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35화 (135/858)

제135화

진씨는 노기 어린 목소리로 딸을 윽박질렀다.

“그래서 내가 조바심 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애가 초대장을 받으러 오게끔 했으면 우리가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애가 우리 뜻에 따르지 않고 배기겠느냐? 그런데 이젠……! 네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알겠느냐!”

주묘서도 후회막심이었다. 궁명헌을 나설 때 이미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백 이낭과 강심설 앞에서 진씨에게 한바탕 혼쭐이 나자 그녀는 수치심이 몰려와 되레 성을 냈다.

“새언니가 물어본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만 좀 하세요!”

“이것이!”

진씨는 분에 겨워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백 이낭이 얼른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황실의 법도는 지엄하지 않습니까. 초대장에 셋째 부인만 오시라고 적혀 있으니 다른 사람을 데려가려면 당연히 여쭤봐야 할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눈시울이 붉어진 주묘서는 억울해 죽겠단 식이었다.

“흥, 어디 한번 보자꾸나. 네가 가든 못 가든 나랑은 이제 상관없다.”

진씨의 냉랭한 말에 주묘서는 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강심설은 해바라기씨 따위를 까먹으며 속으로 주묘서를 비웃었다. 엽연채에게 한 방 먹은 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절로 후련해졌다.

‘저리 경거망동하니 또 당하지. 이렇게 당하고도 앞으로 또 들러붙는지 내 지켜봐 주마.’

백 이낭은 분위기가 영 좋지 않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때 주묘화가 강심설의 아들 주학해를 데리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것이 모친인 강심설을 보자마자 달려들더니 먹을 것을 달라, 안아 달라 하며 재롱을 부리자 백 이낭과 주묘화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방 안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그러나 진씨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변변치 않은 주묘서에게 화가 나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교훈을 주어야겠다 싶기도 했지만, 사실 좋은 기회를 또 놓쳐 버린 것에 대한 분한 마음이 더 컸다. 그녀는 속으로 엽연채에게 음험하고 악독한 계집이라며 계속 욕을 퍼부었다.

주묘서도 저기압이기는 마찬가지였고 마음은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반 시진이 지났을 때쯤, 밖에서 녹엽이 큰 소리를 냈다.

“어머, 추길이 아냐.”

추길이 그녀의 말에 대충 답하며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는데, 이마에 난 잔머리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보아하니 오는 내내 달음박질한 듯 적잖이 지친 모습이었다.

“주인마님, 큰마님, 두 아가씨, 백 이낭.”

추길은 한 명 한 명 다 부르더니 방 한가운데에 섰다.

진씨는 굳은 표정으로 추길이 어떤 말로 자기들에게 둘러댈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항탁 위에 놓인 찻잔을 매만지며 집어 던질 적기를 살폈다.

그러나 추길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서신을 태자부에 전달했는데 큰아가씨를 모시고 함께 와서 말린 꽃을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태자부 시녀들이 태자비 마마께 여쭤본 다음, 일을 거들어 줘서 나쁠 것 없으니 함께 오라고 하셨다고 제게 전해 줬습니다.”

“그게 참말이냐?”

진씨와 주묘서, 강심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엽연채가 정말로 태자비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말인가? 그저 면피하려고 찾은 구실이 아니었단 말인가?

백 이낭은 입을 오므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눈을 밑으로 내리깔아 자신의 눈에 비친 조롱기를 감추려고 했다. 정말이지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속을 헤아리려는 사람들이었다.

백 이낭은 엽연채가 정말로 여쭤볼 생각을 했음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황실의 법도는 지엄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닭이 닭장을 드나들 듯 태자부에 아무나 들어가고 아무나 데려갈 수 있으면 황실의 체통이 뭐가 되겠는가?

또 백 이낭은 엽연채가 그런 사람이 아닌 줄도 잘 알았다. 진씨도 실제론 법도의 문제임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진씨는 엽연채에게 편견을 갖고 있어 엽연채가 그녀에게 적당히 핑계를 댄다고 곡해하는 것이었다.

“거 봐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새언니가 분명 저를 데려갈 거라고요. 이래도 아니라고 말씀할 수 있으세요?”

잔뜩 흥분한 주묘서가 웃으며 말했다.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엽연채를 믿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볼멘소리에 진씨의 얼굴은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거기다 추길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니 부끄럽고 분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정녕 친딸이 할 짓이란 말인가? 적 앞에서 어미의 체면을 짓밟아도 유분수지.’

추길은 ‘픽’ 하고 실소했으나 이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 진시辰時(오전 7시~9시) 삼각에 출발할 것이니 큰아가씨께선…….”

추길은 지난번 주묘서가 적성대에 갈 때 금계처럼 단장했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넌지시 귀띔했다.

“큰아가씨, 그럼 내일 동쪽 수화문에서 뵈어요. 아 참, 태자비 마마께서는 우아하고 단정한 차림을 좋아하십니다.”

전달을 마친 추길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묘서는 추길의 마지막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태자부에 갈 수 있다는 기쁨에 푹 빠져 우쭐거리고 있었다.

“보세요. 제가 가도 된다고 하죠.”

그러나 진씨는 엽연채가 자신들을 모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주묘서를 쏘아보며 내쫓았다.

“됐으니 어서 돌아가서 준비나 하거라!”

진씨는 엽연채가 자신의 체면을 깎은 게 못내 분했지만, 어쨌든 딸이 태자부에 갈 수 있게 됐으니 그래도 기분이 한결 나아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심설은 잔뜩 짜증이 나 속으로 엽연채에게 악담을 퍼붓고는 슬그머니 주묘서를 쳐다봤다. 채신머리없이 행동해 매번 망신을 당하는 이 아가씨는 내일 또 태자부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엽연채는 또 어떻게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을지, 이 시어머니는 엽연채를 또 얼마나 증오할지 자신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볼 것이었다.

주묘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백 이낭 옆에 앉아 있는 주묘화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묘화야, 내가 태자비 마마와 친해지면 너도 데려가서 견문을 넓혀 줄게.”

“네, 언니.”

주묘화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대화를 통해 주묘서가 태자부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 역시 기쁘긴 매한가지였다. 얼마나 흥분되는지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할 지경이었다. 주묘서가 태자부의 도움으로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 신분이 상승하게 되면 자신의 값어치도 따라서 상승하게 될 터였다.

“됐으니 다들 그만 나가 보거라!”

진씨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묘화야, 같이 가자. 가서 내 옷 좀 골라 주렴.”

주묘서는 그렇게 말하며 주묘화를 잡아 일으켰고 자매는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백 이낭이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인, 이따가 큰아가씨께 조언을 좀 해 드리세요. 아니면 저번처럼 또 민망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진씨는 지난번 ‘금계 사건’을 떠올리더니 진저리를 쳤다. 그러곤 백 이낭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자네가 말 안 해도 그리할 거네.”

강심설은 백 이낭이 쓸데없이 참견한다고 속으로 화를 냈다. 진씨에게 그런 좋은 귀띔을 해 주다니.

* * *

이튿날 아침, 진시辰時 일각. 바람이 불어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주묘서는 동쪽 수화문에서 만나자는 추길의 말을 다른 쪽 귀로 흘려버렸는지 엽연채의 거처인 궁명헌으로 달려가 그녀를 불렀다.

“작은 새언니.”

침실에서 치장을 하고 있던 엽연채는 그녀의 부름을 듣고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뜰에 서 있는 주묘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봤다.

어제 추길이 옷차림에 대해 귀띔해 준 터라 주묘서는 꽤 괜찮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우아하고 단정하면서 살짝 화사한 분위기도 느껴졌다.

그녀는 절지折枝 문양이 들어간 연한 남색 배자에 구슬 장식이 달린 장화妝花(수공예로 무늬를 넣어 직조한 비단) 유선군留仙裙(주름이 들어간 치마)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치마를 입었지만 우아한 배자가 치마의 대부분을 덮고 있어 전체적으로 우아한 분위기에 속에 화려함이 살짝 더해진 느낌이었다.

머리는 원보계元寶髻(둘둘 감은 머리를 정수리 높이까지 높게 묶어 양쪽이 툭 튀어나온 말굽은 형태로 만든 머리) 형태로 틀어 올렸고, 그 위에 홍옥이 상감된 나비 모양의 순금 화전花鈿과 성글게 짠 천으로 만든 꽃 모양 장신구를 꽂았다. 본래도 사랑스럽게 생긴 얼굴인데 이렇게 치장을 해 놓으니 더욱 아리따워 보였다.

주묘서 스스로도 오늘 치장에 꽤나 흡족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 혼자서 결정한 게 아니라 진씨와 백 이낭 등이 함께 고민하여 만들어 낸 결과였다.

엽연채도 오늘 주묘서의 차림에는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추길이 주묘서에게 귀띔을 해준 건 그녀가 정말로 우아하고 단정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난번처럼 돈벼락 맞은 졸부처럼 치장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기대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

“큰아가씨,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단장하는 중이에요.”

태자부에 한시바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주묘서는 바로 출발하지 못한단 소리에 좀 짜증이 났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그녀는 파초나무 아래 놓인 돌 탁자 옆에 앉아 거울을 꺼내 들더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치장이 잘 됐는지 이리저리 확인했다.

대략 일각을 기다렸을 때 엽연채가 단장을 마치고 걸어 나왔다. 거울을 들고 있던 주묘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들뜬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엽연채는 가냘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금과 유군을 입고 있었다. 수수해 보이는 옅은 황색 상의에 자잘한 하얀 꽃이 수놓인 수홍색 하의가 보기 좋게 어울렸다.

연분홍빛 비단 허리띠로 졸라맨 가느다란 허리춤에는 흰색 구럭과 보금步禁(허리춤에 다는 장신구)을 달았는데, 수홍색 얇은 피백은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랑살랑 휘날렸다. 여기에 화사한 얼굴에서는 생기가 넘쳐흐르니 그야말로 활짝 핀 꽃처럼 아리따운 모습이었다.

주묘서는 오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자신했으나, 엽연채가 자기 옆에 서자 그녀의 아름다움에 묻혀 스스로가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대금과 유군을 입어 몸매를 드러냈을 텐데!’

주묘서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가요, 큰아가씨.”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청했다.

주묘서는 기분이 바닥을 쳤지만 성질을 부릴 수는 없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두 사람은 함께 궁명헌을 나섰다. 가을바람이 불어 날씨가 쌀쌀한 탓에 두 사람이 동쪽 측문의 수화문 근처에 다다랐을 때 몸에 흐르던 땀은 흔적도 없이 다 말라 있었다.

엽연채와 추길, 주묘서와 춘산 네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경인은 말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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