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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36화 (136/858)

제136화

출발한 지 이각쯤 지난 후, 경인은 이미 익숙해진 태자부의 동쪽 측문으로 들어서더니 수화문에서 마차를 멈춰 세웠다.

주묘서가 엽연채를 따라 마차에서 내려서자 화려한 차림의 어여쁜 시녀가 그들을 맞이하러 왔다. 금슬이었다.

“주 부인, 오셨어요. 이분은 주씨 가문 큰소저시죠?”

“큰아가씨, 이쪽은 금슬이라고 해요. 태자비 마마를 곁에서 모시는 시녀예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반가워요.”

주묘서는 엽연채가 잘 아는 사람을 인사시키듯 금슬을 소개하는 걸 보고는 자신도 곧 이곳 사람들의 지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부인, 소저, 이쪽으로 오세요.”

“금슬아, 지난번에 닦아 놓은 꽃은 다 말랐지?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말린 꽃을 만들기에도 최적의 시기란다.”

“그렇죠!”

금슬이 엽연채의 말에 동조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 닦아 놓은 꽃은 이미 저희들이 말린 꽃으로 만들었어요. 마마께서도 흡족해하셨죠. 그런데 마마께서 또 주 부인을 불러 꽃을 닦게 하시네요. 부인도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마마께서 왼쪽에선 차를 끓이고 오른쪽에선 꽃잎을 닦는 그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러니 이렇게 또 부르신 거겠죠.”

“태자비 마마는 운치를 아시는 분이네요.”

주묘서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금슬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마마는 예전부터 그러셨어요. 전에는 저희들에게 차만 끓이게 하셨는데 그리하니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셨나 봐요. 그런데 주 부인이 오셔서 꽃잎을 닦으니 완벽해진 느낌이 드신 거죠.

부인이 하시는 양을 두 번 보시고 시녀에게 닦게도 하셨는데 그 느낌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부인께서 좀 수고스럽겠지만 부인을 이리 또 부르신 겁니다.”

주묘서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오늘부터 자신도 엽연채와 함께 태자비 마마께 꽃을 닦아 드리며 마마의 굄을 받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금슬의 안내를 받아 정화원에 도착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엽연채와 주묘서가 데려온 여종들은 정화원 밖에서 걸음을 멈추었고 수수한 차림의 시녀가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휴식을 취하게 했다.

주묘서가 엽연채를 따라 널찍한 방 안으로 들어가니 스물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목단계牡丹髻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봉긋한 쪽머리 사이에는 비취를 상감한 순금 화전花鈿 대여섯 개가, 중앙에는 모란 모양의 화승華勝이 꽂혀 있었고 홍옥으로 장식된 미심추眉心墜가 늘어져 있었다. 외모는 보통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으나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온몸에서 고귀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주묘서는 그 모습을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

‘이 사람이 태후와 황후 다음으로 가장 존귀한 여인인 그 태자비라는 말인가?’

외모도 자신보다 별로였고, 그저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다였다.

‘태자비 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다 저런 분위기를 갖게 될 걸.’

그런 생각이 들자 주묘서는 살짝 기분이 우쭐해졌고, 더 어여뻐 보이려고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은 태자비 앞으로 걸어갔다.

“마마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먼저 예를 올렸다. 주묘서도 얼른 그녀를 따라 예를 올렸다.

“마마를 뵈옵니다.”

“그만 일어나게나.”

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몰락한 주씨 가문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일행은 엽연채가 자신과 가까이 지낸다는 걸 알게 되자 자기도 들러붙겠다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태자비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도리어 새로운 얼굴을 반겼다. 한두 명 더 많아져 떳떳하게 왕래를 하고 지내면 자신의 속내를 숨기기도 더 쉬워질 터였다. 자신이 순탄하게 적자를 낳을 수만 있다면 주씨 가문 사람들을 좀 밀어 준들 어떠하랴.

그리 생각하며 태자비는 주묘서를 흘끗 쳐다봤다. 엽연채에게는 한참 못 미쳤지만 그래도 곱고 아리따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기분이 조금 언짢았으나 속내를 감추고 인사를 건넸다.

“이쪽이 주 소저인가 보군. 주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용월태로구나.”

“마마, 과찬이십니다.”

엽연채가 사양하자 태자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내 말이 어디가 과찬이라는 말이냐?”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이리 말했다.

“고운 외모는 그저 가죽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자비의 눈빛에 냉소가 어렸다.

‘그리 말할 수 있는 건 네가 고운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엽연채는 태자비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태자비가 과찬을 했으니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주제를 알고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했다. 그런데 태자비는 굳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결국 이쪽에서 어떻게 대답하든 간에 그녀의 열등감을 건드리게 되는 것이다.

금슬은 어여쁜 여인이 한 명 더 늘어나 태자비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눈치채고는 얼른 웃으며 말했다.

“주 부인, 주 소저. 자리에 앉으세요!”

오른쪽에 놓인 널찍하고 기다란 탁자 위에는 꽃이 가득 쌓여 있었다. 장미, 모란, 월계화 등 각양각색의 꽃들이 탁자 위에 가득했다.

엽연채는 오른쪽에 놓인 기다란 탁자 앞으로 걸어가 부들방석 위에 앉았고 주묘서는 금슬이 앉던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이내 묵묵히 꽃을 닦기 시작했다.

왼쪽에 놓인 기다란 탁자 앞에는 전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차림을 한 시녀 두 명이 차를 끓이고 있었다. 태자비는 상석에 앉아 석씨와 담소를 나누며 구럭을 떴다.

주묘서는 꽃잎을 막 닦기 시작했을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시간이 좀 흐르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부들방석 위에 계속 앉아 있으려니 두 다리가 콕콕 쑤시며 저려 왔고 하는 일은 너무 단조로워 지루하고 답답했다.

이건 태자비에게 초대받아 환대를 받는 자신의 상상 속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녀가 상상했던 장면은 태자비가 자신을 상석으로 부르고 시녀들은 차와 간식거리를 내오며 태자비와 자신이 마주 앉아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좌에 앉아 꽃잎이나 닦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 시녀와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주묘서는 모욕감이 들었다.

새파랗게 변한 그녀의 낯빛을 본 엽연채의 눈빛에선 황당한 기색과 비웃음이 어렸다. 그럼 자신이 귀빈으로 대접받을 줄 알고 왔단 말인가? 왜 태자비 같은 사람들을 ‘귀인’이라고 부르겠는가?

자신들은 신하의 여식이니 이렇게 불려오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황자나 공주의 독서 친구 같은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황자와 공주 같은 귀인들 앞에선 설령 하인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정성껏 섬겨야 했다. 태후 마마께서 어떤 귀족의 여식을 마음에 들어 해 궁중으로 부르면 당연히 차 시중을 들어야 하듯이 말이다.

한 시진쯤 지나 오시午時 일각이 되자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 소리에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왔구나.’

한편 주묘서가 태자 전하란 소리에 기뻐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검정색 망포蟒袍를 입은 젊은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주묘서는 늠름한 풍채에 훤칠한 외모, 범상치 않은 분위기와 품위 있고 고귀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 사람이 바로 대제에서 황제 폐하 다음으로 가장 존귀한 사내인 태자였다. 앞으로 그가 대제의 지고지상至高至上한 황제 폐하가 될 것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주묘서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황홀경에 빠져 반짝이는 두 눈으로 태자의 그림자를 쫓았다.

태자는 태자비 옆에 자리했고 그의 시선은 왼쪽에 놓인 탁자로 향했다. 사람의 넋을 뒤흔들어 놓는 엽연채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못내 아쉬운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주묘서를 흘끗 쳐다봤다. 그녀는 숭배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자는 그녀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우러러보고 비위를 맞추려는 미인들에게 그는 늘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태자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자 주묘서의 심장은 더욱 요란하게 방망이질해 댔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뻐 우쭐거렸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설렜다.

‘설마 태자 전하께서 나에게 한눈에 반한 걸까?’

그러나 태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저 소저는 예쁜 얼굴이기는 하나 그저 귀엽고 아리따운 정도라 백여언만도 못했다. 저 정도 미모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봐 온 그였다.

한편, 태자비는 주묘서의 반응에 제 분수도 모른다고 냉소했다.

태자는 엽연채가 보고 싶어 이곳에 온 참인데 주묘서가 자리하고 있으니 영 거슬리고 불편했다.

“애비愛妃, 말린 꽃을 만들려면 얼마나 오래 꽃잎을 닦아야 하오?”

태자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그가 재미를 볼 수 있게 해 줘야겠다고 판단했다.

“거의 다 닦았습니다. 이제 가져가서 말리기만 하면 됩니다.”

태자비의 의중을 알아차린 금슬이 주묘서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주 소저, 꽃을 말리러 가시죠!”

“어…….”

주묘서는 이제 막 태자를 만난 참이니 당연히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쑤시던 다리 역시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전… 작은 새언니…….”

그녀는 다급히 엽연채를 쳐다봤다. 자신은 여기에 남고 엽연채를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주 소저!”

금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주묘서는 깜짝 놀라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어서다가 다리가 너무 저려 ‘아야’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그녀는 이 모습이 아주 가냘퍼 보일 거라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태자를 쓱 쳐다봤다.

그러나 태자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며, 당연히 그녀를 안쓰러워하지도 않았다. 주묘서는 분한 나머지 코를 벌름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동안 대오리로 엮은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온 어린 시녀가 탁자 위에 놓인 꽃을 어느새 거의 다 바구니에 담았다.

금슬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청했다.

“주 소저, 가시죠!”

두 사람이 방을 나서려는 찰나, 주묘서는 그만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쳐다봤다. 떠나기 못내 아쉬웠다. 그러더니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금슬을 얼른 쫓아가 물었다.

“금슬아, 작은 새언니는 왜 우리와 함께 꽃을 말리러 가지 않니?”

“저희는 일을 나눠서 해요. 안에 아직 꽃이 조금 남아 있으니 주 부인께서 계속 닦으실 거예요. 소저는 소인과 함께 꽃을 말리러 가시면 됩니다. 얼마나 효율적이에요! 게다가 방금 전에 보니 소저가 자세 때문에 힘들어 보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소저를 부른 겁니다.”

주묘서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그녀는 얼른 부탁조로 말했다.

“난 괜찮았어. 나보다는 작은 새언니가 힘들어 보이던데. 금슬아, 다음부턴 작은 새언니를 데리고 나가 줘!”

금슬은 입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낯짝도 참 두껍구나!’

그러나 그녀는 이내 얼버무리며 주묘서를 재촉했다.

“어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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