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엽연채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진짜 원인은 태자이지 않은가.
“주 부인,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때 소청이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직 죽느니 사느니 소란을 피우는 정도는 아니에요.”
엽연채는 손에 든 간식을 소청에게 건네며 말했다.
“참, 부인께서는 계시니?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구나!”
“주인마님께서는 아가씨를 보러 오셨다가 바로 외출하셨어요. 그러니 찾아뵙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소청아, 부탁 하나만 할게.”
“예, 말씀하세요. 주 부인.”
“너희 가문에서 장작을 패는 영감에게 외눈박이 고양이가 있지 않니? 내가 그 고양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사 가고 싶거든.”
“엥……?”
소청이 그녀의 엉뚱한 부탁에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 부인께서 저희 가문에 외눈박이 고양이가 있는 것도 아시네요.”
“전에 놀러 왔을 때 가끔 봤었거든.”
이 대답에 소청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투로 물었다.
“근데 그 고양이는 왜 찾으셔요? 걔는 음식도 훔쳐 먹고 물건도 숨기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녀석이에요. 거기다 한쪽 눈도 잃고 못생긴 데다 하도 성가시게 굴어 그 영감 외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요.
그 영감이 어릴 때부터 주인 어르신과 함께 지낸 사람이라 주인님께서 그냥 키우게 내버려 두시니 망정이지, 아니면 진작 쫓겨났을 거예요. 주 부인께서는 왜 그 못난이 고양이가 좋으세요?”
당연히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엽연채는 이미 생각해 둔 적당한 핑곗거리를 내밀었다.
“작년에 만만 언니와 놀려고 이곳에 왔었는데, 문지기가 지내는 문간방의 커다란 누렁이가 날 보고 막 짖어댔어. 그런데 그 못난이 고양이가 홱 뛰쳐나오더니 그 누렁이를 겁줘서 달아나게 만들었단다. 지금 우리 가문에서도 개를 기르는데, 매일같이 내 처소 쪽으로 달려와 짖어대도 우리 시어머니는 신경도 안 쓰시고……. 난 그 개가 너무 무섭거든. 그래서 그 고양이를 데려가고 싶구나.”
소청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서자의 아내이니 개조차도 무시를 하는구나!’
“알겠어요, 주 부인. 이쪽으로 오세요.”
소청은 길을 안내했다. 엽연채는 기뻐하며 그녀를 따라 냉큼 밖으로 나갔다.
추길과 혜연은 엽연채 뒤에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집에 언제부터 개가 있었지? 게다가 우리 처소로 달려와 짖어댄다고?’
그들은 엽연채가 고양이를 얻기 위해 그저 핑계를 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애써 구실을 댄 엽연채를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왜 고양이를 필요로 하신다는 말인가?
엽연채와 여종들은 집안을 돌고 돌아 마침내 장작을 패는 영감의 처소 앞에 도착했다. 환갑이 넘은 영감은 등이 굽었고 백황색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노인의 모습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체격이 건장한 편인 그는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는 중이었다.
“영감님.”
소청이 그에게로 걸어가더니 엽연채가 고양이를 사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영감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그러자 엽연채가 앞으로 다가서며 설득했다.
“섭섭해서 그러시는 거 알아요. 아내가 남긴 녀석이잖아요. 하지만 그 고양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으니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요.”
소청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해했다. 고양이가 영감의 아내가 키우던 놈이란 걸 엽연채가 어떻게 아는 걸까? 그러나 소청은 중요한 걸 묻는 대신 그저 엽연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저께도 사람들에게 커다란 몽둥이로 얻어맞더라고요. 차라리 주 부인께 드려 살길을 찾아주는 게 낫죠.”
영감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 쥐포 조각을 들고 나오니 잠시 후 그 못난이 고양이가 냄새에 이끌려 다가왔다. 그러자 영감이 재빨리 그 고양이를 마대 자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데려가세요!”
영감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고마워요.”
추길은 마지못해 인사하기는 했지만 내심 이 고양이가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대 자루 안에 담긴 고양이를 꺼림칙하게 받아 들었다.
“혜연아, 가서 은화 열 냥을 가져오너라.”
“괜찮습니다!”
영감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
“그저 녀석을 잘 돌봐 주시면 됩니다. 데려가셨는데 집안사람들이 녀석이 못생겨서 싫어하거나 음식을 훔쳐 먹고 물건을 숨긴다고 싫어하면 다시 보내 주세요.”
“그래요. 잘 돌볼 겁니다. 고마워요.”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소청에게도 답례했다.
“고맙다, 소청아.”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소청은 그들을 수화문까지 바래다준 뒤 다시 돌아갔다.
한편, 수화문 근처 살구나무 뒤에는 엽이채가 숨어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가 떠나가는 모습을 어두운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분한 마음에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웃음거리가 된 날 보려고 일부러 온 거겠지?”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러려고 왔으면 왜 마님을 찾아오지 않았겠어요? 그저 큰아가씨를 보러 오신 게 분명해요.”
그렇게 말하더니 류아가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큰마님, 어서 돌아가요. 소청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그 말에 엽이채의 낯빛이 확 변했다. 장만만이 측비 후보에서 제명된 이유는 자신과 장박원이 사랑의 도피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엽이채는 장만만을 곁에서 모시는 여종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 엽이채는 문밖으로 나설 엄두조차도 못 내고 있었는데, 엽연채가 왔다는 소식에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자신의 험담을 해 장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더욱 미워할까 봐 이렇게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감시하지 않았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골탕을 먹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분명 내 험담을 하러 왔을 거야. 그런데 어머님께서 출타를 하셨으니 말할 수가 없었던 거지.”
엽이채가 차갑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마님, 일단은 참으셔야 합니다. 다음 달 향시에서 부군께서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시면 집안 분위기도 한결 나아질 겁니다. 그리고 내년에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하시면 모든 게 다 지나갈 거예요.”
류아가 그녀를 위로하자 엽이채는 살짝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렇다.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면 된다. 자신은 여전히 장씨 가문의 귀한 큰마님이고 좀 있으면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될 것이었다.
‘그날이 바로 이 고난에서 벗어나는 날일 테지! 그리고 나랑 달리 엽연채는 여전히 서자의 아내일 거고.’
“류아야, 너 방금 전에 고양이를 가지러 가는 엽연채와 여종들의 뒤를 밟았잖아. 그것들이 뭐라고 하더냐?”
엽이채가 배를 부여잡고 조심조심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운을 뗐다.
“주씨 가문에서 개를 한 마리 키우는데 매일 주 부인 처소 앞에 와서 짖어대는 바람에 무서운가 봐요. 저희 가문에 있는 그 못난이 고양이를 가져다 집 지키는 고양이로 삼으려 한대요.”
류아가 ‘피식’ 조소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엽이채도 고소했는지 저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졌다.
“개조차도 엽연채를 업신여기는구나. 쯧쯧. 어머니 말씀이 맞았어. 사람들이 비웃는 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잊힐 거야. 하지만 엽연채는 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한평생 모욕당하고 고통받겠지.”
‘역시 장박원과 달아나기를 잘했어! 지금은 잠시 수모를 겪고 있지만 금방 상황이 좋아질 거야. 하지만 엽연채는 평생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 * *
한편, 경인은 마차를 몰고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는 날카롭고 처량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추길은 계속 몸부림쳐대는 마대 자루를 쳐다보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왜 하필 이렇게 못생긴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가시려고요? 고양이를 키우고 싶으신 거면 밖에도 널려 있잖아요.”
그러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당부했다.
“다 쓸데가 있으니 함부로 대하지 말거라!”
이 고양이는 아주 영리한 녀석이었다. 전생에 엽이채가 장씨 가문으로 들어온 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지냈는가. 그전에는 자신도 이 고양이가 못생기고 눈도 한쪽이 멀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자신도 이 고양이처럼 눈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엽이채와 장박원 사이의 일을 전연 눈치채지 못했다는 말인가? 거기다 굳이 장씨 가문으로 시집오겠다고 고집을 부려 고생을 사서 하지 않는가?
동병상련에 밥을 두 번 챙겨 줬더니 이 고양이는 매일같이 쥐포 조각을 물고 자신을 찾아왔었다. 물론 그 쥐포를 먹지는 않았지만 고양이의 보은하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지금 자신에게 아주 쓸모가 있는 녀석이었다.
정국백부에는 고양이 집으로 쓸 만한 우리가 없었다. 이를 알고 있던 경인은 대로를 지나갈 때 갑자기 마차를 멈춰 세우더니 상점으로 달려가 커다란 우리를 하나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고양이가 갑자기 낯선 환경에 놓이면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경인을 시켜 고양이를 철제 우리 안에 넣어 두었다. 그런 다음 모두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관찰했다.
녀석은 온몸이 새까만 검은 고양이로, 한쪽 눈은 안구가 아예 없고 다른 한쪽 눈은 황금빛이 살짝 섞인 흔한 노란색이며 거기에 털은 더럽고 지저분해 정말 지독히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고양이는 놀랐는지 철제 우리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계속해서 ‘야옹야옹’ 울어댔다. 목이 다 쉰 듯한 그 울음소리가 한없이 처량했다.
추길과 혜연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 고양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추길이 먼저 입을 뗐다.
“이렇게 시끄러우면 저녁에 한숨도 못 잘 거예요.”
“일단 쥐포 조각을 줘 보자. 며칠 지나면 이곳에 익숙해질 거야. 그럼 깨끗이 씻겨 주고 털도 정리해 주자꾸나.”
엽연채의 말에 혜연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고집을 피우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뒤뜰에 있는 백양나무 아래에 가져다 놓아야겠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더니 우리를 집어 들고는 뒤뜰로 걸어가 나무 아래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혜연아, 주방 어멈에게 돈을 쥐여 주면서 생선을 좀 삶아 달라고 해서 가져오너라.”
혜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서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삶은 생선을 고양이에게 먹여 주니 녀석은 안정을 되찾았는지 우리 안에 엎드려 코를 드르렁 골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엽연채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방으로 돌아가 서책을 읽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