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도착한 그들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좀 집어 먹었지만 정신은 딴 데 팔려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옆에 있는 주묘화에게 이리 말했다.
“볼일 좀 보고 올게요.”
차간에 간다는 이야기였다. 주묘화와 주묘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지금은 여종들도 따로 마련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어 추길도 그녀 곁에 없었다.
서일각을 나온 엽연채는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녀는 아리따운 자태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다가 마침내 양왕부를 처음 방문했던 날 가 보았던 그 화원을 찾아냈다.
사방에는 울긋불긋한 꽃이 만발했고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또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지붕이 여덟 모가 지도록 지은 정자가 어렴풋이 보였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보니 지난번에 왔던 그곳이 틀림없었다.
엽연채가 물가 쪽으로 걸어가니 계수나무 아래에 놓인 커다란 청석 위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를 등지고 앉아 있는 여인은 바로 조앵기였다.
엽연채는 그저 운에 맡기고 와 본 건데 그녀가 정말로 이곳에 있었다. 조앵기는 고개를 숙여 눈처럼 새하얀 목을 드러낸 채 서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고 있는 건 지난번 엽연채가 주었던 그 서책이었다.
머리 위 계수나무에서 옅은 노란색 꽃잎이 서책 위로 떨어지자 그녀는 끝이 살짝 뾰족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 꽃잎을 털어 냈다. 그러자 물 위로 떨어진 노란 꽃잎이 빙글빙글 돌며 물살을 따라 떠내려갔다.
엽연채가 가까이 다가서자 조앵기가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 서책은 다 봤어요.”
“그래서 제가 더 많이 가져왔어요.”
엽연채는 오늘 길고 너른 소매가 달린 앞섶이 교차하는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 주머니도 아주 널찍했다. 그녀는 주머니 안쪽에서 서책 세 권을 꺼내더니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보였다.
“여기 다 있죠?”
조앵기는 아주 기뻐하며 곱살한 손가락으로 서책들을 훑더니 한 권만 집어 들었다.
“많으면 다 숨길 수가 없어요.”
그 말에 엽연채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에겐 책을 마음대로 읽을 자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조앵기는 저번에 받아 다 읽은 책을 엽연채에게 돌려준 다음 새로운 책을 품 안에 넣으며 물었다.
“아직 그쪽 이름도 모르네요?”
“전 주씨 가문 셋째 며느리인 엽연채입니다.”
조앵기는 기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앞으로도 자주 올 건가요?”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난색을 표했다.
“아마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러자 조앵기의 눈빛에 실망한 기색이 비쳤다. 그녀는 이내 엽연채에게 달리 물었다.
“오늘은 날 보러 온 거예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겸사겸사요.”
그녀는 양왕이 자신에게 초대장을 준 이유가 주운환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니 그 역시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동시에 태자를 꺼림칙하게 만들어 그가 지나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도 알고 있었다.
양왕이 초대장을 준 건 잔꾀를 부린 것에 불과하니 그녀는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나 엽연채는 태자와 백여언이 꾸민 판을 구경하고 싶었고 조앵기가 생각나기도 해서 이곳에 왔던 것이다.
조앵기는 엽연채의 대꾸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그동안 양왕부에서 베푸는 연회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밖이 어떻든 그저 방 안에 조용히 머물렀다.
그런데 지난번에 이곳에서 서책을 읽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자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더니 본인의 서책까지 주고 갔다. 그래서 정말 기뻤는데 그 아가씨가 누군지 알 방법이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오늘은 양왕의 생일 축하연이 있는 날이었다. 조앵기는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사람이면 분명 양왕이나 양왕부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일 테니 연회에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을까 해 밖으로 나왔던 건데 하필 아까 같은 일이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양왕비 마마!”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몰아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보니 검은 옷을 입은 마마가 꽃밭에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마마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큰일이 벌어졌는데 마마께서는 여기서 한가롭게 놀고 계시는 겁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그러자 조앵기의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엽연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는 돌아서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엽연채는 굳은 표정으로 마마를 쏘아봤다. 하는 짓이 보통이 아닌 걸 보니 아마 양왕의 사람일 것이다.
‘조앵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구나.’
엽연채는 조앵기의 뒷모습이 꽃밭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았으나 끝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조앵기는 자신을 찾은 마마를 따라 백옥으로 만든 길을 걸어 화원을 질렀고, 금세 자신의 처소인 평정소축에 도착했다. 문으로 들어서니 시녀들이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고 방 안에서는 찻잔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왕이 와 있음을 안 조앵기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문 앞에 서 있는데 잠시 후 시녀 넷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조앵기는 그들을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다들 자신을 돌보는 시녀들인데 한두 달에 한 번씩 물갈이가 됐다.
“왕비 마마,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이때 함께 온 마마가 차디찬 목소리로 조앵기를 닦아세웠다. 그녀는 자신은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앵기는 입을 오므리며 널찍한 응접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서쪽을 쳐다보니 응접실에 다른 사람은 없었고 동쪽 침실 창가 근처에 놓인 태사의에 건장한 체격의 양왕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커다란 방 안으론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양왕의 매력적이고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양왕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조앵기는 멀찍이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양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오늘 호숫가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사람을 물에 빠뜨리다니!”
조앵기는 눈을 내리깔고 변명했다.
“밖에 나가서 좀 돌아다닌 거예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밀쳐지는 바람에 미희와 부딪히면서 물에 빠뜨린 것 같아요.”
사실 그녀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양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힐난했다.
“밖에 나갈 때 머리는 두고 다니는 게냐?”
그 말에 조앵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양왕은 더욱 냉랭한 표정으로 호통쳤다.
“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게냐? 냉큼 다가오지 못할까! 걸친 옷을 전부 벗고 침상에 누워 꼼짝도 하지 말거라!”
그 말에 조앵기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은 초하루와 보름도 아닌데 또 이렇게 되다니!
* * *
엽연채가 서일각으로 돌아왔을 때 손님들은 이미 식사를 마친 후였다. 주묘화와 함께 식탁에 앉아 엽연채를 기다리고 있던 주묘서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작은 새언니,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측간에 갔다 왔어요. 그런데 양왕부가 너무 넓어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이제서야 온 거예요.”
주묘화가 하품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다 왔으니 이제 가요!”
엽연채 일행이 수화문에 도착하니 그곳에 서서 기다리는 주종과의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이 작자도 왔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죽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양왕부에서 기회를 얻겠다는 꿈이 와장창 깨진 모양이었다. 엽연채는 그를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무 말 없이 마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삼각쯤 지나니 마차는 주씨 가문 동쪽 측문에 도착했다. 녹엽과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셋째 마님, 아가씨들. 돌아오셨군요. 어서 일상원으로 가시죠. 마님께서 셋째 마님과 아가씨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어!”
주묘서가 기쁜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일상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어머니!”
진씨는 주묘서의 목소리를 듣더니 활짝 웃으며 반겼다.
“묘서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주묘서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녹지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엽연채와 주묘화는 피곤해 천천히 걷느라 아직 저 뒤에 있었다.
“그래, 오늘… 무슨 소득이라도 있었느냐?”
진씨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보니 다들 비슷했어요…….”
주묘서가 수돈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했다.
“비교해 보니 역시 태자 전하와 양왕 전하가 군계일학이셨어요!”
주묘서의 동경하는 표정에 진씨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무랐다.
“그 입 다물거라.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그 두 분은 이미 정비와 측비가 모두 있는데 설마 첩실로 들어가겠다는 이야기냐?”
주묘서는 입을 삐죽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태자라면 첩실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태자가 향후 제위에 오르면 자신은 황비가 되는 게 아닌가. 그러니 못 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마님, 제가 보니 한 사람이 꽤 괜찮아 보였습니다.”
녹지가 다가서며 고했다.
“오늘 제가 여러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집안 형편과 출신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연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었어요. 한 명만 제외하고요…….”
“그게 누구냐?”
“신양 공주 마마의 적장자인 안군왕安郡王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선 인물이 훤합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인데 오늘 양왕부에서 공자님들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걸 보니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더라고요. 거기다 황제 폐하의 외손자이시고요.”
그 말을 들은 진씨는 마음이 동했다.
“신양 공주 마마의 아드님이라…….”
녹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에 셋째 마님이 공주 마마의 도움을 받으셨잖아요. 게다가 그곳에서 태자비 마마도 알게 되었고요. 어찌 보면 셋째 마님과 연이 있다고도 볼 수 있죠…….”
진씨는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걘 묘서를 도와주지 않을 게다. 그러니 묘서가 스스로 노력해야 된다. 태자비 마마의 환심을 산 다음, 나중에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을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도 그렇네요. 자기 힘으로 성사시켜야 일이 확실하지요.”
녹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때 주묘서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 참,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오늘 양왕부에 갔다가 알게 된 건데… 육 측비 마마와 작은 새언니가 친척이더라고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엽연채와 주묘화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큰아가씨,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