아이가 걱정할지도 모르니 일단 거기 들른 후에 관아 문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가 보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이만 각자 처소로 돌아가거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손씨와 엽승신은 돌아가기 못내 아쉽다는 듯 꿈지럭대며 문을 나섰다. 이 재미있는 상황을 더 지켜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데 내일까지 기다려야만 하다니!
엽학문이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자 묘씨가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나리, 첫째가 나리께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녀 역시 은정랑이 엽승덕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라는 말 따위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설령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엽학문의 평소 성격을 미루어 볼 때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은정랑을 쫓아낼 사람이었다.
“당신은 신경 쓰지 마시오.”
엽학문이 고개를 돌리더니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묘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게도 말 못 하는 걸 보니 정말로 중요한 일인 게 틀림없었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엽학문은 환복을 마치더니 직접 광으로 가 가져갈 선물을 준비했다. 그러잖아도 정 부윤은 정3품의 관원으로 황제의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받는 자이니 자신은 그를 보면 웃는 얼굴로 아첨을 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쪽의 사정을 거듭 봐주고 있으니 당연히 그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해야 했다.
* * *
날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나니 벌써 축시丑時(새벽 1시~3시)의 절반이 지나간 후였다. 엽연채와 온사월은 마차를 타고 온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동안 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겠구나.”
온사월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엽승덕은 내 동생을 그리 대하고 내 동생은 또 변변치 않아 스스로 일어서지 못했구나.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내 동생은 균이의 친어머니다! 그런데 균이 그 불효막심한 놈이 외실 편을 들고 제 어미 편은 들지 않으니……. 너 혼자 버텨 내야 했구나. 거기다 하필 상대가 네 아버지이니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은 너를 불효녀라고 욕했겠지.”
“이젠 이모님도 함께해 주시잖아요.”
엽연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더니 이내 매서운 눈빛을 번뜩였다. 이번에 확실하게 손을 써서 두 인간짜를 몇 달 동안 감옥에 가둬 놓을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정 부윤은 청렴한 관리다. 오늘 그가 관리들끼리 서로 감싸 주기 위해 엽학문에게 몰래 소식을 알려 주기는 했지만, 이쪽에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그도 엽학문을 도울 수 없게 된다.
“연채야, 네 어미는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니 오늘 일은 우선 우리끼리 아는 걸로 하자. 며칠 후에 그 쓰레기 같은 것들을 감옥에 처넣으면 그때 네 어미에게 알려 주자꾸나.”
“예, 이모.”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일로 어머니는 엽씨 가문에서 잘 지내기 힘드실 거예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차라리 어머니가 엽승덕과 갈라서는 건 어떨까요!”
“갈라선다고?”
온사월과 추길이 일시에 깜짝 놀랐다.
“왜 갈라서야 한다는 것이냐? 갈라서면 그 개 같은 연놈들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뿐 아니겠더냐? 그것에게 네 어미의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니 말이다!”
온사월이 다급히 반대하고 나섰다. 엽연채는 예상대로의 반응에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고 대화의 흐름을 틀어 버렸다.
“우선 그 둘에게 맞설 방법부터 강구해요.”
“이미 잘 맞서고 있는데 왜 갈라서야 한다는 게냐?”
그러나 온사월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단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어미는 아들딸도 낳았고 거기다 너희는 이리 장성했다. 일이년만 더 지나면 손주도 품에 안을 수 있을 게다! 그런데 갈라서고 나면 무슨 꼴이 되겠느냐? 네 어미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괴로워할 것이다.”
“지금 상황이 이러니 아마 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미움을 살 거예요.”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을 토했다.
“정 그곳에서 못 지내겠으면 분가를 하면 그만이다. 어쨌든 갈라서는 건 절대 안 된다. 연채, 너도 참! 세상에 자기 어미에게 남편과 갈라서라는 녀석이 어디 있느냐?”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또한 전생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똑똑히 지켜보지 않았다면 이혼하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안후부에 계속 계시면 어머니는 절대로 행복해지실 수 없을 거예요.”
그러자 온사월이 그녀의 미간을 톡 튕기며 반박했다.
“넌 네 어미가 아닌데 네 어미가 행복할지 아닐지 어떻게 아느냐? 그리고 헤어지면 행복해질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느냐? 갈라서고 나서 오히려 더 괴로워하면 어찌하려고?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른다. 혼인은 단지 사내와 관계된 것만은 아니란다. 그 가족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외실에게 마음을 줘 버린 사내를 떠나는 것보다 그 가족을 떠나는 게 더 미련이 남는 법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