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양왕 전하의 육 측비 마마가 네 친척이더냐?”
진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추궁했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조차 우리에게 하지 않다니. 우리가 네 덕이라도 보려 할까 봐 걱정이 되었느냐?”
그 말에 엽연채가 피식 웃으며 해명했다.
“따지고 들면 도성 사람들 중에 친척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육 측비 마마는 저희 이모의 먼 사촌 시누이입니다. 저희 이모하고도 데면데면한 사이이신데 제가 그분과 친할 리가 있겠습니까?”
진씨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사돈에 팔촌까지 다 따지면 친척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육 측비가 엽연채를 친척이라 부른 것도 그냥 그녀를 띄워 주려던 호의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됐으니 그만 돌아가 쉬거라! 묘화, 너도 이만 돌아가거라!”
진씨가 냉담하게 물리자 엽연채와 주묘화는 처소로 돌아갔다.
* * *
백여언과 태자의 일로 궁 안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어쨌든 남녀가 살을 맞대었으니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본래 태후의 생각은 측비를 두 후보 중에서 고르고 백여언을 첩실로 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알게 된 황제가 작고한 백 상서를 그리워하면서 백여언이 행실을 잘못한 것도 아니니 그리하면 그녀에게 너무 억울한 처사라고 판단했다. 측비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니 백여언을 측비로 맞이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었다.
태후 또한 이에 동의했고 포모와 오설매에겐 하사품을 내리며 일은 그리 정리되었다. 태자와 백여언의 혼사는 향시를 치른 후인 팔월 열이레로 정해졌다.
엽연채는 주운환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차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선 이 내막을 몰라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도성 사람들은 당시의 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계획된 일이라 의심해도 백여언이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 태자의 품으로 뛰어들었으리라 여길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태자가 먼저 백여언을 보고 마음에 들어 했으며 그녀의 미색을 탐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미인을 얻었고 자신의 좋은 평판에는 털끝만큼도 흠집이 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기똥찬 계획이 아닌가.
“이야옹…….”
이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기르는 그 검은 고양이는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뛰놀았다.
며칠 동안 잘 먹이고 세심히 보살펴 주니 엽연채에게 퍽 살갑게 굴었다. 이에 엽연채는 직접 고양이에게 목욕을 시켜 줬다. 고양이는 꽤나 말끔하게 변신했고, 다만 눈 한쪽이 성하지 않을 뿐이었다.
엽연채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데 추길이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큰이모님께서 오셨어요!”
“…….”
순간 멍해졌던 엽연채가 물었다.
“큰이모께서 도성에 도착하셨다고?”
“예!”
추길이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온씨 가문으로 가셨어? 지금 가 봐야겠구나.”
“아니요!”
그러나 예상 밖으로 추길은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그럼 우리 어머니를 보러 가셨단 거지?”
엽연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다시 물었다.
“아니요!”
추길은 이번에도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해 봐!”
엽연채는 그녀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큰이모님은 지금 송화 골목에 계셔요!”
추길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 송화 골목? 거긴 엽승덕이 사는 곳이 아니더냐?”
엽연채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이모께서 왜 그곳에 가셨다는 말이야?”
“저도 모르겠어요. 온씨 아가씨께서 알려 주신 소식이에요. 이모님께서 일단 온씨 가문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외숙모님께서 엽승덕 나리가 외실을 데리고 산다는 이야기를 하신 거죠.
그러자마자 이모님께서 커다란 몽둥이를 집어 들고 문을 박차고 나가셨대요. 그런 모습으로 나가셨으니 송화 골목으로 달려가 나리를 두들겨 패시려는 게 아닐까요?”
“와, 제법 살벌한데!”
엽연채는 이모의 과격한 행동에 크게 놀랐다.
“가자, 우리도 어서 가 봐야겠다.”
엽연채는 추길을 데리고 나는 듯 서쪽 측문의 수화문으로 달려갔다. 그곳 마구간에는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푸른 덮개가 달린 작은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엽연채는 얼른 경인을 불러와 마차를 몰게 했고, 그렇게 마차는 송화 골목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엽연채가 빨리 가라고 계속 재촉하자 원래 이각 정도 걸리는 거리를 일각 만에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내달리는 동안 행인들을 여럿 놀라게 했지만 말이다.
마차가 송화 골목에 가까운 입구에 멈춰 서자 엽연채와 추길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영존거 문밖에 구름 떼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 대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로 욕지거리가 섞인 질책이 들려왔다.
“이 개돼지만도 못한 놈! 이 짐승만도 못한 잡놈이 밖에서 외실을 끼고 사는구나! 그래, 외실을 끼고 살고 싶으면 좋을 대로 하거라. 근데 내 동생이 피를 토할 정도로 몰아붙여! 어디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귀청이 찢어질 듯 분노에 가득 찬 호통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십 대로 보이는 부인이 엽승덕을 향해 커다란 몽둥이를 거칠게 휘두르고 있었다.
“처, 처형은 국법도 모르오! 백주 대낮에 조정의 관리를 두들겨 패다니!”
얻어맞아 바닥에 엎어진 엽승덕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국법? 하, 지금 내게 국법을 들먹이는 게냐!”
그 부인은 엽승덕의 얼굴에 ‘퉤’ 하고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도성의 국법에 따르면 조정 관리가 외실을 끼고 살며 본처를 못살게 굴어 죽이려 하고 친딸을 괴롭혀도 괜찮은가 보지?”
“그, 그게……! 어쨌든 이렇게 길거리에서 사람을 패는 건 잘못된 거 아니오! 관아에 고발할 것이오!”
엽승덕이 빽 소리를 질렀다.
“고발해! 고발하라고!”
부인은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이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고발할 게 뭐 있어.”
“외실을 끼고 사는 게 잘못된 건데. 그래 놓고 본처의 친정 식구가 와서 옳은 소리도 못 하게 하는 거야? 거기다 한 식구인데 고발은 무슨.”
엽승덕은 화가 나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반면, 엽연채는 속으로 잘한다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친정 식구들이 나섰을 때의 장점 아닌가. 다들 외삼촌이 매부를 때리면 때려도 때린 게 아니라고들 하지 않은가. 이모가 매부를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온씨가 어째서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는가 하면, 첫째는 스스로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엽균이 믿음직한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녀의 친정에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집안에선 시집간 딸이 수모를 당하면 친정 식구들이 시댁을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친다. 하지만 온씨 가문은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온씨 가문의 세력은 현재 정안후부에 못 미쳤고 엽연채 외삼촌의 직위 역시 엽학문보다 낮았다. 그래서 외삼촌은 정안후부 사람들에게 밉보일까 봐 온씨를 위해 한 번도 나선 적이 없었다.
친정 식구들조차 나서지 않으니 엽승덕은 온씨를 더욱 만만하게 보고 갈수록 방자하고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그런데 십 년 동안 도성에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엽연채가 얼굴마저 까맣게 잊은 큰이모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더니 엽승덕을 손봐 주고 있었다. 그것도 호되게 매질을 하면서 말이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조금 감동했다.
‘이것이야말로 친정 식구들이 보여야 할 태도가 아닌가!’
“이런 금수만도 못한 놈! 내 손에 맞아 죽어라!”
그 부인은 다시 커다란 몽둥이를 들어 올리더니 엽승덕에게 내려쳤다. 엽승덕은 겁에 질려 아예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그만 때리세요!”
주위에 있던 서너 명의 젊은 공자들이 부인의 커다란 몽둥이를 뺏으려 했으나 그녀를 당해 내지 못했다. 게다가 엽승덕을 감싸 주는 양 구는 한 소년은 때리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발로는 엽승덕을 걷어차고 있었다.
“나리! 나리!”
엽승덕의 하인이 앞으로 달려왔지만 또 다른 두 소년에 의해 제지당했다.
“승덕 나리……! 흑흑… 때리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은정랑은 문틀에 기대서서 울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부인이 커다란 몽둥이를 집어 던지고 은정랑에게 다가가더니 ‘짝짝’ 소리가 나게 그녀의 뺨을 두 대나 후려갈겼다.
“이런 천한 년! 내 살다 살다 너처럼 비천한 것은 처음 봤다! 듣자 하니 네 아들놈이 글공부를 한다지. 올해 열일곱 살이나 먹었다고 들었다.
내 말 잘 듣거라. 다 큰 아들이 있는 과부이면 아들을 잘 보살펴 시험에 합격해 공명을 떨치게 해야지. 그리되면 고결한 안주인 행세하며 맘 편히 지낼 수 있을 것 아니냐! 그런데 그 나이에 기어코 사내를 꾀어내는 걸 보니 잠자리가 그리도 궁했던 것이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했다.
‘이 부인 욕 한번 차지게 하네! 속이 다 시원하다!’
사실 좀 나쁘게 생각하면 외실을 데리고 사는 게 그리 큰 잘못은 아니었다. 그리고 외실이 된 여인들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리된 나이가 어린 여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은정랑에겐 열입곱 먹은 아들이 있지 않은가? 이 아들은 가정을 꾸릴 수도 있는 나이었다. 차라리 좀 고생하고 버티다가 아들이 시험에 합격해 공명을 떨치면 며느리도 들이고 집안의 안주인이 될 텐데, 아무렴 그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안주인이 되어 지내야 할 나이에 아직도 남정네를 유혹해 외실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다 늙어서 추태를 부리는 꼴 아닌가!
생판 남이 찾아와 엽승덕을 두들겨 패면 사람들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처의 친정 식구이니 그 누구보다도 이렇게 찾아와 소란을 피울 자격이 충분했다. 소란을 피우다 관아에 고발된다 하더라도 이는 관아에서도 관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정랑을 때리다니!”
엽승덕은 그 부인이 은정랑의 뺨을 때리는 걸 보고 진노하더니 냅다 달려가 그 부인을 홱 밀쳐 버렸다. 그러자 부인은 다시 커다란 몽둥이를 집어 들고 엽승덕에게 달려가 그를 흠씬 두들겨 패며 울부짖었다.
“이런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외실 때문에 처형을 때리다니! 처형도 때리는 판국에 내 동생은 그동안 얼마나 비참하게 지냈을까!”
“그 말이 맞네. 처형에게 손을 대다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승덕은 대로해 몸속의 피를 다 쏟아낼 지경이었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온씨였다면 그는 그녀가 부덕이 없고 포용력이 부족하며 악독한 여인이라 남편을 매질한다고 욕했을 것이다.
엽연채였다면 그는 ‘효孝’라는 글자에 침을 뱉어도 유분수라며 그녀를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욕했을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도 다 자신의 편에 섰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소란을 피우러 온 사람이 그의 처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