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정말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에요……. 저도 일어나고 싶은데… 그런데… 제 단추가, 단추가…….”
소녀는 억울하다는 듯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추가 어째서 내 의복에 엉켜 있는 거지?”
태자가 어두운 낯빛으로 뇌까렸다. 그는 퍽 다급했던지 자신의 의복을 확 잡아당겼다. 그런데 ‘찍’ 소리가 나더니 소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꺄악! 내 옷이!”
그러더니 아연실색하며 태자의 몸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흑흑흑! 보지 마세요……! 여기 모여 있지 마시라고요! 제발 부탁이에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옷이 갑자기 걸레짝처럼 찢어지자 몸을 가리기 위해 소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태자의 몸에 찰싹 달라붙고 말았다.
방금 전만 해도 다들 별일 아니라고 여기며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문제가 커졌다.
“이 배자를 걸치세요!”
이때, 양왕부의 한 마마가 얼른 그녀에게로 달려와 커다란 배자를 소녀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아가씨, 이걸로 가리고 천천히 일어서세요. 안 보입니다.”
“저 사람들 좀 치워 달라고요……!”
소녀는 정말로 놀란 모습이었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날카롭게 소리쳤다.
“여러분, 제발 부탁이에요……!”
사람들은 그녀의 처량하고 새된 목소리를 듣더니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여태껏 소녀가 술수를 부린다고 의심했지만, 그녀가 절규하자 고의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비켜 주세요!”
육 측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걸어와 앙칼지게 호통치자 사람들은 그제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근처에서 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물에 빠졌던 사람이 구조됐습니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다시 물에 빠졌던 사람을 보러 달려갔다. 태자의 품에 파고들었던 그 소녀는 양왕부 마마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리 멀리 가지 않았던 엽연채 일행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리땁고 매력적인 얼굴에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소녀가 서 있었다. 바로 백여언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엽연채의 눈에는 비웃음이 어렸고 포모와 오설매의 낯빛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사실 그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진작에 알아차렸는데 이제야 똑똑히 그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백여언이었다.
포모와 오설매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좀 전에 벌어졌던 장미 꽃가지 사건과 백여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한낱 백씨 가문의 여식이라고 만만하게 보나 본데 ‘가난한 젊은이를 업신여기지 말라.’라는 말도 있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가난한 젊은이 어쩌고저쩌고 늘어놓더니 태자를 유혹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게다가 거의 성공한 듯했다. 부둥켜안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옷이 찢어진 채로 태자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으니 태자부에 들어가지 못하면 비구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어쩌란 말인가?
“저 여인은 어떻게 될까요?”
오설매가 걸어가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부에 들어가… 첩실이 되지 않겠어요?”
포모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백여언은 출신이 미천하니 태자의 측비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에 빠졌던 사람은 건져졌고 커다란 옷으로 덮여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은 미동도 없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호수에서 구조된 여인은 여전히 그곳에 누워 있었다.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여인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음에도 화용월태의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물에 젖은 등적색橙赤色(누런빛을 띤 짙은 붉은색) 의복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가냘프고 아리따운 자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미 부인? 미 부인?”
시녀 두 명이 그녀에게로 달려오더니 급히 잡고 흔들었다.
“욱……! 컥컥…….”
미 부인은 눈을 뜨더니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고 물을 토해 냈다. 그러자 두 시녀가 얼른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미희야, 괜찮으냐?”
육 측비가 걸어오며 말했다.
“어서 들쳐 업고 가거라!”
미 부인이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니……. 전… 웁……!”
그러나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또다시 물을 토해 냈다.
“잠시만 이대로 두시죠. 적어도 물은 다 게우셔야 합니다.”
미 부인의 시녀가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잘 있던 사람이 어째서 물에 빠진 게야?”
이때, 화려하고 부유하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걸어왔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돋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양왕의 또 다른 측비인 진씨였다.
“측비 마마, 제가 봤습니다.”
이때 사람들 사이에 있던 열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곱상하게 생긴 한 어린 소저가 입을 열었다.
“이 소저가 부딪쳐 쓰러뜨렸어요.”
그 귀녀는 말을 하며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을 쳐다봤다. 사람들의 눈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고 그곳에는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흰색 상의와 가슴까지 오는 붉은색 하의로 이루어진 유군에는 흐릿한 벚꽃 문양이 수놓여 있었고 가슴 앞쪽에 나비 모양으로 묶은 치마끈은 치맛자락까지 늘어져 있었다. 간단한 단라계單螺髻 머리에는 홍옥이 상감된 복숭아꽃 모양의 화승華勝을 꽂았다. 희고 보드라운 피부와 둥근 눈썹을 가진 그녀의 반짝거리는 검보라색 두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그녀를 본 엽연채는 놀라서 멈칫했다.‘저 사람은 양왕비 조앵기가 아닌가?’
양왕비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으나 그래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과연 한 귀부인이 입을 뗐다.
“양왕비 마마 같은데요!”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냉큼 말을 받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양왕 전하께서 아끼시는 첩실이에요. 한 달 전에 양왕부로 들어왔죠.”
사람들은 그제야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됐다. 양왕의 총애를 두고 서로 질투하고 다툰 것이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멸시하는 눈빛으로 조앵기를 쳐다봤다.
한 귀녀가 작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양왕비께서 미 부인이 총애받는 꼴을 못 보겠으니 물속으로 밀어 넣으신 거네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셨다.”
또 다른 부인 역시 대놓고 조롱했다.
“사실 저분은 양왕 전하의 통방通房(하녀로서 첩을 겸한 여인)이 되기에도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 분인데 운이 좋아 왕비 마마가 되신 거잖아요. 그럼 분수에 만족해야지, 무엇 때문에 이런 못된 짓을 벌인대요?”
양왕비는 출신이 미천한 데다 물렁한 성격이라 이곳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업신여겼다. 이 귀족들 눈에 비친 양왕비는 주제에 안 맞게 높은 곳에 오른 만만한 사람이었고, 거기에 잘난 것 하나 없으니 어떻게 왕비 자리에 적격인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게다가 양왕은 미목수려하고 매력이 넘치는 사내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녀를 인정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양왕비가 널 밀었다는 말이냐? 미희야, 이게 참말이냐?”
이렇게 묻는 육 측비는 고소해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미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전, 전 모르겠습니다…….”
그러더니 억울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양왕 전하!”
이때 갑자기 육 측비가 양왕의 이름을 불렀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내주자 고귀함이 느껴지는 보라색 망포를 입은 양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육 측비가 양왕 쪽으로 걸어가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고했다.
“미희가 누군가에게 밀쳐져 물에 빠졌습니다. 이 아가씨가 양왕비 마마께서 밀치는 걸 봤다고 하더군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조앵기를 쓱 쳐다봤다.
말로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확신하고 있었다. 양왕비가 첩실과 총애 다툼을 하며 질투심에 그녀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말이다.
양왕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오싹한 눈빛으로 조앵기를 노려봤다. 그러자 조앵기의 조그만 얼굴은 더욱 새하얗게 질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오해일 겁니다. 여러분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육 측비가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그녀는 집안 허물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이치를 알고 있기에 이쯤에서 그만 공격을 멈추었다.
“벌써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다 되었네요. 서일각絮逸閣에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쪽에 가서 자리하시죠.”
사람들은 그제야 귀에 대고 소곤거리며 자리를 떴다.
미희는 허약한 모습으로 두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물고 있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마마가 조그만 연교軟轎를 들고 와 미희를 부축하며 가마에 오르게 했다.
미희가 양왕을 쳐다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양왕 전하…….”
“우선 태자 전하를 뵈러 가야 하니 내 이따 보러 가마.”
양왕이 그녀의 부드럽고 조그만 손을 잡으며 달랬다. 그제야 미희는 눈물을 거두고 미소를 짓더니 알겠다고 하며 연교에 올랐다. 육 측비와 진 측비는 미희와 양왕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시기심이 일어 입 안이 씁쓸했다.
양왕이 싸늘한 눈빛으로 조앵기를 쏘아보자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치마를 들고 달아나 버렸다. 양왕은 그녀가 달아난 방향을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숫가를 떠나 버드나무가 자라난 인적이 드문 길에 다다르자 양왕이 냉랭한 목소리로 성을 냈다.
“저 우둔한 여인을 내 언젠가는 폐위시킬 것이다!”
그러자 따르던 언동이 염려했다.
“양왕비 마마를 폐위시켜 왕비 자리가 비게 되면 진 측비와 육 측비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겁니다.”
“조앵기에게 그 정도 쓸모는 있구나.”
양왕이 콧방귀를 뀌자 언동과 언서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 황후가 의도적으로 이런 부족한 왕비를 양왕에게 붙여 준 거라 양왕은 당연히 양왕비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뭐 하나 장점도 없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 * *
그 시각 호숫가 근처. 양왕이 떠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
“작은 새언니.”
주묘서와 주묘화는 이제서야 뛰어오고 있었다. 주묘서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이곳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고 하던데요?”
육 측비가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야, 아가씨들과 어서 연회석으로 가자꾸나!”
엽연채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하며 주씨 자매와 포모, 오설매와 함께 육 측비를 따라 연회석이 마련된 서일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