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태자비는 엽연채가 초대장을 집는 모습을 보자 더는 참지 못하고 이리 당부했다.
“주 부인, 양왕은 방탕하고 바람기가 다분한 자이니 털끝만큼도 엮여서는 안 되오. 양왕과 관계를 맺었다가는 명예와 지조를 지키지 못할 것이오!”
이 말을 꺼내고 나니 태자비와 태자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양왕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 자신들은 엽연채 앞에서 고상한 풍격과 높은 절개를 지켜야만 한다. 그럼 어떻게 그녀에게 손을 댄다는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태자의 낯빛이 또다시 어두워졌다. 오늘 가까이에서 엽연채를 볼 수 있었다. 분위기도 괜찮아서 앞으로 몇 번 더 왕래하며 친해지면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못내 착잡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세!”
태자비가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엽연채를 물렸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린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태자는 이내 콧방귀를 뀌더니 소매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태자비는 금방이라도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자가 정화원 밖으로 나와 자신의 서재로 향하자 이계가 그의 뒤를 따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을 묶어 올까요? 밤에 전하께서 그분을 취하시면 고분고분해질 겁니다.”
두 사람은 서재로 들어갔고 태자는 창문 앞에 놓인 녹나무 태사의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도 그런 생각을 했던 터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오늘 자기 곁에 다소곳이 앉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더니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으뜸가는 미인을 그런 무례한 방법으로 대해서야 되겠는가? 천천히 공을 들여야 한다. 그녀가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스스로 원해야 비로소 그녀를 취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 *
한편, 정화원 밖으로 나온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수수한 차림의 시녀를 따라 수화문으로 걸어가니 금슬이 때마침 주묘서를 데리고 오는 모습이 보였고, 추길과 춘산은 벌써 그곳에 서서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새언니!”
주묘서가 엽연채를 보더니 꽤나 흥분한 얼굴로 서둘러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주 부인, 주 소저, 그럼 살펴 가세요.”
금슬은 다른 시녀에게서 정화원 쪽에서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서둘러 돌아갔다.
“마차에 오르죠!”
엽연채가 말했다. 주묘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한가득이었지만 일단 엽연채의 말대로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네 사람이 마차에 올라 자리를 잡자 경인은 말채찍을 휘두르며 태자부를 떠났다.
주묘서가 들뜬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작은 새언니, 글쎄 제가 방금 양왕 전하를 뵈었어요. 금슬이와 꽃을 말리고 있었는데 절세미남이 걸어오는 거예요. 정말… 정말 수려한 얼굴이었어요!”
주묘서는 배움이 적어 양왕의 미목수려한 외모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희 옆을 지나가시는 거예요.”
말하던 중에 주묘서는 불현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양왕 전하께서 정화원으로 들어가시지 않았어요? 작은 새언니는 가까이에서 전하를 뵈었죠?”
“네, 맞아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묘서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어떻게 된 게 좋은 건 다 엽연채에게만 가는 걸까.
“양왕 전하께서는 도성 제일의 미남이라고 하던데요.”
춘산이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나도 그런 소릴 들은 적이 있어. 수많은 여인들이 그분에게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하더라고요. 양왕부에는 미인이 하도 많아 지낼 곳이 없다고 들었어요.”
추길이 맞장구를 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엽연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엉뚱한 대꾸를 했다.
“부군의 외모도 그분께 뒤지지 않거든.”
주묘서는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잘생기면 뭐 해. 그래 봐야 서자에 불과한데. 어디 양왕 전하와 비교할 수 있나 있어!’
“작은 새언니, 방금 전에 안에서 뭘 했어요?”
“꽃을 닦은 후 차를 우렸어요.”
엽연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차를 우릴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을 쳐다보던 태자의 눈빛이 떠올랐고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이 몰려왔다. 최대한 빨리 그 물건을 태자의 서재에 가져다 놓고 다시는 그 구린내 나는 곳에는 발길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주묘서는 엽연채가 안에서 차를 우렸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음 한구석에서 불쾌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작은 새언니, 태자 전하와 양왕 전하께 차를 올리셨어요?”
“태자비 마마께도 차를 올렸죠.”
엽연채는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하더니 양왕이 준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아 참, 이건 양왕 전하께서 주신 초대장이에요.”
“뭐라고요?”
주묘서는 초대장을 확 낚아채 내용을 급히 읽어 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불쾌했던 마음이 싹 사라지면서 그녀는 기대에 부풀어 싱글벙글했다.
마차가 빠르게 달려 이각쯤 지나니 정국백부에 도착했다. 주묘서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치마를 걷어 일상원으로 뛰어갔다.
“어머니, 어머니!”
주묘서는 뛰어가며 진씨를 연신 불러댔다.
* * *
그 시각 일상원.
진씨는 차를 마시고 있고 백 이낭은 하좌에 앉아 그녀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묘서의 낭랑하고 들뜬 목소리가 밖에서 울려 퍼졌다.
진씨는 얼른 찻잔을 내려놓았다.
“돌아왔나 보구나.”
“그런가 보네요!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꽤 좋으신가 봐요.”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주묘서가 외출한 뒤로 진씨는 집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엽연채가 일부러 주묘서를 난처하게 하며 딴지를 걸지는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주묘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기쁘게 들렸다. 진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주묘서가 까르르 웃으며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그래, 묘서야, 돌아왔구나.”
진씨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렴이 걸린 곳으로 걸어갔다. 주묘서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걸어오는 모습을 본 진씨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고 이내 모녀는 침상 위에 함께 자리했다.
“어떻게 됐느냐? 응?”
“어머니, 태자부에서 태자 전하와 양왕 전하를 뵈었어요.”
주묘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흐릿한 교룡 문양 금박이 붙어 있는 초대장을 꺼냈다.
“보세요. 이게 양왕 전하의 초대장이에요.”
진씨가 초대장을 열자 주묘서가 안에 든 내용을 읽었다.
“명일明日 칠월 이레에 양왕부에서 생일 축하연이 열리니… 참석 부탁드립니다.”
“왜 초청자의 이름을 적는 부분이 비어 있는 거죠?”
백 이낭이 고개를 쭉 내밀고 물었다.
“왜 그런 건지 나도 몰라요. 이 초대장은 작은 새언니가 준 거거든요.”
주묘서의 대꾸에 진씨가 놀라 물었다.
“셋째가 줬다는 말이냐? 그럼 너희 둘이 한자리에서 태자비 마마께 말린 꽃을 만들어 드린 게 아니란 말이냐?”
“처음에는 같이 했어요.”
주묘서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태자비 마마의 방 한편에 앉아 꽃을 닦았어요. 그러다가 태자 전하께서 오셨고 잠시 후 태자비 마마께서 꽃은 거의 다 닦았으니 사람을 시켜 꽃을 말리라고 하셨어요. 그때 금슬이가 저에게 같이 나가서 꽃을 말리자고 했어요. 작은 새언니는 방 안에 남아 차를 우렸고요.”
진씨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차를 우리는 건 귀인과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차를 잘 우렸다면 태자비 마마와 태자 전하의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좋은 기회는 엽씨가 다 가져가는구나!”
그러자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좋게 말했다.
“그 금슬이라는 사람은 아마 마마의 시녀겠죠. 그 사람이 큰아가씨에게 가자고 한 것이니 셋째 부인을 나무랄 수는 없죠.”
그러나 진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여전히 꼬투리를 잡았다.
“설령 시녀가 시킨 거라 하더라도 왜 걔는 자기가 가겠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단 말이냐? 이미 몇 번 왕래가 있지 않았더냐? 그럼 친해졌을 테니 자기가 가겠다고 말을 꺼낼 수도 있었지 않았겠느냐! 분명 묘서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키고 자기는 귀인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차지하려고 한 게지.”
“그 말씀이 맞네요.”
백 이낭이 살며시 웃으며 수긍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시며 자신의 눈에 담겼을 조롱기를 숨기려 했다. 엽연채를 따라간 것만 해도 주묘서는 이미 그녀의 덕을 본 셈이었다. 무슨 이유로 좋은 기회를 전부 주묘서에게 양보한다는 말인가?
“다음에는 그렇게 얼빠지게 굴어서는 안 된다.”
진씨의 당부에 주묘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음에도 꽃을 말리러 가자는 등의 소리가 나오면 그땐 반드시 엽연채를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이 초대장은 셋째가 차를 끓였기 때문에 받은 것 아니냐?”
진씨가 물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주묘서가 입을 삐죽 내밀고 불퉁하게 대답했다.
“전 그때도 자리에 없었어요.”
주묘서는 손을 뻗어 초대장을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이내 발이 허공에 붕붕 뜨듯 기분이 대단히 좋아졌다.
진씨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주씨 가문은 이미 오랫동안 제대로 된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그럴싸한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이번에는…….
* * *
한편, 마차에서 내린 엽연채는 추길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과원으로 걸음했다.
난죽거의 대문은 열려 있었고 주운환은 서재에서 서책을 보고 있었으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이때 밖에서 엽연채와 추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서책에서 서간지 한 장을 꺼냈다. 양왕이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이었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더니 서책을 덮었다.
엽연채와 추길이 궁명헌으로 들어오자 혜연이 얼른 그들을 맞이했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응, 이제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밖에 안 됐네.”
엽연채가 걸어 들어오며 인사를 받았다.
“지난번에는 마마께서 두 번 다 식사를 챙겨 주셨는데 오늘은 아무 말씀이 없더라. 배고파 죽겠어!”
추길이 배를 문지르며 혜연에게 하소연했다.
세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왔고 엽연채가 나한상에 기대어 앉자 추길이 얼른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아가씨, 다리가 저리지는 않으세요?”
“좀 저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동안 무릎을 꿇고 있느라 사실 꽤나 고단했다.
“아가씨, 얼른 밖에 가서 먹을 것을 사 올게요.”
혜연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엽연채를 보더니 음식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럴 거 없다.”
엽연채가 축 처진 모습으로 말했다.
“집안 주방에서 보내온 게 있으면 그걸 먹자꾸나. 백채소육사도 삼삼한 게 꽤 괜찮더구나.”
“그래, 배고픈데 대충 먹으면 되지 뭐.”
추길의 동조에 혜연은 알겠다고 대꾸했다. 이내 그녀가 밥을 가지러 방을 나서는데 마침 한 어멈이 찬합을 들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교 마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