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유이가 엽승덕을 흘깃 봤다. 엽승덕은 낯빛이 변하더니 노성을 내질렀다.
“너……! 너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망발이 아닙니다.”
유이가 새파란 얼굴로 설명했다.
“부윤께서 보낸 심부름꾼 아이가 전하길, 첫째 마님 언니분께서 마님이 친정집에 두었던 혼수 단자를 들고 관아로 가셨는데 포졸들을 송화 골목으로 보내 수색해 보니 정말로 도둑맞은 물건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졸들이 은정랑을 끌고 관아로 갔다고 합니다.”
“뭐라!”
엽승덕이 싸늘한 호통을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옆에 있던 엽균도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엽영교는 은정랑 때문에 부자가 이리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엽승덕이 당장 뛰쳐나갈 태세자 묘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큰애야, 지금 어디 가려는 게냐? 설마 관아로 달려가 그 외실을 빼내려는 게냐? 네게 그리할 능력이 있다면 가 보거라!”
엽승덕은 어서 달려가 은정랑을 빼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묘씨의 지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로는 그녀를 감옥에서 구할 수 없었다. 부윤이 사람을 시켜 이리 말을 전해 온 건 이 사건은 없던 일로 해 줄 수 있으니 대신 자신들 선에서 조용히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은정랑이 붙잡혀 가긴 했지만, 그 집은 세자야의 집이며 따지고 들면 세자야께서 아내의 물건을 가져온 거니 작게 보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대충 집안에서 상의해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윤 대인께서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집안사람들끼리 잘 처리하라고 하신 겁니다.”
유이가 말을 보태자 화가 날 대로 난 엽학문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그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희끗희끗한 수염을 씰룩거렸다. 그러더니 엽승덕 앞으로 다가가 그를 냅다 걷어차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어떻게 된 게 하루가 멀다 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큰아주버님께서 잘못하긴 했지만 따지고 들면 큰형님의 언니라는 분이 너무 거세게 몰아붙이는 겁니다. 뭐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한답니까! 다 한 식구인데 관아에 고발까지 하다니요.”
손씨는 세상이 조용하면 난리라도 나느냐고 비꼬는 듯한 냉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녀는 당연히 엽승덕이 곤경에 빠지는 걸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 온씨와 엽연채가 난처해진 모습을 더욱 보고 싶었다. 엽승덕이 온씨 모녀를 해치는 걸 봐야 속이 후련할 테니 지금은 그를 두둔하는 것이었다.
손씨가 한 말이 바로 엽학문이 생각하는 바였다. 뭐 큰일이라고 관아에 고발까지 한단 말인가.
“가서 얼른 첫째의 언니분을 모셔오너라!”
“첫째 마님의 언니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유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은 지금 친정에서 묵고 있다. 큰애도 온씨 가문에 갔으니 네가 가서 데려오너라.”
엽학문이 성난 목소리로 대답하자 유이는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각쯤 지났을 때, 온사월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엽연채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엽연채는 온사월 등과 영존거를 떠날 때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분명 관리들끼리 서로 감싸 줄 테니 말이다. 부윤은 이 일을 엽학문에게 알려 조용히 협상해 해결하라고 귀띔했을 터였다.
“연채 너는 어찌 온 것이냐?”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안 올 수가 있나요?”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손씨는 엽연채를 보더니 얼른 비웃는 얼굴로 입을 나불댔다.
“아이고. 이 일은 자세히 따져 볼 것도 없습니다. 분명 연채가 큰형님 언니분이 이리하도록 부추겼을 겁니다. 연채 아가씨가 제일 잘하는 게 공연히 시비를 거는 일 아닙니까.”
엽학문의 관자놀이 부분이 툭 불거졌다. 그는 손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 장손녀는 시집간 후로 시도 때도 없이 소란을 피워댔다.
엽승덕은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쏘아봤고 엽균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실망한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소?”
온사월은 쿵쿵 소리를 내며 손씨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친어머니가 수모를 당해도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거요? 어머니를 위해 나서는 게 소란을 피우는 거라는 말이오? 집안의 화목을 위해서라면 내 여동생은 있는 대로 수모를 당하고 분을 못 이겨 각혈해도 된다, 이거요?”
손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냉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뭐가 됐든 간에 친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는 건 아니죠! 난 이렇게 불효막심한 여식은 본 적이 없거든요.”
“이!”
온사월이 막 반박하려는데 엽연채가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온사월은 엽연채를 쳐다보더니 참고 입을 다물었다.
“크흠.”
묘씨가 잔기침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온사월에게 인사했다.
“부인, 그리고 두 분 공자님, 먼 길 오셨습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연채야, 부인,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엽영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엽연채를 끌어당겼다. 묘씨의 오른쪽 하좌에는 권의 두 개가 비어 있었다. 엽영교는 온사월과 엽연채를 데려가 자리에 앉힌 뒤, 추경과 추랑에게도 손짓했지만 그들은 손사래를 치더니 온사월과 엽연채 뒤에 섰다.
여종이 차를 내오자 엽학문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는 온사월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어떻게 입을 열어야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엽연채가 함께 자리하고 있으니 그녀를 나무라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리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라는 딱 한 글자로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엽학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엽승덕이 싸늘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노려보며 꾸짖었다.
“넌 하루 종일 소란 피울 생각만 하고 도리는 조금도 모르는구나! 아주 막돼먹은 계집애가 따로 없구나!”
“이!”
표정이 굳어진 온사월이 그의 말을 자르려 하자 엽연채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요. 전 도리를 모릅니다! 그럼 아버지는 도리를 퍽도 잘 알아 어머니의 혼수품을 훔쳐 그 외실에게 갖다 바치셨나 보네요. 제가 도리를 몰라 봤자 그저 막돼먹은 계집애에 불과할 테지만 아버지는 도둑이 아닙니까! 도둑! 저희 가문이 학문과 예를 숭상하는 집안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도둑은 없었습니다.”
엽승덕은 수치심에 화가 치밀어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엽연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외실을 데리고 살고 싶으면 본인의 능력으로 하세요. 집안 물건을 가져다 외실을 부양하는 데 쓰지 마시라고요! 아, 집안 물건을 가져다 쓰는 건 되겠네요. 그럼 집안에 첩을 들인 게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 어머니 혼수품을 그 외실에게 갖다 바쳐서는 안 되죠! 외실에게 어머니 물건을 건네면서 어머니를 그렇게 모질게 대하다니! 어머니 젖을 먹고 크면서 어머니를 욕하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아버지처럼 비열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엽승덕은 너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네가 방금 외실을 데리고 산다고 말했지! 그럼 허서도 온씨의 아들인 셈인데 아비가 아들에게 물건을 좀 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엽연채는 입가에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아, 지금 외실이라고 인정하신 거네요! 그럼 그 여인을 집안으로 들여 우리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첩실로서 예를 올리게 해야죠. 어머니께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요리를 만들어 어머니께 권하며 예를 다해야죠!
그러지 않으면서 무슨 까닭으로 첩실의 대우를 누리려는 겁니까? 첩실의 대우는 받게 하고 싶고 또 우리 어머니 물건은 훔쳐다 쓰게 하면서 첩실이 겪는 수모는 사절이다? 아버지처럼 뻔뻔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이 불효막심한 것……!”
엽승덕이 탁자를 치며 일어서려고 하자 온사월이 그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엽학문과 묘씨를 무섭게 노려보며 목청을 돋웠다.
“사돈어른, 안사돈. 저한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이겁니까? 외실이 제 동생에게 첩실로서 예를 다하지 않으려 하는 걸로 모자라, 밖에서 부인입네 마님입네 같잖은 행세를 하며 제 동생 물건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제 동생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자길 먹여 살리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엽학문도 엽승덕, 은정랑 이 빌어먹을 것들 때문에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고 수치심에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아무리 봐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 아내의 혼수품에 손을 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짓이었다. 그런데 이 불효막심한 아들놈은 그걸 첩실에게 갖다 바치기까지 했다.
“아이고… 다들 한 발씩 양보하시지요. 이렇게 거북한 이야기를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엽승강이 걸걸한 목소리로 상황을 중재했다. 그러자 묘씨도 몹시 난처해하는 얼굴로 맞들었다.
“그래요. 한 걸음씩 양보하시지요! 그럼… 부인은 저희가 어떻게 해야 관아에 고발한 것을 취하해 주시겠습니까?”
“아, 저희는 이미 양보했습니다. 그 외실을 쫓아내시면 됩니다!”
온사월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쫓아내겠습니다!”
엽학문은 진작부터 그 외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들놈을 이렇게 홀려 놓다니! 전에는 크게 품위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저 좀 노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리분별도 못 해 집안을 말아먹을 종자가 되어 버렸다! 엽학문은 더 이상 그녀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럴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엽승덕이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엽학문은 음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꿈도 꾸지 말라고 했느냐? 그래 좋다. 이젠 아비도 눈에 안 보이나 보구나? 그 외실과 함께 살고 싶으면 정안후부에서 나가거라. 내 당장 황제 폐하께 정안후부 세자 자리에서 널 폐위해 달라고 할 것이다. 어디 그 외실과 사생아 놈과 한번 잘 살아 보거라!”
그 말에 엽승덕은 안색이 확 변했다. 반면 엽승신과 손씨는 두 눈을 반짝였다. 이거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경사가 아닌가! 큰아들이 폐위되면 세자 자리가 자신들에게 떨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