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53화 (153/858)

제153화

“그럼 어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너라.”

엽학문이 조바심이 난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러나 엽승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대했다.

“아버지, 지금 허서가 향시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아이의 신분이 공개되면 온씨와 나머지 식구들이 또 소란을 피울 거고 그럼 그 아이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데 영향을 줄 겁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엽학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네가 주도면밀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럼 그 아이가 향시에 붙은 후에 본래의 호적으로 입적하자꾸나.”

엽승덕은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허서의 입적을 제대로 준비하려면 우선 아버지에게 계획을 모두 털어놓고 그의 도움을 구해야 했다.

“아버지, 허서가 이렇게나 뛰어난 아이인데 서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자신도 물론 이렇게 뛰어난 손자를 서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아이를 온씨 밑으로 입적하려는 생각이냐? 그건 안 될 일이다.”

대제에는 정실부인에게 적자가 있을 경우 서자를 정실부인 밑으로 입적할 수 없게 하는 법령이 있었다.

“그건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엽승덕이 고개를 가로젓자 엽학문은 대화를 일단락했다.

“됐다. 이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두자. 밖에 아직 일이 한가득 남아 있다.”

기쁨도 잠시, 엽학문은 다시 열불이 뻗쳤다. 방금 전 자신과 온사월은 엽승덕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이렇게 귀한 손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은 자신의 귀한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 행동했던 것이니 칭찬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아들에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엽학문은 밖에 있는 온사월과 엽연채가 한층 밉고 원망스러웠다.

“후야, 말씀은 다 나누셨습니까?”

이때, 묘씨를 모시는 전 마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래.”

엽학문은 그리 말하며 문을 열어젖혔다.

밖으로 나온 부자는 전 마마를 따라 서차간으로 돌아갔다. 엽학문은 침상 위에 앉더니 우선 엽균을 쳐다봤다. 큰손자는 외모는 매우 출중했으나 실상은 재산이나 축내는 꼴불견의 한량이었다.

그는 그런 손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설설 가로저었다. 예전에는 보기만 하면 화가 치밀었는데 지금은 봐도 무감각했다. 조만간 버릴 녀석에게 무슨 감정이 들겠는가. 자신에겐 훨씬 더 뛰어난 손자가 있었다.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들은 기다리다 지친 상태였다.

“어찌 되셨나요? 이야기는 잘하셨습니까? 그 외실을 언제 쫓아낼 생각입니까!”

온사월이 냉큼 몰아쳤다.

엽연채는 엽학문의 표정을 훑어봤다. 희끗희끗한 굵은 눈썹을 높이 추켜세운 걸 보니 꽤나 격양되고 흥분한 게 틀림없었다. 엽연채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부인, 우리 한 발씩 양보합시다!”

엽학문이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발씩 양보하자고 하셨습니까!”

온사월이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방금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외실을 멀리 쫓아내면 고발 건을 철회해 줄 것이고 아니면 엽승덕과 그 외실이 함께 감옥살이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입니다.”

엽학문은 그녀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자 노발대발했다.

“그저 외실에 불과할 뿐인데 어째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오? 이건 인정머리 없고 도량이 좁은 겁니다! 아녀자의 투기는 칠거지악을 범하는…….”

“참나, 우리 어머니께서 정말로 그 여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그 여인이 어떻게 밖에서 6년 동안 부인 행세를 하며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엽연채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자 엽학문의 얼굴은 굳어졌고 엽연채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것이…….”

“어머니께서는 그 여인을 받아들였는데 그 여인이 한 짓은 엽승덕과 함께 우리 어머니 혼수품에 손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참 궁금하네요. 어느 가문 외실이 부인의 혼수품에 손을 댈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단 말입니까? 우리 정안후부에는 그런 규율이 있나 보죠?”

“이!”

엽연채는 더욱 조롱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고, 엽학문은 그녀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화가 나 눈앞이 다 캄캄해졌다.

“그런데 궁금하네요. 방금 전만 해도 할아버지께서는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시며 분명 아버지에게 은정랑을 쫓아내라고 분부하셨는데, 갑자기 아버지를 따라나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오시더니 잘잘못도 제대로 안 가리시네요.”

엽연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을까요?”

그 말을 들은 엽학문은 순간 뜨끔하여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되었다. 허서가 자신의 친손자란 사실을 온사월이 알고 난리를 치는 건 별로 겁날 게 없었지만, 그리할 경우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될 터였다.

밖에서 떠돌던 혈육을 자신의 자손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는 별일 아니었지만, 온사월은 이 일을 핑계로 허서를 간통한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공격해 그가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없게 만들 것이었다.

간통으로 자식이 태어나는 사건은 보통 지금 일어난 혼수 사건처럼 친고죄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어쨌든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과거 시험 준비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아비가 말하길 은정랑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줬다고 했다. 요 몇 년 동안 그 여인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라고 말이다. 생명의 은인인 이상 가차 없이 내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혼수품들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집에 그대로 있으니 네 아비가 돌려주면 해결되는 일이다. 굳이 이렇게 이치 운운하며 지나치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겠느냐!”

“우리가 이치를 따져가며 몰아붙이는 게 뭐 어떻다고요?”

온사월은 냉소를 지으며 사납게 몰아붙였다.

“우린 그 말을 믿지 않으니 그 수에 걸려들지도 않을 겁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 외실을 쫓아내면 이 사건은 없던 일로 하되, 대신 증거 문건을 남길 겁니다. 또다시 그 외실과 사생아와 관계를 이어가 그 사실이 발각될 경우 감옥살이를 한다는 내용이죠. 만약 그 외실을 내쫓지 않을 경우 엽승덕과 그 외실은 함께 감옥살이를 하는 겁니다.”

“그래, 좋소! 내 그럼 감옥살이를 하겠소!”

엽승덕은 화가 나 호통을 쳤고 만면에 비웃음을 흘렸다.

“그 집은 내 집이고 내 집 안에 물건들을 놔둔 것이니 내가 물건을 가져간 것이라 볼 수 있소. 정랑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내가 감옥살이를 하면 될 것 아니오!”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는 엽승덕이 감옥살이를 할지언정 그 외실은 끝까지 보호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는 당장이라도 엽승덕을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특히 온사월은 분통이 터져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이 인간말종이 마음을 전부 그 외실에게 바치고 있으니 여동생은 그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동안 홀로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뎌 왔을까?

“그러시오! 그럼 가서 감옥살이나 하면 되겠구려!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 그만 가자꾸나!”

말을 마친 온사월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추씨 형제와 함께 잰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그녀는 그 외실을 해치워 버리지 못해 대단히 한스러웠고 엽승덕이 그 외실을 내치는 꼴을 전보다 더욱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연채야…….”

엽영교가 엽연채를 잡아당기며 작게 불렀다. 그녀는 온씨가 너무 가여웠고 자신의 큰오라비는 그 외실 때문에 감옥살이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니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엽학문의 싸늘한 눈빛을 받던 엽연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먼저 자리를 뜬 온사월은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엽연채가 앞뜰을 지나 안녕당을 나서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채야!”

엽연채가 고개를 돌리자 엽균이 그녀의 뒤를 다급히 쫓아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차갑게 물었다.

“날 무슨 일로 찾는 거예요?”

“너, 너 그걸 몰라서 묻느냐?”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금 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네가 아무리 정랑이 밉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그리해서는 안 된다!”

“내가 뭘 어쨌는데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조금 전보다 더욱 조롱기 섞인 비웃음을 날렸다.

“지금 어머니의 물건을 훔쳐 그 외실에게 갖다 바친 건 아버지예요. 아버지를 비난하고 어머니를 위해 공정한 처리를 요구해야 마땅하지, 어떻게 오히려 날 책망하는 겁니까?”

“이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저 물건 몇 개 가져간 것뿐이다. 좀 더 관대해지고 너그러운 마음을 보일 수는 없단 말이니?”

엽균은 생각이 꽉 막힌 엽연채가 꼭 벽창호처럼 느껴졌다.

“됐다. 넌 도량이 좁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정랑을 돕지 않는 건 그렇다 치자. 하나 아버지는…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더냐. 넌 어떻게 아버지가 감옥살이하는 걸 눈 뜨고 보겠다는 게냐. 거기다… 네가 직접 아버지를 감옥으로 밀어 넣다니! 어쩜 그리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이냐!”

“잔인하다고요?”

그 말에 엽연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화가 나 피를 토한 건 잔인하지 않고요?”

엽균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별 탈 없지 않았느냐?”

“별 탈 없었다고요? 그래요! 아버지도 그저 감옥에서 썩는 것뿐이에요. 목을 베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일 있겠어요? 오라버니가 아버지 일에는 그리 마음 아파하는 걸 보니, 오라버니에겐 아버지만 아버지고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닌가 보죠? 나가 죽어 버려요!”

엽연채는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며 그를 확 밀쳐 버렸다. 엽균은 휘청거리다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너…….”

“이런 고얀 놈을 봤나!”

그런데 이때 불호령 같은 호통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균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온사월이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려는 겁니까!”

엽균은 깜짝 놀라 일어서려고 했으나 온사월이 한발 먼저 그에게 달려들어 손에 쥔 커다란 몽둥이를 휘둘렀다.

“고얀 놈! 내 동생이 왜 그렇게 비참하게 지냈는가 했더니 이 빌어먹을 아들놈마저 그 외실 편을 들고 있었던 거구나. 외실을 두둔하며 제 어머니를 괄시하다니!”

“아아악!”

엽균은 온사월에게 매질을 당하자 죽어라 비명을 질러댔다. 그가 일어서려고 하자 추씨 가문 형제들이 그에게 냅다 발길질을 해 도로 자빠뜨렸다. 온사월의 손에 쥔 몽둥이가 쉬지 않고 엽균에게 날아들었다.

“가족과 남 중 누가 우선인지도 모르는 돼먹지 못한 놈. 돼지처럼 아둔한 이 빌어먹을 놈을 내 요절을 내고 말 것이다!”

온사월은 눈물을 떨구며 혼쭐을 냈다. 그러나 나중에는 때릴 기력마저 없어졌는지 손안의 커다란 몽둥이가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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