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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37화 (137/858)

제137화

태자는 눈엣가시이던 주묘서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더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에 태자비는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 엽연채를 쳐다보더니 부드럽게 청했다.

“주 부인, 손에 든 꽃이 아주 고우니 그걸로 백화차百花茶나 한 잔 만들어 주시게나!”

그 말에 엽연채는 살짝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빨리 자신에게 손을 쓰지는 않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거기다 태자비는 아직 태자와 밀고 당기기를 하고 싶어 하니 더더욱 오늘은 손을 쓰지는 않을 것이었다.

엽연채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마마.”

이에 태자비는 차를 끓이고 있던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비단옷 차림의 두 시녀는 얼른 일어나 자신들 앞에 놓인 기다란 탁자를 들어 올리더니 태자비와 태자가 앉아 있는 삼면에 만자형卍字形 난간이 달려 있는 박달나무 긴 침상의 발판 아래에 내려놓았다.

한쪽으로 물러나던 시녀들 중 한 명이 엽연채를 불렀다.

“주 부인, 이쪽으로 오세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수정 접시에 꽃을 담은 후 앞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태자와 태자비의 발 근처에 놓인 탁자 앞에 다소곳하게 자리했다.

이내 수수한 차림의 시녀가 깨끗한 물을 담은 접시를 들고 왔다. 엽연채는 그 물로 손을 씻은 후 고개를 숙인 채 백화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태자는 처음으로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엽연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차를 우리는 데 집중하고 있는 그녀는 새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여성미가 돋보이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금과 유군 차림이었다.

우아한 옅은 노란색 상의의 앞섶 단추 사이로 흐릿한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주황색 속옷이 보였는데, 그 속옷이 풍만한 가슴을 봉긋하게 잡아주고 있었고 윤기가 흐르는 새하얀 피부와 아찔한 쇄골은 매혹적인 관능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반면, 아리따운 곡선을 그리는 두 눈과 눈썹 아래 눈초리에선 순수한 아름다움이 묻어났다. 그녀는 풋풋하면서도 사람을 매료하는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태자의 시선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녀의 몸에 꽂혀 있었다. 소녀가 풍기는 그윽한 향기는 향긋한 꽃차 내와 어우러져 그의 마음을 달뜨게 했다. 그는 옥처럼 하얀 손에 쥔 쥘부채로 손아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속도는 점차 빨라져 조급해진 그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전하, 마마. 차가 완성되었습니다.”

잠시 후, 소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검은색 자기 찻잔을 들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리땁고 요염한 얼굴에선 빛이 흐르고 있었다.

태자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그녀를 어루만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양왕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손을 뻗치려 했던 태자의 팔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태자비는 자신 앞에서 다른 여인에게 마음이 동한 태자의 모습을 보고는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는데, 갑자기 양왕이 들어오자 속으로 통쾌해 마지않았다.

태자 내외 앞으로 자주색 망포를 입은 사내가 걸어왔다. 우아하고 맵시 있는 자태에 고귀함이 흘러넘치는 이 사내는 바로 양왕이었다.

“태자 전하.”

양왕이 걸어오며 그를 불렀다. 그의 등장에 태자의 수려하고 기품 있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창 흥이 나 있었는데 불청객의 등장에 산통이 다 깨져 버린 탓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은 어쩐지 자신이 좀 상스러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양왕이 여긴 어쩐 일인가?”

태자는 온화하고 고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며칠 전에 태자 전하께서 이계를 저희 저택으로 보내 내일 있을 생일 축하연의 초대장을 받아오라고 하셨다는데, 무슨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양왕의 물음에 태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차분히 대꾸했다.

“내일이 아우의 생일 아닌가? 이참에 벗들을 더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이계를 시켜 초대장을 더 받아오라고 한 것뿐이네. 아우는 이런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는가? 하는 일 없이 한가한 줄 알았는데 집안일까지 전부 관장하는가?”

양왕은 고상하고 수려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형님은 말씀도 참……. 제가 설마 그런 옹졸한 사람이겠습니까? 육 측비 쪽에서 마침 초대장이 다 떨어졌다고 저에게 알려 오기에 형님께 제가 직접 가져다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언서가 쟁반 하나를 들고 왔는데, 위에는 교룡 문양 금박이 붙어 있는 초대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허허허, 아우가 이리 마음을 써 주는구려.”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런데 형님, 형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엽연채 뒤에 서 있던 양왕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태자와 태자비는 마음속에 켕기는 게 있는지라 순간 뜨끔했다. 태자비가 얼른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한가로워 차를 끓여 맛을 보고 있었어요. 양왕도…….”

태자비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상대방에게 차를 한 잔 권할 테지만 그들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양왕이 눈치 없이 그러겠노라 승낙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형수님?”

양왕이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우며 그녀를 불렀다.

태자비는 자신의 방정맞은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었다. 방금 전 ‘양왕도’는 왜 꺼냈단 말인가. 그래 놓고 이제 와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으니!

속에서 열불이 난 태자는 어서 양왕을 내보낼 생각뿐이었다. 안 그러면 이런 절세미인이 앞에 자리하고 있으니 양왕은 분명 저를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양왕의 눈에는 이미 그녀가 들어온 후였다. 이 미인은 여리여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어 뒷모습만 봐도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설레었다. 태자는 엽연채의 특별한 미색에 놀라워하는 양왕의 눈빛을 읽어 냈다.

“형님, 이 소저는 누구입니까?”

태자와 태자비의 안색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차를 끓이는 아이입니다. 하하하.”

태자비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둘러대자 엽연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돌려 양왕에게 예를 올렸다.

“소인은 엽씨라고 하옵니다. 양왕 전하를 뵈옵니다.”

양왕은 엽연채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아주 배우 납셨네!’

태자와 태자비의 낯빛이 확 변했다. 그들은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채 양왕이 태자의 하좌에 놓인 권의에 자리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양왕이 미소를 지으며 청했다.

“형님, 차를 우리셨으니 이 아우도 한 잔 주시지요.”

그러더니 양왕은 사냥감이라도 발견한 양 두 눈에 방탕한 기색을 번뜩이며 엽연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태자는 그 모습에 분노가 용솟음쳤다.

양왕은 권의에 기대어 앉은 채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손등을 살짝 굽혀 뺨 아래에 갖다 댔다. 그러곤 풍류남 기질이 다분한 달달한 눈빛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전에 그를 몇 번 보았을 때는 항상 자신을 향해 싸늘한 눈빛만 번뜩였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고 드디어 본인 눈이 가진 장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으로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으니, 엽연채는 그가 명연기 중임을 알면서도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엽연채는 몸서리를 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아예 배우로 전업하시지 그래!’

태자는 분통을 이기지 못했다. 아우는 바람둥이로는 대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내였다. 양왕부에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미인들이 이미 셀 수 없이 많은데도 양왕은 손에 넣을 수만 있으면 전부 그의 저택으로 데려갔다. 매력 넘치는 풍류가인 그가 아가씨들에게 눈길 한 번만 주면 그녀들은 죽자 살자 그의 저택으로 달려들었다.

이에 황제는 수차례 탄식하기도 하였다.

“양왕은 여색을 밝히다가 언젠간 스스로를 망칠 것이다. 큰일을 맡기기에는 태자가 적합하지. 자유분방하고 방탕한 양왕과는 달리 어질고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으니 말이다.”

황제의 이 말에 태자는 지금까지 자긍심을 갖고 살아 왔고, 그 말을 자신의 행동 준칙으로 삼았다. 어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신은 양왕 같은 방탕아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양왕은 미인이기만 하면 건드릴 수 있는 대로 다 건드렸다. 물론 미인이 먼저 유혹하는 경우에도 거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 같은 절세미녀가 앞에 있으니, 양왕이 그녀에게 신경이 안 쓰이고 배기겠는가?

태자는 냉랭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뭐 하다니요? 그저 차 한 잔 얻어 마시려는 것뿐입니다.”

그리 말하는 양왕의 눈빛은 여전히 엽연채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태자비와 태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뻔뻔한 작자를 봤나!’

특히 태자는 그의 얼굴에 차라도 끼얹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자는 차디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께서 너에게 이르신 충고를 벌써 잊었느냐?”

“무슨 말씀이요?”

양왕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바마마께서 저에게 당부를 하신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죠. 어떤 충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다니!’

태자는 하는 수 없이 직접적으로 경고했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그렇다고 치자. 혼인을 하지 않은 소저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네들이 네 저택에 들어가고 싶어 하면 그들 집안에서 동의만 하면 됐지. 그러나 주씨 가문의 며느리인 이 엽씨는 네 형수의 벗이고 부군이 있는 몸이다. 설마 그런데도 유혹하려는 것이냐? 내 너처럼 후안무치한 인간은 처음 보았다!”

그 말에 엽연채와 태자비는 기가 차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 그런 뻔뻔한 사람이 아닙니다.”

양왕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음, 벗의 아내이니 건드려서는 안 되지! 더군다나 주운환의 아내이며 아랫사람이지 않은가.’

그는 언서가 들고 있는 쟁반으로 손을 뻗어 초대장 하나를 집어 들더니 엽연채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칠석인 내일 양왕부에서 생일 연회가 열리니 부인도 꼭 참석하시오.”

말을 마친 그는 가벼운 미소를 날리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태자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여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내가 어렵사리 찾아낸 엽연채를 이렇게 양왕에게 빼앗기는 건 아니겠지?’

한편, 엽연채는 그 초대장을 집어 들더니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정말로 단순히 초대장만 전달하러 온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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