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송화 골목으로 가 보니 영존거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자 추랑이 대문을 발로 걷어찼고 포졸들은 벌떼처럼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네?”
진 마마와 두 여종은 포졸들이 안으로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은정랑이 다급히 방에서 나와 보니 또 온사월이 이곳에 들이닥쳐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엽연채와 포졸까지 함께 온 상황이었다.
은정랑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여,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물건은 방 안 다층 진열장에 있습니다!”
추길이 큰 소리로 외치며 포졸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포졸들이 물건을 한 아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것들이 바로 도둑맞은 물건입니다! 저희 마님의 물건인데 저 도둑년이 훔쳐간 겁니다.”
“난 그런 적 없어!”
은정랑은 그 물건들을 보고 안색이 확 변하더니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난 물건을 훔치지 않았어. 그런 적 없다고!”
그러나 모 비장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그랬는지 아닌지는 관아에 가서 심문을 받을 때 이야기하시오.”
“날 잡아갈 수 없을 겁니다! 난 정안후부 세자의 사람이며 이 집은 정안후부 세자의 집입니다. 어엿한 정안후부 사람들이 왜 물건을 훔치겠습니까?”
은정랑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반박했다.
모 비장은 정안후부라는 말을 듣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정안후부면 평범한 부호가 아니라 권세 있는 귀족이므로 가급적 밉보일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모 비장은 저도 모르게 온사월을 쳐다봤다.
온사월은 냉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물었다.
“네가 정안후부 사람이라고 했느냐? 대체 누구기에 내가 모른단 말이냐?”
표정이 굳은 은정랑은 울음 섞인 새된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비장 나리, 저희는 정말 정안후부 사람이고 이곳은 정말로 세자의 처소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세자야께 물어보시면 되니 세자야를 이리로 모셔와 주세요.”
그러자 모 비장은 순간 뜨끔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은정랑은 또 엽연채를 쳐다보며 하소연했다.
“연채 아가씨,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나리는 아가씨의 아버지인데 이렇게 불효를 하시면 안 되죠! 아가씨가 절 싫어하고 미워하신다고 이렇게 아버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면 안 됩니다. 관아 사람들을 불러 아버지를 잡아가서도 안 되고요!”
그 말에 모 비장의 눈꺼풀이 떨렸다. 알고 보니 이자들이 다 한집안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온사월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함부로 연채를 끌어들이지 말거라. 비장 나리는 내가 모셨으니 연채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 괜한 소리로 비장 나리를 현혹하지 말거라!”
그러더니 다시 비장을 쳐다보며 강조했다.
“도둑맞은 물건이 여기 있으니 절도 사건 아닙니까? 그러니 어서 이자를 관아로 데려가 조사하시지요.”
그러자 은정랑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리, 이 물건들은 전부 정안후부에서 가져온 겁니다. 이곳은 정안후부 세자야의 집이니 세자야께서 자신의 물건을 가져다 이곳에 두신 것뿐입니다.”
모 비장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어머, 언제부터 우리 어머니 혼수품이 엽승덕의 개인 소유물이 되어 당신 같은 외실에게 갖다 바쳐진 거야?”
엽연채는 붉은 입술을 씨익 올리며 냉소를 짓더니 날카로운 눈빛을 모 비장에게 향했다.
“아내의 혼수품은 개인 재산이니 설령 남편과 시댁 식구들일지라도 털끝 하나 손대서는 안 됩니다. 손댄다면 그건 절도이지요!”
모 비장은 갈팡질팡했다. 그는 권세 있는 귀족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수색을 했더니 실제 도둑맞은 물건이 나왔고, 또 엽연채와 온사월이 절대로 그냥 놔줄 기세가 아니라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선 데려가거라.”
그러자 포졸들이 앞으로 나와 은정랑을 포박했다.
은정랑은 포졸들에게 끌려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난 훔친 적 없어! 이건 날 모함하는 거야! 난 그런 적 없어! 세자야, 어서 세자야를 모셔오거라!”
“마님! 마님!”
진 마마와 여종들을 은정랑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더니 다급한 마음에 큰 소리로 연신 그녀를 불렀다. 이에 온사월이 앞으로 다가가 진 마마와 여종들을 노려보더니 냉소를 지었다.
“마님? 그래, 지금 마님이라고 했느냐!”
진 마마와 여종들은 낯빛이 확 변했다. 새파랗게 질린 그들은 감히 입을 벙긋할 수도 없었다.
“가자꾸나!”
온사월이 냉랭한 목소리로 엽연채와 아들들에게 일렀다.
포졸들은 이미 은정랑을 조그만 마차 안으로 밀어 넣은 후 관아를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모 비장과 포졸들은 은정랑을 체포해 관아로 돌아갔다.
모 비장은 마침내 이 사건의 경위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정안후부 세자가 외실을 데리고 사는 건 도성의 거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처의 혼수품을 외실에게 갖다 바쳤던 것이다. 이에 본처의 친정 식구들이 관아로 찾아와 그가 아내의 혼수품을 도둑질했다고 고발한 상황이었다.
모 비장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권세가들은 이런 집안일이 생기면 일단 문을 걸어 잠근 다음 자신들이 알아서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관아에 고발해 처리하려는 귀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모 비장은 이런 큰일을 감히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어 정 부윤을 찾아가 그에게 사건을 전달했다.
정 부윤은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라 큰 사건이 일어나면 대충대충 처리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곤 하나 이런 집안일은 또 사정이 달랐다. 그가 부윤의 자리에 이리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건 그도 암묵적 관행을 따라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들의 편의를 봐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정 부윤은 고민하더니 심부름꾼 아이를 시켜 정안후부에 상황을 알렸다. 온사월이 송화 골목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며 엽승덕이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팼고 엽승신 형제가 와서 그녀를 말렸으니 집으로 그녀를 불러 잘 달래라는 것이었다.
* * *
그 시각, 안녕당.엽학문과 묘씨는 침상에 앉아 있었고 엽승덕 부자, 엽승신 내외, 엽승강 내외, 엽영교는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아 온사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엽학문이 어두운 낯빛으로 성을 냈다.
“어째서 아직도 안 오는 게냐? 분명 골목 어귀로 나와 마차에 올랐다고 하지 않았느냐? 벌써 한참을 기다렸다!”
엽승신이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 이유를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자 엽승강이 말했다.
“그 사람들이 마차에 오르는 걸 제가 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두 사람을 떼어 놓을 때 그분이 큰형수님을 위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안 올 리가 없습니다!”
“올 엄두가 안 나나 보네요. 와 봤자 질 것을 아는 거죠.”
손씨가 허허 웃으며 조롱했다. 그녀는 처형에게 두들겨 맞은 엽승덕을 보고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엽승덕 일가에선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소란이 끊이질 않았다.
‘쯧쯧. 이번 일은 정말 볼 만하겠어.’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번에는 온씨를 찾았다.
“큰애는? 어째서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이냐?”
“큰오라버니의 하인이 전해 준 이야기로는 큰오라버니가 두들겨 맞기 일각 전에 큰 새언니가 기쁜 얼굴로 외출하면서 큰언니가 도성에 와서 친정집에 가 봐야겠다고 했대요.”
엽영교는 사정을 알리면서 고소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엽승덕을 쓱 쳐다봤다. 큰 새언니는 친정집에서 언니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큰언니는 그 시각에 송화 골목에서 엽승덕을 두들겨 패고 있었을 테니까!
엽영교는 진작부터 엽승덕의 행실이 그 모양이니 누군가에게는 매질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씨는 그를 매질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남편을 매질한 악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며 진짜 매질할 경우 사람들은 ‘저러니까 남편이 외실을 끼고 살지.’라는 말까지 꺼내 엽승덕을 두둔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 매질을 할 수도 없었다. 어찌 됐든 엽승덕은 자신의 오라비이니 그를 매질하면 아버지가 공연히 말썽을 피운다며 도리어 저를 나무랄 것이었다.
엽연채는 더더욱 그를 매질할 수 없었다. 엽승덕이 아무리 파렴치한 인간말종이라도 딸이 부친에게 손을 대면 안 됐다. 그랬다가는 엽연채에게 ‘불효녀’라는 맹렬한 비난이 퍼부어질 것이었다. 오직 온씨의 친정 식구만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엽승덕을 매타작할 수 있었다.
안녕당에서 온사월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인내심이 바닥 날 찰나, 밖에서 누군가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후야!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냐?”
엽학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지난번에 유이가 ‘큰일 났다!’라고 알려 왔을 때 둘째 내외가 엽이채의 혼수를 도박으로 홀랑 날려 먹었단 소식을 접하게 됐다.
유이는 엽학문의 호통에 놀라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이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길쭉하고 네모난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정 부윤의 수하가 후야께 전할 말씀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그자가 말하길…….”
“뭐라고 하더냐?”
엽학문은 정 부윤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당장 눈썹을 씰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묘씨와 엽승덕 등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승덕이 일은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고 오마.”
그 말에 엽승덕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에 무슨 심각한 일이 생긴 거라면 아버지의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에게는 정랑의 일을 처리할 시간이 생기는 셈이니, 정랑이 집안사람들에게 물어뜯기는 참사를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엽영교는 분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파렴치한 큰오라버니를 드디어 손봐 줄 수 있는 짜릿한 순간이 왔는데, 하필 또 다른 일이 생겨 미뤄지고 말다니!
그런데 유이가 이상한 표정으로 엽승덕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세자야와 관련된 일입니다! 첫째 마님의 언니분께서 관아로 달려가… 세자야를 고발했다고 합니다.”
엽승덕은 ‘고발’이라는 말에 경악해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라? 고발을 해? 뭘 고발했다는 말이냐?”
축첩은 합법이니 고발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없었다.
“첫째 마님의 언니분께서 세자야께서 첫째 마님의 혼수품을 도둑질했다며 고발하셨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