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두 사람이 계속해서 수를 주고받으면서 바둑판 위로 검은 돌과 흰 돌이 어지럽게 섞였다. 그러나 애초에 엽연채가 아홉 점을 먼저 두면서 유리한 위치를 전부 차지해 버린 후였다. 유곡요는 한참 동안 공격했지만 공격은 먹히지 않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면 엽연채가 전부 막아 버렸다.
유곡요는 돌을 두면 둘수록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내어 줬던 자리를 어떻게도 빼앗아 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곡요는 여태 항복했던 적이 없는 사람으로 이대로 단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더 이상 바둑돌을 놓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엥, 유 소저가 졌네.”
“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한 귀녀의 놀란 말에 또 다른 귀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아홉 점을 내줬으니 져도 이상할 것은 없지.”
그러자 유곡요의 여종이 얼른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주 부인의 바둑 실력이 이렇게 괜찮으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요. 그러나 저희 아가씨께서 아홉 점을 먼저 양보하셨으니 아홉 개의 성城을 전부 내준 셈이나 다름없죠. 거기다 주 부인의 바둑 실력도 원래 괜찮은 편이었으니 이겨도 이상할 게 없고요.”
그러나 유곡요는 자부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패배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미소를 지으며 청했다.
“주 부인의 바둑 실력이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어요. 우리 한 판 더 둬요.”
“좋아요. 그럼 이번 판에선 접바둑(수가 낮은 사람이 미리 화점에 두 점 이상 놓고 두는 바둑) 말고 맞바둑을 두죠.”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응한 후 바둑판을 정리했다.
유곡요는 더 이상 함부로 접바둑을 두자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엽연채의 바둑 실력을 확실히 알아본 다음에야 몇 점을 먼저 두게 해 줄지 정할 수 있을 성싶었다. 그녀는 방금 전 경솔한 행동에 또다시 후회가 들었다. 괜히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곤란한 처지가 됐으니 말이다.
바둑판이 정리되자 두 사람은 바둑돌을 쥐고 색깔을 맞추는 방법을 통해 엽연채가 흰 돌, 유곡요가 검은 돌을 잡게 되었다.
새로운 판에서 열 수 넘게 두었을 때쯤 유곡요의 표정이 또 변하고 말았다. 첫 번째 판은 곳곳에서 길이 막히고 장애물을 만나 자신이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엽연채에게 아홉 점을 먼저 두게 해 줬기 때문에 그저 그녀가 방어를 철저히 해 무너뜨리기 어려웠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등한 상황에서 바둑을 두고 있고 겨우 열 수밖에 두지 않았는데도 이미 엽연채의 바둑 실력이 엄청나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공격과 방어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였다.
유곡요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등을 꼿꼿이 편 그녀의 집중력이 이내 최고조에 달했다.
주위에 있던 귀녀들은 다시 작은 목소리로 쑥덕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래 두었는데도 아직 지지 않았어. 대단한 실력자야.”
“그러게 말이야! 지난번 유 소저와 바둑을 두었을 때는 난 일각도 안 돼서 참패를 당했거든. 그런데 이 부인는 이렇게나 오래 버티네. 이분도 실력자인가 봐.”
“얼마나 더 버티려나.”
유곡요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엽연채가 얼마나 버틸 것 같은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버티고 있는 사람은 엽연채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지금 사람들 눈에는 박빙의 승부로 보이며 서로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유곡요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지금 수동적인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 옆 바둑 실력이 아주 뛰어난 두 귀녀는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 유곡요는 지금 엽연채의 흐름에 끌려다닐 뿐만 아니라 살짝 열세에 처해 있었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대결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팽팽한 접전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두 사람의 대결이 곧 급물살을 탔다. 흰 돌이 갑자기 오른쪽에서 포위를 뚫고 검은 돌을 위로 몰아붙이더니 좌우로 포위 공격을 가했다. 이에 검은 돌이 살아 있는 영역은 겨우 2할이 되고 말았다.
유곡요는 눈앞이 새까매졌다. 이로써 이번 판은 결코 살릴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진 것이다.
“아이고……. 져 버렸네…….”
바둑 실력이 형편없는 자라도 패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근처에서 수유하고 있던 귀녀들도 달려와 물었다.
“졌어요? 어떻게 졌는데요? 유 소저가 이번 판은 좀 오래 걸리던데, 시간을 꽤 들여 겨우 이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 서서 바둑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곡요의 조그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도성 여인들에게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는데, 오늘 지고 만 것이다. 그것도 몹시 꼴사납게 지고 말았다. 방금 전에는 거만을 떨며 아홉 점을 내주고 졌고, 이번 판은 한 점도 안 내주고도 한 수를 잘못 둬 대패하고 말았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인 채 바둑판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유곡요에게 물었다.
“소저, 계속 두시겠어요?”
유곡요는 표정을 한층 굳히더니, 가까스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패배를 수용했다.
“도성 여인들 중에 부인처럼 대단한 바둑 실력을 가진 분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제가 졌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바둑으로는 도성 최고라고 불리는 유 소저가 패배하다니!’
유곡요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꼴사납게 패배했는지 알지 못하게 하려고 얼른 바둑판 위의 돌을 뒤섞어 버렸다.
유곡요의 여종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힘껏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가씨는 바둑이나 두며 시간을 때우려고 했던 것인데, 자신이 하필 엄청난 상대를 찾아오는 바람에 망신살이 뻗치게 됐다.
주변 분위기가 한층 어색해졌다. 유곡요는 분하고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품위는 지켜야 했다. 자신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둑돌을 정리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인, 바둑 실력이 정말 대단하네요. 다음번에 또 겨뤄 봐요.”
“좋아요.”
엽연채가 씩 웃을 때, 갑자기 멀리서 ‘풍덩’ 하는 큰 소리가 울리더니 이어서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사람이 물에 빠졌다!”
엽연채는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마음속은 태연했다.
‘음, 드디어 판이 벌어졌구나!’
“어서 가 봅시다! 누가 조심성 없이 물에 빠진 걸까요?”
임어정에 있던 여인들은 재잘거리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뛰어갔다.
“연채야, 우리도 가 보자! 어서!”
포모도 엽연채를 잡아당기며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유곡요는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싹 빠져나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신없이 바둑알을 바둑통으로 집어넣었다. 그녀의 여종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앞으로 다가서며 사죄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느냐?”
유곡요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내가 바둑을 두는 건 실력이 더 뛰어난 사람과 대결을 펼치며 바둑 실력을 연마하려고 하는 게 아니더냐? 그러니 졌어도 기쁘단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리 생각하니 유곡요는 깨달은 바가 생겼다. 과연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옳았다.
“도성 최고의 재녀는 무슨. 의기양양해하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숨은 고수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 사람들은 못 이길까 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최고 같은 칭호를 두고 겨루길 하찮게 여길 뿐이다.”
유곡요는 아직 수련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둑의 길에서 더 멀리 나아가려면 계속해서 져 봐야 한다.
‘앞으로는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을 자주 만나 바둑 실력을 연마해야겠구나.’
“아가씨,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죠!”
그녀의 여종이 말했다.
“왜 돌아가자는 거니? 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곡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떠난다는 말이냐? 저쪽에서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하지 않았느냐? 가자, 우리도 보러 가자꾸나.”
* * *
한편, 엽연채와 포모, 오설매가 일이 일어난 장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재잘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은 허우적거리며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람 살려……!”
이때, 양왕부의 마마媽媽 둘이 다 빚은 만두를 물속에 퐁당퐁당 넣듯 ‘풍덩’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그 여인을 향해 헤엄쳐 갔다.
“여러분, 여기 모여 있지 말고 흩어지세요. 흩어지시라고요!”
육 측비가 인파를 정리하고 있었다.
“밀지 마요. 악!”
사람들의 뒤편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물에 빠진 사람 구경도 아직 충분히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리자 잇달아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그만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엽연채와 포모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들을 따라 앞으로 갔고 그녀들도 역시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한 사내가 땅 위에 누워 있었고 묘령의 소녀가 그 위로 엎어져 있던 것이다. 사내는 건장한 체격에 기품 있어 보이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고, 금실로 수놓은 검은색 망포를 입고 있었다. 바로 태자였다.
그리고 그 위에 엎어져 있는 사람은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등진 채 태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저, 우선 일어나세요!”
태자의 목소리에서 난처함과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래요, 어서 일어나요. 이분은 태자 전하세요. 소저가 함부로 실례를 범할 분이 아니라고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전 실례를 범하지 않았어요…….”
소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항변했다.
“누군가가 절 밀쳤어요……. 누가 저와 부딪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발버둥을 쳤다. 하나 한참을 버둥거렸지만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흑흑…….”
“누가 소저에게 부딪쳤다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부딪쳤다 하더라도 어서 일어서면 되잖아요. 어서 일어서요. 이게 다 무슨 꼴입니까?”
이 말을 뱉은 사람은 바로 오설매였다. 그녀는 태자 측비 후보이니 태자부에 시집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여인이 태자의 품에 파고들고 있었다.
‘저렇게 껴안고 있으면 태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저 여인의 자태와 목소리가 어째 익숙한데…….’
“어서 일어나시라고요. 정말로 다른 사람한테 부딪힌 거라면 일어서면 아무 문제없으니까요.”
오설매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소녀와 태자 사이에 분명하게 선을 그으려고 했다.
“그래요. 어서 일어나요.”
주변 사람들도 그 여인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태자의 품에 뛰어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