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수화문으로 들어서자 귀티 나는 화려한 옷을 입은 젊은 부인이 걸어왔고 그녀의 뒤로 화려한 차림을 한 네 명의 시녀가 따라왔다.
젊은 부인은 빙그레 웃으며 엽연채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큰질녀가 왔군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부인은 회심계回心髻(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정수리 위로 틀어 올린 다음 살짝 앞쪽으로 기울여 이마 앞부분을 조금 가린 형태) 머리에 구슬 술이 달린 오색 빛깔 공작 장식을 꽂고, 수홍색과 어두운 금색이 섞인 긴 배자와 흰 바탕에 오밀조밀한 꽃무늬가 들어간 마면군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빼어난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위로 치솟은 짙은 눈썹 언저리에서 영기英氣를 뿜어냈다. 거기에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으니 시원시원하고 쾌활한 인상을 풍겼다.
엽연채는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순간 고민해 보았지만 결국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례했다.
“육 측비 마마를 알현하옵나이다.”
그러자 육 측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현은 무슨. 우린 친척이 아니더냐?”
그 말에 주묘서는 두 눈을 번뜩였다. 이 사람은 비록 정비는 아니지만 실권을 가진, 양왕이 가장 신임하는 육 측비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 사람이 작은 새언니의 친척이라니, 어째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걸까?
“몇 년 못 본 사이 연채가 더욱 고와졌구나. 예전에 내가…….”
육 측비는 자신과 온씨가 어떤 관계인지 잠시 기억을 더듬었지만 별생각이 나지 않자 그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나와 네 이모가 연채가 크면 도성에서 이름을 떨칠 거라고 말했었지. 그런데 너희 가문에서 널 그리 꽁꽁 숨겨 놓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렇지 않았다면 도성 최고의 미녀라는 칭호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진 않았겠지. 가자꾸나, 내 오늘 널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해 주마!”
엽연채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겉맞추었다.
‘당신과 내 이모가 나눴던 말을 다 합쳐 봤자 열 문장도 안 될걸.’
하지만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을 잘 알았다. 둘은 친척 간의 정이 깊고 서로 잘 아는 양 가장했다.
사실 육 측비와 엽연채는 따지고 보면 진짜 친척 관계이기는 했다. 육 측비는 도척백부都戚伯府 장남의 적녀인데, 온씨의 서녀 언니가 도척백부 차남의 서자인 넷째 아들에게 시집을 갔으니 육 측비는 엽연채 이모의 사촌 시누이인 셈이었다.
그러나 육씨 가문 장남과 차남은 진작에 분가한 상태라 엽연채의 이모와 육 측비는 사이가 소원했다. 그러니 엽연채와 육 측비의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친척이라고 부르니 그래도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엽연채가 이 관계를 이용해 육 측비에게 길 안내를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자신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쪽으로 오게나.”
육 측비가 미소를 지으며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주묘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엽연채 일행이 이리저리 지나가며 보니 곳곳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었다. 초목이 짙은 기다란 통로를 지나고 나니 두 눈이 번쩍 떠지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호수에 인접한 드넓은 화원이었는데, 물가에는 붉은 들보, 녹색 기와, 백옥석白玉石 난간으로 꾸민 정자가 세 채 서 있었다. 그야말로 더없이 웅장하고 화려한 정자였다. 더군다나 정자들은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여 수면에 그 그림자가 비치니 운치가 한층 특별했다.
양왕이 젊기에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라 남녀를 따로 나눠 접대하지 않고 화원에 함께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무리를 지어 놀고 있었는데, 투호를 하는 귀공자들도 있고 꽃놀이를 하는 귀녀들도 있으며 저 멀리 공연장에서 극단의 공연을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호숫가에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대여섯 명의 귀녀들이 주황색 난간 곁의 긴 걸상 위에 바짝 붙어 앉아 물고기에게 밥을 주니 호수 위로 잔물결이 일어났다.
“여기 앉거라!”
육 측비가 세 사람을 데리고 한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미소를 지으며 앉기를 권했다.
“저쪽 임어정臨漁亭 근처에 물푸레나무가 있는데 그곳에서 꽃놀이도 할 수 있고 물고기에게 먹이도 줄 수 있단다. 그럼 소저들, 난 바빠서 이만 가 볼 테니 편히 놀다 가시게.”
말을 마친 육 측비는 서둘러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큰아가씨, 저곳에 투호를 하는 귀공자들이 엄청 많네요.”
녹지가 주묘서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주묘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녹지가 또 그녀에게 속살거렸다.
“여러 귀녀들이 구경하고 있어요. 저희도 가서 봐요.”
어느 왕손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기회와 인연이 아니겠는가!
“셋째 마님께서는 여기에 계셔요. 저와 큰아가씨, 둘째 아가씨는 저쪽에 가서 투호 구경을 할게요.”
녹지는 엽연채만 빼고 아가씨들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도 같이 갔다가는 그녀의 광채에 두 아가씨의 미모는 전부 가려질 것이었다. 엽연채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에 앉아 부채를 훌훌 부치며 판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다소 무료해진 엽연채가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묘서 자매와 녹지는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이에 엽연채는 저택의 시녀를 불러 물고기 먹이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한창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데 갑자기 추길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씨,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봐요. 저희도 가서 구경해요!”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추길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석가산石假山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과연 꽤 많은 아가씨들이 그곳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인파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꾸나.”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떨쳤다. 기왕 왔으니 구경거리야 많이 볼수록 좋을 터였다.
아직 가까이에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귀녀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누군데 저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거야?”
누군가의 힐난 어린 소리에 다른 귀녀가 아는 체를 했다.
“나 저 사람 알아. 백씨 가문 여섯째 소저인 백여언이야.”
“어느 백씨 가문을 말하는 거야?”
“도성 서쪽에 사는 몰락한 백씨 가문 말이야. 그 백 상서尙書 대인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집안에선 십 년이 넘게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거든.”
“쯧쯧, 그런 집안사람이 무슨 수로 초대장을 구해 여길 온 거야?”
‘백여언?’
엽연채는 두 눈을 번뜩였다.
‘백여언이라면 태자가 측비로 삼으려고 점찍어 둔 여인이 아니던가?’
엽연채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니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세 명의 귀녀가 서 있었다. 그중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다.
해당화처럼 붉은 대금과 하얀 꽃무늬가 들어간 유선군을 입은 그녀는 생김새가 특별히 귀엽고 아리따웠다. 계란형 얼굴에 분홍빛이 도는 희고 보드라운 피부를 자랑하는 미인이었다. 눈썹먹으로 그린 섬세한 눈썹, 묘한 물기를 품은 눈빛,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그녀는 그곳에 서서 요염한 자태를 뽐냈는데, 이 소녀가 바로 백여언이었다.
그리고 곁의 두 소녀는 요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 소녀는 중상급 정도의 외모였고 다른 한 소녀는 빼어난 외모를 가진 편이었으나, 백여언 곁에 서 있으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그랬죠? 여기 있는 장미 가지를 꺾어 가시로 내 얼굴을 긁으려고 했잖아요.”
백여언이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평아가 제때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얼굴이 망가졌을 거예요.”
엽연채가 백여언 곁에 있는 쌍환계 머리를 한 여종을 쳐다보니 얼굴에 과연 핏자국이 조금 묻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아주 살짝 긁힌 것뿐이었다. 엽연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얼굴이 망가질 뻔했다고까지 하는 건지 원.’
추길이 옆에 있는 여종처럼 보이는 소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가 상황을 봤는데요.”
여종은 역시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처음에는 다들 장미꽃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근데 여기 두 아가씨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신이 팔리셨는지 백씨 아가씨를 보지 못하고 그만 치마를 밟으셨어요. 백씨 아가씨가 걸음을 멈추고 치마를 살펴보실 때 두 아가씨는 계속 앞으로 걸어가셨죠.
그런데 마침 앞쪽에 장미꽃 가지 하나가 쑥 튀어나와 있어 한 아가씨가 꽃가지를 꺾으셨거든요. 근데 그 순간에 백씨 아가씨가 앞으로 다가설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 바람에 꽃가지가 백씨 아가씨 쪽으로 튕겨 버린 거죠.”
이때 백여언과 대치 중인 한 소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백 소저라고 하셨죠. 저희는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저랑 포모 소저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그만 소저를 보지 못했던 거예요.”
“제 치마를 밟아 놓고 보지 못했다고요? 제가 걸음을 멈추었는데도 몰랐다고요? 제가 앞으로 다가섰는데도 몰랐다고요?”
백여언이 연달아 세 가지나 물으며 추궁했다.
“날 다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겠죠!”
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정말 공교롭기는 했다. 주위에 있던 귀녀들은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었는데, 그중 한 아가씨가 나서서 상황을 중재했다.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요. 그리고 백 소저, 여기 두 분은 오 시랑侍郎 대인의 여식인 오설매 소저와 장국후부의 포모 소저예요. 두 분은 현재 태자 전하의 측비 후보시고요.”
이는 좋은 마음으로 그녀가 백여언에게 해 주는 충고였다. 백씨 가문 수준으로는 오씨 가문이나 장국후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거기다 이 둘 중 한 사람은 곧 태자의 측비가 될 몸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겐 백여언을 뭉개 버리기란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그만뒀겠지만, 백여언은 도리어 조롱 어린 눈빛을 띠더니 아리따운 미소를 입매에 걸쳤다.
“아, 이제야 알겠네요. 지금 권세를 믿고 날 업신여기는 거죠? 내가 한낱 백씨 가문의 여식이라고 만만하게 보나 본데 ‘가난한 젊은이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오설매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얼마 전 장만만이 집안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후보에서 제명됐기 때문에 그들은 장만만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권세를 믿고 사람을 업신여겼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을 리 만무했다.
포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백여언을 달랬다.
“권세를 믿고 사람을 업신여겼다는 말은 할 필요 없어요. 저희는 아가씨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아가씨를 다치게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