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엽학문은 엽승덕에게 크게 실망했다. 고작 외실 하나 때문에 거듭 소란을 피워대고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큰아들 가족은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적장녀는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을 갔고 적장자는 놀고먹기나 하는 구제불능의 무능한 놈이었다.
반면, 둘째 아들네에는 희망이 있었다. 아들놈이 좀 부족하긴 해도 엽이채가 시댁에서 잘 버티고 있지 않은가. 장만만 일로 지금은 장씨 가문에서 고생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년에 적장자를 낳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었다. 그리고 장박원이 향시에 급제하고 진사가 되면 그의 앞날은 더없이 창창할 테니 자연히 친정집도 보살펴 줄 것이다.
“전부터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희 정안후부의 앞날과 직결된 중요한 일입니다.”
엽승덕이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엽학문은 화가 한층 치밀어 올라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외실에게 홀려 있는 빌어먹을 놈이 집안의 앞날에 대해 개뿔 뭘 안다고 떠들어대는 게야!”
엽학문이 상스러운 말을 뱉자 엽승덕의 기품 있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버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니 들어 주세요.”
“그래! 말해 보거라! 어디 들을 만한 소리인지 보자꾸나!”
“이 일은… 아버지와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엽승덕은 그리 말하더니 냉담한 눈빛으로 엽균을 쓱 쳐다봤다. 이 일은 아직 엽균이 알아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또 한바탕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인데 그러시는 겁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한 식구인데 저희에게 말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씨앗을 까먹던 손씨가 미소를 지으며 참견했다.
“아버지, 다른 데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그러나 엽승덕은 엽학문에게 고집스레 청할 뿐이었다.
엽학문은 엽승덕이 또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 온사월과 그녀의 두 아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되어 순순히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온사월과 추씨 가문 형제들은 엽승덕이 분명 술수를 부릴 요량임을 뻔히 알았으나 가만있었다. 어차피 이미 여기서 할 이야기는 다 했고, 그들이 무슨 상의를 하든 간에 자신들은 한 발짝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안녕당 서차간에서 나온 엽승덕과 엽학문은 후조방後罩房(본채 뒤에 나란히 지은 가옥)의 한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지 속히 말해 보거라!”
엽학문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엽승덕은 문을 닫고 나서야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엽학문은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더욱 역정을 냈다.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간에 그 외실과 사생아는 들일 수 없다.”
“아버지, 사생아라고 부르지 마세요. 허서는… 허서는 제 친아들입니다!”
엽승덕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생아가 사생아지. 내가 그렇게 못 부를 게 뭐가 있느냐……! 잠깐, 너 방금 뭐라고 했느냐?”
막말을 서슴지 않던 엽학문은 순간 온몸이 경직됐다.
“허서는 사생아가 아니라 제 친아들입니다.”
엽승덕은 미소를 지으며 반복했다.
“허서는 저와 정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란 말입니다.”
“뭐라?”
엽학문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어떻게 그런……! 여태껏 한 번도 말하지 않았잖느냐!”
이렇게 말하면서도 엽학문은 이미 아들의 말을 거의 믿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엽승덕은 허서에게 너무나도 잘해 줬다. 친자식이 아니라면 정랑을 아무리 아낀다 해도 군식구인 허서는 어떻게든 치워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남의 자식을 위해 그렇게 애를 쓰며 책도 사 주고 공부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엽승덕은 엽균보다 허서에게 훨씬 더 신경을 쓰고 마음을 기울였다.
“너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저와 정랑은… 18년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엽승덕이 말을 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시 동창과 함께 상주常州에 있는 벗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청석골을 지나가던 도중 그만 뱀에게 물리고 말았고, 부축을 받아 정랑의 집으로 가게 됐습니다. 정랑은 저를 살뜰히 보살펴 줬고 약을 몇 번 먹고 나니 뱀독은 말끔히 제거됐죠.
그런데 그날 밤, 제가 동창과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랑을 보고서는… 제가 그만… 다 제 잘못이었습니다. 이튿날 정랑은 무서워서 도망을 쳐 버렸어요.
저희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제 동창은 그만 떠나자고 저를 재촉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집으로 돌아온 다음 방법을 강구해 정랑을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찾아갔을 때 정랑은 이미 시집을 가 버린 후였죠. 슬펐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후 정랑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던 겁니다. 정랑은 하는 수 없이 홀몸으로 아이를 데리고 도성으로 와 친척들에게 의탁하려고 했는데 그들은 정랑을 모른 체했죠.
그래서 정랑은 아이를 데리고 자수 상점에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인연인 건지 제가 우연히 그 자수 상점에서 정랑과 마주쳤던 거죠. 그래서 정랑과 그 아들이 지낼 수 있도록 송화 골목에 거처를 마련해 줬던 겁니다.”
“잠깐, 너는 그 아이가 그 여인의 사별한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네 아이인 줄 어떻게 안다는 게냐?”
엽학문이 경계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제 혈육이 분명한걸요…….”
엽승덕이 얼른 답했다.
“저와 정랑 사이 오월에 그 일이 있었고 팔월에 그 사람이 출가해서 이듬해 삼월에 허서를 낳았으니……. 제 아이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던 겁니다.”
“조산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래도 엽학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의심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셔도 됩니다. 그때 당시 아이를 받았던 산파가 아직 살아 있으니 그자에게 허서가 개월 수를 다 채우고 태어났는지 물어보시면 됩니다. 그리하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신다면 적골법으로 친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해 보았고 저희는 부자 관계가 확실합니다.”
엽승덕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통해 확인해 봐도 된다고 말하자 엽학문은 그의 속임수에 거의 넘어가 버렸다.
“그럼 6년 전에는 왜 이 일을 나에게 알려 그 여인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은 것이냐?”
엽승덕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을 이었다.
“그게… 처음에는… 저도 그 아이가 제 아이인 줄 몰랐습니다. 정랑이 저에게 감추고 있었거든요. 집안에 이미 균이가 있으니 정랑은 이 아이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아 저에게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엽학문은 그 말을 듣더니 정말 좋은 여인이라며 감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3년 전 허서가 한번은 자기가 개월 수를 못 채우고 태어났다고 말하길래 제가 의심이 들어 몰래 적골법을 써 봤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이가 제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제가 캐물으니 그제야 정랑이 저에게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버지, 허서는 사생아가 아니라 제 친아들입니다.”
엽학문은 별안간 허서가 재능이 우수해 공명을 떨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럼… 정말 사생아가 아니겠구나.”
사실 이치를 따지자면 허서가 허대실의 아들일 경우 그는 성과 이름이 있고 친어머니와 친아버지가 있으니 사생아라고 부를 수 없다. 그가 정말 엽승덕과 은정랑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어야 사생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엽학문은 남의 자식이라고 여길 때야 주저 않고 사생아라고 불렀지만 자신의 손자라 믿게 됐으니 더는 사생아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사실을 알게 됐는데 어째서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냐?”
“아버지는 온씨가 어떤 성품인지 모르십니까? 균이는 한량인데 허서는 의욕도 넘치고 글공부도 하니 그 사람이 허서를 품어 주겠습니까?
더군다나 허서의 공부에 있어서 요 몇 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아들로 인정받고 이 집에 들어왔으면 온씨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난리를 쳤을 텐데 그럼 그 아이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엽학문은 엽승덕의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뜨거워졌고 온씨가 점점 더 탐탁지 않아졌다.
“온씨는 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 언니의 성품을 보거라. 막돼먹은 여인이 아니더냐? 이제… 그 아이가 팔월 향시에…….”
엽학문은 말을 할수록 가슴이 점점 더 벅차올랐다.
“예. 허서는 다음 달에 있을 향시에 응시할 겁니다. 그 아이의 스승도 허서가 합격할 거라고 자신감이 넘치더군요!”
엽승덕이 쐐기를 박았다.
“원래는 허서가 급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께 깜짝 선물을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아버지, 곧 과거에 급제한 손자가 생길 겁니다.”
“너, 너도 참. 어떻게 이리 꽁꽁 숨겨 두었던 게냐.”
엽학문은 입으로는 아들을 나무랐지만, 그의 어조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껏 격양돼 있었다.
‘내게도 향시에 급제한 손자가 생기게 된다! 향시에 급제한 손자가 생긴다는 말이다! 마침내 의욕 넘치고 글공부를 하는 손자가 생겼고, 거기다 좀 있으면 향시에 급제할 거란다!’
엽학문은 터질 듯 부푼 가슴을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엽학문은 공훈 귀족일 뿐 아니라 진사 출신이었으니 자연히 학문을 익히는 사람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과 손자 모두 학문을 익히는 것에는 영 신통치가 않아 그는 분통이 터졌다. 하나같이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이었다.
특히나 손자는 더 했다. 두 손자 중 하나는 놀고먹을 줄만 아는 한량이었고, 다른 하나는 매일 콧물이나 질질 흘리고 다니며 시도 제대로 읊을 줄 모르는 백치였다. 이 두 손자 놈 때문에 엽학문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장찬 그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 사내는 시험에서 자신보다 한 등수 처졌는데도 이미 정3품의 고관이 되었다. 또한 그 아들은 별 볼 일 없지만 손자는 소년수재였다.
엽학문은 꿈에서조차 글공부를 잘하는 손자가 생기길 간절히 또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지금 능력 있는 다 큰 손자가 거저 생긴 것이었다. 학문을 익힐 뿐만 아니라 재능이 뛰어나 공명을 떨칠 수 있다는 소리를 듣는 녀석으로, 다음 달에는 향시를 볼 것이라고 한다.
향시에 합격하면 내년에 있을 춘시에서 진사가 될지도 모른다. 장원탐화狀元探花(전시殿試에서 3등 안에 합격한 사람의 총칭, 1등이 장원, 2등이 방안, 3등이 탐화임)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잘난 손자가 생겼는데 손녀사위인 장박원에게 기댈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럼 아버지… 정랑을 쫓아내야 한다는 저들의 말은…….”
엽승덕이 엽학문을 쳐다보며 운을 뗐다. 그러자 엽학문은 노기 어린 눈빛으로 엽승덕을 노려보며 선을 딱 그었다.
“쫓아내기는 무슨. 내 큰손자의 어미다. 어찌 쫓아낸다는 말이냐!”
엽승덕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 아버지가 자신들의 편에 설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준비가 덜 된 상태라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