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배고프다고 말하던 참인데 마마가 밥을 가지고 오셨네요.”
“그래, 밥 먹으러 가자꾸나.”
엽연채는 몸을 일으켜 소청으로 걸어갔다.
“셋째 마님, 식사하세요!”
교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불렀다. 그러곤 찬합을 열어 안에 든 요리를 하나씩 상 위에 올려놓았다. 홍조구기증계紅棗枸杞蒸鷄(붉은 대추와 구기자를 넣고 찐 닭 요리), 홍소저제紅燒猪蹄(돼지족발), 육장증수단肉醬蒸水蛋(잘게 다져 저민 고기를 넣은 계란찜), 청초유맥채清炒油麦菜(식감이 사각사각하도록 살짝 볶은 상추 요리), 그리고 국 한 가지가 차려졌다.
추길과 혜연은 밥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모, 일상원 음식을 이리로 가져온 거 아니에요?”
추길이 묻자 교 마마가 다소 주저하며 대답했다.
“음… 그런 셈이지. 그쪽에서 갑자기 밥을 안 먹겠다고 하더라고. 뭐 다른 거라도 먹었나 보지. 마침 주방에 사람이 없기에… 내가 가지고 왔어. 어디 말하고 다니면 안 돼. 안 그러면 거기서 날 못살게 굴 거야.”
이리 둘러대면서 그녀는 속으로 의문스러워했다.
‘셋째 도련님은 주방에 돈을 주며 반찬을 추가하라고 해 놓으시고는 어째서 비밀로 하시랬을까?’
추길에게 이런 음식은 귀한 음식이 아니었다. 평소에 아가씨의 사비로 사 오는 음식이 이보다 진수성찬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장한 위장에 백채소육사를 밀어 넣는 데 비하면 훌륭한 만찬이었다.
추길은 두말 않고 시원하게 약속했다.
“그럼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이따가 찬합과 접시를 가지러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교 마마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가 국그릇 뚜껑을 열어 보니 안에는 계각탕鷄脚湯(닭발을 땅콩, 생강 등과 함께 푹 곤 탕)이 들어 있었다. 엽연채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 붉은 대추와 구기자를 많이 넣어서 그런지 입 안에 넣자마자 달달한 향이 퍼졌다.
식사를 마친 엽연채가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경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서신이 왔습니다.”
경인은 이내 쿵쿵거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서신을 받아 든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정성定城에서 보낸 것이냐?”
“정성이요? 누가 보낸 거예요?”
차를 들고 오던 추길이 엽연채가 앉아 있는 침상 곁 조그만 탁자 위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때 혜연이 ‘아’ 소리를 내질렀다.
“생각났다! 지난번에 온씨 가문에 가서 마님의 혼수 단자를 찾았잖아. 그때 노마님께서 단자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셔서 아가씨가 역참에 가서 은화를 무려 오십 냥이나 주고 전서구를 이용해 정성으로 서신을 보냈잖아. 이모님에게 마님의 혼수 단자를 보내 달라는 내용을 적어서 말이야.”
“그래, 그랬었지.”
추길도 생각이 났는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는 이미 서신 봉투를 뜯은 후였다. 추길과 혜연은 목을 쭉 내밀고 쳐다봤다. 엽연채는 한눈에 열 줄씩 읽어 내려갔는데 표정이 영 시원치 않았다.
“아가씨, 어떻게 됐대요? 단자가 없대요?”
혜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없다고 하지는 않았어.”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어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신이 정성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서신을 받은 사람은 큰 사촌 오라버니야. 이모께서 사촌 오라버니들을 데리고 함께 도성으로 오고 있으시대. 유월 초에 정성에서 출발했으니 칠월 상순쯤에 도성에 도착할 거래. 그리고 우리 어머니 혼수 단자 이야기는 이모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했다네. 오라버니가 날 도와주려고 찾아봤는데 결국 찾지 못했대. 이모가 도성에 도착하면 직접 여쭤보라고 적혀 있어.”
“무슨 혼수 단자 한 장 받기가 이리 어려워요.”
추길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이모님께서 아가씨 사촌 오라버니들을 데리고 도성으로 오신다고 했죠? 이모님께 아들이 몇 분이나 계세요?”
“어머니가 전에 이모께서 아들을 내리 다섯이나 낳았다고 아주 부러워하셨어.”
“다섯이요?”
추길과 혜연은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어째서 말 한마디 없이 마님의 혼수 단자를 가져가신 걸까요?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건지 모르겠네요.”
추길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엽연채의 큰이모 온사월은 황상皇商(궁에 물품을 조달하는 상인)인 추씨 가문에 시집을 가 서북쪽 정성에서 지냈다. 출가한 후로는 십 년 전에 딱 한 번 도성을 방문했고 그게 마지막 방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온씨도 그녀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 엽연채는 큰이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히 사서 걱정하지 말자. 우리 일이나 잘하고 있는 게 최고야.”
“셋째 마님,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이때 바깥문에서 녹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냐?”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보통 녹지가 그녀를 부르러 왔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을 전할 땐 녹엽이 왔다.
안으로 들어온 녹엽이 그녀에게 분홍색 초대장을 건넸다.
“초대장입니다. 마님 쪽으로 보내졌는데 셋째 마님께 온 초대장이라 마님께서 셋째 마님께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지난번 태자비가 초대장을 보낸 후부터 진씨는 서쪽 측문에서는 초대장을 받지 못하게 명을 내렸다. 모든 초대장이 우선 자기 손을 거치게 한 것이다. 물론 이 명령은 소종에게만 유효했다. 경인이 손에 넣은 건 즉시 엽연채에게 전달됐다.
“그래, 고맙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녹엽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이 초대장이 아주 익숙했다. 출가하기 전 자주 받던 것으로, 바로 장만만이 보낸 초대장이었다.
“장씨 아가씨께서 보내신 거네요.”
혜연도 초대장을 알아보았다.
“그래.”
엽연채가 초대장을 열어 보니 몇 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보고 싶으니 장씨 가문에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가지 마세요. 가서 보면 속상하기만 하죠.”
추길이 대번에 말렸다. 그녀는 엽이채 부부가 장만만의 간택 탈락으로 궁지에 몰려 비참해진 꼴은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만, 당사자인 장만만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안타까웠다.
추길은 여전히 장만만을 좋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속이 상했다. 장씨 가문에 도착해 그 빌어먹을 부부를 보면 응당 조롱해 줘야 할 텐데, 그러면 장만만에게도 상처를 주게 되는 셈이니 참아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라고 초청하셨는데 우리가 안 가면 더 상심하실 거야!”
혜연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염려했다.
“가자꾸나.”
엽연채는 금세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장씨 가문에 가야 했다.
‘가서 만만 언니도 보고, 간 김에 그 고양이도 데려오자.’
“언제 갈까요?”
추길이 물었다.
“지금.”
그러면서 엽연채는 하늘의 색깔을 살펴봤다. 아직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채 되지 않아 바로 가면 저녁 식사 전에 돌아올 수 있을 법했다. 방금 전 급하게 식사를 하느라 태자부에 갈 때 입었던 대금과 유군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러니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마차에 올라탄 엽연채는 하품을 했다. 온몸이 쑤시듯 아파 뼈가 모두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 * *
이각쯤 지나니 마차는 장씨 가문 동문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은 엽연채 일행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엽… 아니,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아니십니까? 저희 가문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전에 엽연채는 가끔 장씨 가문에 방문했고 얼굴도 워낙 예쁘게 생긴 터라 그녀를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와 장씨 가문의 관계는 한마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곳에 오다니, 정작 본인은 껄끄럽지 않은 건가?
엽연채는 분홍색 초대장을 꺼내 보였다.
“만만 소저의 초대를 받고 왔다.”
문지기는 초대장을 알아보더니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장씨 가문은 공훈이 있는 귀족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그리 부유하지 않고 집안 규모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신하고 고아한 운치가 느껴지는 묘한 곳이었다.
엽연채는 익숙한 듯 장만만의 처소로 주저 없이 걸어갔다. 낭하에 앉아 있던 장만만의 여종 소청이 엽연채를 보더니 얼른 달려왔다.
“엽 소… 아니, 주 부인, 빨리 오셨네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녀의 손에는 백미재百味齋의 연자내고蓮子奶糕(연밥을 우유, 쌀가루와 함께 끓였다 식혀 굳힌 떡)가 들려 있었다. 장만만이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연채야…….”
이때 방 안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장만만이 걸어나왔다. 연녹색 얇은 중의中衣(겉옷 안에 입는 홑옷) 차림의 그녀는 머리는 산발에 낯빛은 창백했고 둥그스름했던 얼굴도 야위어 홀쭉해져 있었다.
엽연채를 본 장만만은 두 눈을 번뜩이더니 얼른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부탁했다.
“연채야, 나 좀 도와줘…….”
추길은 어리둥절해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가씨, 저희 아가씨께서 어떻게 아가씨를 도와드려요?”
“왜 못 도와줘?”
반문한 장만만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봤어. 네가 태자부에 들어가는 모습을 봤단 말이야. 그러니 네가 태자 전하께 서신 한 장만 전해 줘…….”
“언니, 제가 그분께 서신을 전해 드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엽연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안타까워했다. 분명 마음이 편치 않았던 장만만이 태자부 주변을 서성이다가 자신이 태자부에 방문했음을 알게 됐을 것이다.
장만만이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지난번에 황후 마마께서 계신 궁에서 전하를 뵈었어. 전하께서 나더러 마음이 어질고 성품이 고상하다고 칭찬해 주셨어. 내 자字(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도 좋다고 하셨는데…….”
“만만 언니, 혹시 태자 전하와 자주 만났어요?”
엽연채의 질문에 장만만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후 마마의 궁에서 한 번 뵈었지…….”
“태자 전하께서 언니를 한 번밖에 보지 못하셨는데… 설마 언니에게 감정이 생겼겠어요?”
엽연채가 정곡을 찌르자 장만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마 태자 전하께서는 아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셨을걸요.”
소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장만만을 전혀 거들지 않고 오히려 엽연채와 합심하여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아가씨께서 이리 행동하시면 주 부인을 정말 난처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건 태자 전하가 변심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집안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주 부인을 통해 서신을 전달하면 아가씨의 명예와 지조는 어쩌시려고요? 그리하시면 태자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업신여길 겁니다.”
장만만은 몸을 비틀거리더니 돌아서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 체면이고 뭐고 집어 던지고 죽어라 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