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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41화 (141/858)

제141화

저녁 식사를 마치자 주묘서가 걸어오며 엽연채를 불렀다.

“작은 새언니, 내일 양왕 전하의 저택에 가시는 거죠? 언제 출발할 거예요?”

엽연채는 쥐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아가씨께서 정하세요.”

“음… 그럼 내일 아침 일상원에서 만나는 걸로 해요! 아 참, 새언니는 생신 선물로 뭘 준비할 거예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우리 함께 가는 거 아니에요? 집안에서 경조사를 챙기는 거잖아요. 그럼 생신 선물도 집안에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큰아가씨는 참 재미있는 분이에요. 그런 걸 저한테 묻고요.”

주묘서는 표정을 굳히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그저… 초대장은 새언니가 가져온 거니까요.”

“아, 그럼 큰아가씨께서는 생일 축하연에 안 가실 생각인가요?”

엽연채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양왕부에 가든 태자부에 가든, 집안 경조사가 아니라 다 제가 개인적으로 챙기는 경조사라고 생각할게요. 그럼 저 혼자 선물을 챙기는 거죠.”

할 말이 없어진 주묘서는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그냥 농 좀 친 건데… 새언니는 뭘 그렇게 따져요. 사람이 말도 못 하게.”

엽연채는 말없이 서책을 집어 들더니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소란을 피우다 머쓱해진 주묘서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불현듯 지난번 양왕부에서 마주쳤던 양왕비가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돌려 조그만 책장으로 걸어가더니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지난번 화본의 뒷이야기가 담긴 책 두 권을 찾아냈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난죽거로 달려갔다. 주운환은 책론을 쓰고 있다가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엽연채는 곧이어 창턱에 기대어 주운환을 바라봤고 주운환은 맑은 물에 연꽃이 떠 있는 듯한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보더니 가슴이 조금 뛰었으나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고양이를 키우기로 했습니까?”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본론을 꺼냈다.

“내일 양왕부에 가는데 공자께서도 함께 가실래요?”

“전 안 갑니다.”

“어째서요?”

“양왕부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훈이 있는 대단한 귀족들이나 권세를 쥔 중신들의 가족인데, 전 그런 사람들과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우리 가문은 이 모양이니… 다른 사람들 눈에는 거저 얻은 초대장을 들이밀고 참석하는 걸로밖에 안 보이겠지요. 소저가 묘서를 데리고 가면 충분해요.

그리고 저까지 따라가면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사람들이 절 담 모퉁이로 밀어 넣고 후부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한 소감이 어떠냐며 캐물어댈 겁니다.”

“그것 참 미안하게 됐네요.”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휙 돌아서서 가 버렸다. 주운환은 흐릿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인 채 배시시 웃었다.

엽연채도 이 초대장에 담긴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운환과 양왕이 막역한 사이임을 떠올리고는 주운환이 내일을 기회 삼아 떳떳하게 양왕부에 나타나 일을 벌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찾아와 물어봤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운환은 그럴 생각이 전연 없었다.

‘뭐, 그래도 내일 양왕부에서 재미있는 판이 벌어질 테니 기대되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단장을 마친 후 일상원으로 향했다.

진씨, 강심설, 주묘서, 주묘화는 벌써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백 이낭도 권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머님.”

엽연채가 안으로 걸어오더니 진씨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

진씨는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고 힐끗 쳐다보니 주묘서는 머리 장신구는 어제와 같게, 옷은 다르게 입고 있었다. 흐릿한 꽃문양이 들어간 노란색 상의에 수홍색 하의로 이루어진 대금과 유군을 입고 있었는데, 색의 조합과 옷차림이 어제의 자신과 조금 비슷했다. 보아하니 주묘서와 주묘화만 공을 들여 치장한 모습이라 자신과 두 자매만 양왕부에 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때 진씨가 잔기침을 하며 그들을 물렸다.

“그럼 이만 가 보거라!”

“큰새언니께서는 저희와 함께 안 가나요?”

주묘화가 강심설을 쳐다보며 물었다. 강심설은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어떻게 얻어 낸 초대장인지는 모르겠다만 그쪽에서 정말로 주씨 가문을 중요시해서 불렀을 리는 없으니 가 봤자 무시만 당할 게 분명했다. 자신은 그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철면피가 아니었다.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 가 볼게요.”

주묘서가 자리를 떨쳤다.

“잠시만요!”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니 비 이낭과 주종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비 이낭이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종과 도련님께서 아직 안 왔는데 가려고 하시다니요!”

진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둘째도 가겠다는 말인가?’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매섭게 몰아붙였다.

“이런 초대장으로는 젊은 아가씨들 몇 명만 가면 되네. 사내들은 갈 필요 없어.”

“왜 갈 필요가 없습니까? 생신 축하연 아닙니까! 축수祝壽 선물도 가져 왔습니다. 게다가 사내의 동행 없이 아가씨들만 가면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진씨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래도 비 이낭은 물러서지 않고 속사포처럼 퍼부어댔다.

“첫째 도련님 쪽과 셋째 도련님 쪽에서는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종과 도련님 쪽에서는 한 명도 가면 안 되나요?”

분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주비양과 주운환은 이미 가정을 이뤘으니 독립된 단위로 볼 수 있었다.

진씨는 치근덕거리는 비 이낭이 귀찮아 마지못해 허락하며 그녀를 쫓아냈다.

“알았으니 그만 물러나게!”

그제야 비 이낭은 의기양양해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양왕부에서 열리는 생일 축하연인데 어찌 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곳에서는 엄청난 기회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태자부에 갔던 엽연채와 주묘서가 또다시 원망스러웠다.

주종과는 어깨 위로 흐른 머리카락 한 가닥을 등 뒤로 넘겼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엽연채에게 자신이 지을 수 있는 미소 중 가장 멋진 미소를 날렸다.

“제수씨, 가시죠.”

엽연채가 무덤덤한 눈빛으로 쓱 쳐다보니, 그는 오늘 꽤나 공을 들여 치장한 모습이었다. 옷깃이 둥근 흰색 금포를 입고 있고 머리에는 은관銀冠을 쓰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옥대玉帶를 둘렀고 향낭 하나와 옥패 두 개도 차고 있었다.

‘뭘 이렇게 요란하게 치장했담? 설마 아가씨라도 꾀어내려는 건가?’

엽연채는 자신의 추측이 맞은 줄 몰랐다. 주종과는 진짜로 지체 높은 가문의 귀녀貴女를 유혹하려는 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주종과는 엽연채를 아내로 맞이한 주운환에게 시샘이 나 견딜 수가 없었고, 이에 자신도 명문가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수차례 다짐했다. 그러던 중 주묘서가 양왕부에서 보낸 초대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당연히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양왕부에서 열리는 축하연에 참석하는 하객들 중에는 그들처럼 어찌어찌 끼어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명문대가의 귀한 여인들일 터였다. 주종과는 이 기회를 꼭 잡아야만 했다. 엽연채보다 신분이 좋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 비천한 서녀 설옥인은 퇴짜 놓으면 그만이었다.

주종과는 자신이 이렇게 말쑥하고 멋스럽게 차려입었는데도 엽연채가 눈길 한번 주지 않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수씨, 태자부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땠나요?”

“큰아가씨께서도 가셨어요.”

주묘서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냉큼 말을 받았다.

“태자부는 정말 화려한 곳이었어요. 시녀의 차림마저 우리의 평소 차림보다 더 품위 있어 보였죠. 거기서 태자 전하와 양왕 전하도 뵈었어요.”

주종과는 함께 가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태자 전하라니! 태자 전하의 눈에 들 수만 있다면 고관에 임명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이에 주종과는 격양된 얼굴로 말했다.

“다음에는 제가 제수씨와 묘서를 데려다줄 테니 함께 가요.”

“그래요. 다음에는 둘째 도련님께서 아가씨와 셋째 부인을 데려다드리면 되겠네요.”

비 이낭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엽연채는 어이가 없어 조롱 어린 눈빛을 보낼 따름이었다. 진씨의 안색도 어둡게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천한 것들이 아주 야심만만하구나!’

진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 아이들은 태자비 마마의 처소에서 말린 꽃을 만든다. 외간 사내인 둘째가 가서 뭘 한다는 것이냐? 그리고 정말 바래다준다 하더라도 큰애가 있지 않으냐! 둘째 너는 다음 달에 있을 향시 준비나 착실히 하거라!”

주종과와 비 이낭은 반박할 수가 없어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했다.

“가요, 작은 새언니.”

주묘화가 엽연채를 당기더니 주묘서와 함께 방을 나섰다.

엽연채 일행이 수화문으로 걸어가니 호화로운 커다란 마차가 이미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여종을 데리고 마차에 올라탔고 주종과는 앞에서 말을 타고 동행했다.

마차에 탄 주묘서는 조그만 거울을 들고서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 비춰 보며 간간이 녹지에게 머리 장식이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입술연지는 어떠한지 따위를 물어봤다. 녹지는 미소를 지으며 꼼꼼히 살펴봐 주었다. 진씨는 춘산이 못 미더워 이번 외출 녹지를 동행하게 했다.

주묘서와는 달리 주묘화는 얇은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음속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자신들은 전에도 초대장을 받은 다른 사람을 따라 이런 자리에 종종 참석했지만 늘 비웃음을 샀을 뿐이었다. 자신은 주묘서처럼 낯짝이 두껍지 않아 매번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심지어 황족의 저택에 가게 되니 간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삼각쯤 지나니 마차가 멈춰 섰다. 주묘서가 발을 걷어 올리자 황족 저택의 웅장한 대문이 보였다. 대문 앞쪽에는 ‘양왕부梁王府’라는 세 글자가 적힌 커다란 도금 편액이 걸려 있어 드높은 기세가 느껴졌다.

주종과가 초대장을 내밀자 문지기가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주묘화는 더욱 목이 타 수놓은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비단옷을 입은 하인이 다가와 마차를 끌며 초목이 무성한 정원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일산日傘이 달려 있는 마차가 열 대 넘게 세워져 있었다. 비복들은 수선을 떨며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내려놓고 발을 걷어 올렸고, 각 가문의 귀녀들은 마차에서 내리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녀를 따라 걸어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때 비단옷을 입은 참하게 생긴 시녀가 엽연채 일행에게 다가왔다.

“가요.”

엽연채는 주씨 가문 자매와 주종과를 흘깃한 후 시녀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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