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43화 (143/858)

제143화

그러자 백여언의 여종이 말했다.

“아가씨들이 저희 아가씨의 고운 얼굴을 보곤 시샘이 나셨나 보죠. 출신이 좋지 않으니 우습게 보고 일부러 꽃가지 가시로 저희 아가씨 얼굴을 긁으려고 하신 거겠죠.”

확실히 여인들의 질투심이 무섭다고는 하나 이건 생억지였다. 오설매는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던 포모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두 눈을 번뜩이며 누군가를 불렀다.

“연채야.”

엽연채는 순간 어리둥절해했으나 이내 그녀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장국후부와 정안후부는 집안끼리 친하게 지냈지만, 자신과 그 가문의 여식들과의 사이는 사실 애매했다. 그래도 대놓고 사이가 나쁜 포기와는 달리 포모와는 그런대로 괜찮게 지냈다.

“포모 언니.”

포모가 엽연채의 손을 잡으며 백여언에게 소개했다.

“이 아이는 나와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죠. 얘 연채야, 내가 너를 다치게 한 적이 있니?”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포모를 치켜세웠다.

“포모 언니는 정말 따뜻하고 상냥한 분이에요.”

이에 포모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얘가 이렇게 생겼는데도 질투하지 않았는데, 제가 백 소저가 아름답다고 질투를 했다고요?”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풉’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주위는 삽시간에 웃음바다로 변해 버렸고 백여언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절세미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아 왔다. 오직 상관 가문의 소저만이 자신보다 아름답다고 인정했는데, 여기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상관 소저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워 보였다.

“정말 실수였어요.”

포모가 쐐기를 박았다.

“오는 내내 설매 소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하고 있었어요. 아가씨 치마가 너무 길어서 실수로 밟고 만 거죠. 그리고 마침 앞쪽에 꽃가지가 있기에 꺾고 있었던 거예요. 저희가 눈이 등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아가씨가 갑자기 튀어나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엽연채도 거들었다.

“포모 언니와 오설매 소저께서 이미 사과도 하셨어요. 그래도 이분들이 고의로 그런 거라고 주장하고 싶으시면 증거를 가져오세요!”

그러자 백여언은 그 조그만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매서운 눈빛으로 세 사람을 쏘아보더니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 포모와 오설매는 기가 죽어 자리를 뜨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이어 모두 자리를 떴다. 자기들끼리만 남게 되자 포모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에게 말을 붙였다.

“연채야, 오늘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니?”

“언니야말로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엽연채가 되물었다. 그녀는 장국후부와 양왕부가 평소 친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자 포모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오설매와 눈을 맞춘 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후 마마께서 우리에게 이곳에 가 보라고 하셨어.”

그러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엽연채는 태자도 오늘 이곳에 오니 태후가 그녀들을 보내 태자와 다시 만나게 한 다음 태자 측비를 정하려 함을 이해했다. 엽연채는 말없이 하늘을 쳐다봤다.

‘어차피 선택하지 않을 것인데 많이 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태자는 형편없는 사내이니 그의 측비로 간택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엽연채는 방금 전에 봤던 백여언을 떠올렸다. 그녀는 포모와 오설매 둘 다 간택되지 않을 줄 분명히 알기에 이렇게 찾아와서 까불어댔던 것이다.

“아가씨들.”

이때, 보라색 옷을 입은 여종이 걸어오더니 세 사람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러곤 세 사람을 쓱 쳐다보더니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엽연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부인, 저희 아가씨께서 바둑 대결을 신청하셨는데 함께 바둑을 두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엽연채는 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오 소저, 연채가 바둑 두는 걸 보러 가요. 연채의 바둑 실력이 대단해서 저는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답니다.”

포모의 칭찬에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포모, 오설매와 함께 보라색 옷을 입은 여종을 따라갔다.

세 사람이 임어정에 도착하니 노란색 옷을 입은 소녀가 정자의 돌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소녀 앞에는 돌로 만든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바둑판이 이미 펼쳐져 있었다.

포모와 오설매는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소녀는 바로 재상의 손녀인 유곡요였다. 게다가 그녀는 최고의 재녀로 도성 여인들 중 바둑 실력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사람이었다.

‘유곡요에게 바둑 대결을 신청받다니!’

포모는 피식 웃더니 엽연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은 연채가 된통 당하겠는걸.”

인기척에 고개를 든 유곡요는 절세미녀인 엽연채를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보라색 옷차림의 여종에게 농을 했다.

“바둑 둘 상대를 찾아오라 했더니 제일 예쁜 사람을 찾아왔구나.”

“아가씨께서 바둑판을 펴면 사람들이 전부 놀라서 도망가 버리니까요! 아가씨께서 또 바둑에 흥취가 올라 함께 둘 사람을 찾아오라고 하시기에 제가 생각을 해 봤죠. 아가씨 앞에서는 누군들 별 차이가 없으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제일 예쁜 분을 모셔와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럼 적어도 눈과 마음은 즐거우니까요.”

“그게 무슨 망발이니! 이렇게 거만한 말이 또 있을까!”

유곡요가 웃으며 여종을 나무라더니 엽연채에게 사과했다.

“부인, 제 여종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미동도 않는 엽연채를 보더니 유곡요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도망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엽연채가 피식 웃더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 소저께서 바둑을 두려나 봐. 어서 보러 가자.”

주변에 있던 귀녀들이 주변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유 소저께서 바둑 두는 걸 얼마 만에 보는 거야. 마지막 바둑 대결이 언제였더라?”

“저번에 적성대에서 바둑 대결을 벌였잖아. 그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까불던 농가 소녀에게 한 수 제대로 가르쳐 줬지.”

이때 보라색 옷의 여종이 웃으면서 핀잔을 놓았다.

“아가씨들, 이제야 보러 오셨네요. 방금 전에 저희 아가씨께서 바둑판을 펴실 때는 저 멀리 숨어 버리시더니.”

귀녀들은 그 말을 듣고는 일제히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질 게 뻔한데 무서워서 별수 없었어.”

“그럼 시작할까요?”

유곡요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에게 물었다.

“부인을 제가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저는 성은 엽씨, 이름은 연채이며, 부군은 주씨 가문 셋째 공자입니다.”

유곡요는 알겠다고 건성으로 대꾸하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주 부인, 그럼 몇 점을 먼저 두실래요?”

그녀는 상대에게 먼저 몇 점을 두게 해 줘야 그래도 좀 재미있게 바둑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인 채 지난번 적성대에서 유곡요와 제민이 펼쳤던 바둑 대결을 떠올렸다. 제민의 바둑 실력이 훨씬 뛰어났지만 그녀는 유곡요가 재상의 손녀이므로 감히 이길 수 없어 일부러 져 주었다.

‘그럼 나는… 이겨야 할까 져야 할까?’

그러나 바둑 한 판도 이길 배짱이 없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만큼요.”

예상 밖의 대꾸에 유곡요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바둑을 둘 줄 모르는 건가? 그러나 이쪽에서 먼저 바둑을 두자고 청했으니 이제 와 실력이 없다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곡요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통 크게 양보했다.

“그럼 아홉 점을 먼저 두시죠!”

주위가 당장에 술렁거렸다.

“아홉 점을 먼저 두래! 장난 아닌데!”

일반적으로 바둑 선생이 초보자에게 아홉 점을 양보해 주곤 했다. 이에 포모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유 소저, 연채의 바둑 실력도 꽤 괜찮습니다. 저는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는 걸요!”

그 말에 유곡요는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그럼 상대는 분명 보통 수준은 될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 머쓱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방금 전 제가 실언을 했네요.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이니 아홉 점을 먼저 두시는 걸로 하죠.”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수를 물려줄 때는 물림을 받은 사람이 검은 돌을 집는 법이었다. 엽연채가 오목烏木으로 만든 검은색 바둑통을 열어 보니 안에는 매끄럽고 반짝거리는 바둑돌이 들어 있었다. 전부 흑옥黑玉으로 만든 것이었다.

엽연채는 상품上品의 바둑돌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바둑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다웠다.

엽연채는 흑옥 바둑돌을 집어 들더니 바둑판의 화점花點(바둑판에서 기본이 되는 아홉 개의 점)에 바둑돌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러자 주위에 몰린 구경꾼 중 하나가 포모에게 비웃듯 물었다.

“아가씨 바둑 실력은 어떻게 되세요?”

포모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보통 수준이에요.”

“그 정도라면 주 부인께서 유 소저를 이기지는 못하겠네요. 유 소저께서 먼저 아홉 점을 두게 해 줘도 말이죠.”

오설매의 말에 포모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저렇게나 많은 돌을 먼저 두게 해 줬으니 연채가 이길지도 모르죠.”

소저들은 웃으며 승부가 어떻게 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는 엽연채가 이길 수도 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이길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설령 이기더라도 유곡요가 아홉 점이나 먼저 두게 해 줬으니 요행에 불과할 터였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엽연채가 아홉 번째 돌을 내려놓자 유곡요가 바둑돌을 놓기 시작했다. 유곡요는 처음 몇 수를 놓을 때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열 수 이상 두게 되자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엽연채의 바둑 실력이 꽤 괜찮다는 걸 알게 된 탓이었다.

더군다나 아홉 점을 먼저 두게 해 줬으니 바둑판의 9할을 내준 꼴 아닌가? 도로 되찾아 오려면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진지하게 대결에 임할 수밖에 없어진 유곡요의 표정에서 살짝 긴장한 기색이 비쳤다.

유곡요는 순간 교만했던 자신을 탓했으나 이내 이런 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여겼다. 자신을 위기 속으로 밀어 넣었으니 대결에서 이겼을 때 더욱 큰 기쁨을 맛보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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